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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아리 Apr 15. 2023

나의 형제

오빠에 대해

  나의 부모에 이어 친오빠에 대해 말하려 한다.


  친오빠. 그는 내 오빠로 태어난 인간이었다. 나보다 1년 위 터울인 그는 1년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 서열 위였다. 우리 집안은 어려서부터 위계를 강조한 집안이었는데 그 서열이래 봤자 실제 효력은 미비한, 이름뿐인 서열이었지만 어렸을 때는 내 부모가 내게 늘 지겹도록 상기시킨 개념이었다.

  오빠한테 어딜 감히. 어린 시절의 내게 어머니는 늘 이렇게 말씀했고 유년의 나는 어머니가 오빠를 편애하는 것이 아닐까 오해할 정도였다. 성인이 된 지금도 그 잔해가 남아있다. 오빠 역시 내게 오빠로서의 대우를 받으려 했는데 어린 시절 나와 오빠의 관계와 기억을 더듬어보면 코웃음이 나왔다.


  오빠로 말하자면 보수적인 우리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장남으로서의 노릇이라고는 오빠라는 나이뿐인 인간이었다. 자식이 두 명뿐인 핵가족의 장남이란 장남으로 불릴 수도 없는 것이지만 어찌 됐든 오빠는 우리 집의 장남이었고 나는 막내였다.


  어린 시절의 오빠를 떠올리면 성인이 된 최근의 오빠까지 생각해 볼 때 될성부른 싹?이었다. 어려서부터 공부와는 담을 쌓았다. 공부보다는 컴퓨터 게임과 친했는데 친한 정도가 아니라 거의 게임이 오빠고 오빠가 게임이라고 할 정도였다. 기상이변일 정도로 긴 여름 장마처럼 정말 지겹게도 오빠는 게임에 집착했다. 하루의 대부분을 게임과 보냈고 게임은 오빠의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되고 최근까지 징하게 오빠와 함께했다.

  가히 중독이라 부를 정도였다. 학교 갔다 돌아오면 게임을 했고 한밤중, 모두가 잠든 늦은 시간에도 게임을 했다. 보다 못한 부모가 컴퓨터를 거실로 끌고 와도 소용이 없었다.


  오빠의 청소년기, 공부는 없다시피 했다. 시험기간 이전에도 이후에도 마치 시험이 대수인가 싶을 정도로 게임을 해댔고 과외를 받는 도중에도 방 밖으로 나와 게임을 했다. 과외 숙제는 당연히 안 했다. 과외 선생들의 골치 거리였다. 그런 생활을 했으니 중학생 때는 성적이 바닥을 쳐서 당시 담임이 어머니에게 진지하게 실업계 고등학교를 권유할 정도였다. 그러나 나의 부모에게 실업계 고등학교란 절대 있을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곳은 질 나쁜 학생들만 가는 질 나쁜 곳이었고 무엇보다 대학과의 단절을 의미했다. 어머니는 오빠를 실업계로 보내려는 담임에게 집안의 장식장에 숙성돼 있던 양주까지 들고 가서 말렸다.

  그렇게 인문계 고등학교로 간 오빠는 엄마의 기대가 무색하게 대학 생각이란 일절 안 하며 보냈다. 어머니는 오빠를 대학에 보내기 위해 고액 과외까지 시켜봤건만 오빠는 게임을 놓지 않았고 결국 부모의 염원이었던 대학이 아닌 전문학교나 겨우 가게 되었다.


  그런데 오빠는 이상하게 머리가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닌 듯했다. 경계선 지능인 나와는 달리 오빠의 아이큐는 평균 정도였다. 초등학생 때의 검사와 인터넷 아이큐 검사를 통해 추론하면 그랬다. 때로는 평균이 아니라 비상해 보이기까지 했는데 게임에 있어서는 모든 룰을 거의 통달한 것도 모자라 잘하기까지 했고 전문학교지만 컴퓨터 관련 학과로 진학할 정도로 컴퓨터를 나름 다뤘다. 내가 몇 번의 설치 알고리즘을 거쳐야 하는 프로그램 내려받기를 못할 때마다 오빠가 대신 받아주기도 했다. 인터넷으로 큐브 맞추는 공식을 알아서는 단숨에 큐브 전체를 맞추기도 했다.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오빠는 친척 집에 가는 지하철 노선을 다 외우던 아이였다. 아버지는 오빠가 천재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이리 커버렸다고 혀를 차곤 했다.

 

  어린 시절부터 오빠와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오빠와 치고받고 싸울 때가 많았다. 오빠는 천성이 게을러 무언가를 사러 밖으로 나가는 걸 귀찮아했는데  자신이 나의 오빠라는 점을 이용해 내가 자신에게 오빠라고 부르지 않을 때마다 심부름을 시키곤 했다. 사실 내게 심부름을 시키는 방법은 그에게 많았다. 어린 시절 컴퓨터와 담을 쌓은 내가 컴퓨터 관련으로 곤란을 겪을 때마다 해결을 해주고는 심부름 몇 번을 단서로 걸었다. 어린 시절의 오빠는 자신의 재능을 이용해 내게 자신의 노동을 대신 시킨 이였다. 내 어리석음은 오빠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그런 오빠에게 힘을 실어준 것도 어머니였다. 오빠와 나와 싸우면 오빠의 편을 들 때가 많았고 언제나 논리는 오빠니까였다. 그 논리는 오빠에게 합리적인 정당화가 됐다.

  

  오빠는 성인이 되고도 어린 시절과 달라진 부분이 없었다. 어린 시절의 버릇대로 게임에 빠져들었다. 오빠가 성인이 되고 지금 31세의 나이가 될 때까지 알바를 포함한 일을 한 경험은 손에 꼽았다. 군대를 제외하고 20대의 거의 대부분을 백수로 보냈다. 알바를 한 경험도, 내가 보채서 간 하루 일당 알바 세 번 정도가 다였다. 1년 2개월 정도 회사 생활을 한 전적이 오빠의 사회생활의 전부였다. 사회에 나오지 않은 오빠는 방구석에 누워서 잠을 자거나 노트북으로 게임을 하거나 인터넷 방송을 보는 생활 패턴을 반복했다. 내가 숱한 알바를 전전할 때 오빠는 사회에 나가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회사를 관두고 3년 넘게 취업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알바 하나 하려 하지 않는 오빠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집안의 폭풍을 몰고 오는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였다면 오빠는 성질이 게으르고 게임에 빠져 사는 것 외에는 집안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한 존재였다. 부모 입장에서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해 극단적으로 행동하는 나보다는 순한 자식이 오빠였다.

  오빠는 집안의 방관자로 집안이 나로 인해 뒤집어질 때마다 같이 폭풍에 휘말렸는데 그렇다고 나를 위해, 집안을 위해 한 것은 없었다. 아니 못했을 것이다. 오빠는 어쩌면 집안의 또 다른 희생자인지도 몰랐다. 오빠에게는 게임과 침대만 있으면 별 다른 욕망도 좌절도 없이 인생을 순탄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오빠의 인생은 나로 인해 파동이 쳤다. 집안이 연이어 시끄럽고 어머니와 내가 극단적일 정도로 대립할 때마다 오빠에게도 불똥이 튀었다. 오빠에게 나는 평탄하게 살 수도 있었던 자신의 인생에 회오리바람을 몰고 오는 폭풍의 진원지로 보였을 것이다.

 

  지금의 오빠는 실업하고 3년만에 대기업 하청업체의 직원으로 입사했다.  집과 멀리 떨어진 지역이라 회사 사택까지 얻어 지금은 독립한 상태다. 아직 입사한 지 일주일 정도밖에 안 되었지만 오빠는 집안에 이제 없다. 같이 살 때는 몰랐는데 없어지니까 빈자리가 느껴진다. 나의 친오빠는 내 인생에 그리 큰 존재는 아니었지만 현실 남매로서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다.


  사실 친오빠는 게으르고 게임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나쁜 인간은 아니다. 성정은 순했다. 예민하고 신경질적이며 불 같은 아버지와 역시 예민하고 극단적인 정신상태의 나와, 다정하고 헌신적이지만 독한 기질이 있는 어머니와 달리, 오빠는 예민하지도 극단적이지도 딱히 신경질적이지도 않았다. 우리 집안에서 가장 유순한 존재로 유일무이했다.

  내게 온 집안의 관심이 쏠릴 때, 상대적으로 순한 오빠는 묵묵히 자신의 고뇌를 삼켰을 것이다. 오빠라고 인생의 고저가 없진 않았을 것이다. 온 가족이 극렬한 성격을 뿜어댈 때 오빠만 조용히 웅크리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게임과 인터넷 방송은 그런 오빠에게 어쩌면 유일한 소통의 창구였는지도.

  

  요새 느끼는 거지만 오빠는 그런 데로 괜찮은 인간일지도 모른다. 오빠는 어려서부터 힘들단 내색을 하지 않는 아이였다. 정말 힘든 일이 없어서 그런 건지  의중은 모르나 그랬다. 어른이 돼서 전 회사에 다녔을 때도 홀로 중국 출장길까지 올랐으나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지금 겨우 취직한 직장에 대해서도, 분명 회사 생활의 압박과 집과 떨어져 외로움을 느낄 것이었으나 그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오빠에게는 은근 묵묵하고 우직한 기질이 있다. 그런 점은 나와 달리 오빠의 선한 면이다. 어렸을 때는 몰랐으나 커보니 오빠의 좋은 성질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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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 친오빠. 내 인생에 너무 많은 지분을 갖고 나와 태생으로 연결돼 떨어질 수 없는 인간관계. 혈육이라 부르는 관계로우리 가족은 한 지붕 아래 서로가 서로에게 촉수처럼 이어져 서로의 인생에 관여하고 영향을 미쳤다. 부모와 내 형제인 오빠까지 돌아보니 내 인생이 그들의 인생과 부딪히며 얼마나 상호작용 했는지 보인다. 우리 가족은 비록 서로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받았어도 대체로 좋은 가족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풀어야 할 앙금이 각자의 밑바닥에 있지만 서로를 사랑하고, 행복과 기쁨을 같이 느낀다. 인간에게 원가족(배우자나 자녀가 아닌 형제나 부모)이란 지울 수 없는 멍에이자 비극이기도 하지만 어떤 인간관계보다도 끈끈하고 강력한 정서를 공유하기도 하는 공동체다. 자신의 평생과 운명을 함께한 공동체.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는데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가족은 그 어떤 누구보다도 강렬한 존재들이며 잊을 수도 잊힐 수도 없는 자신 안의 화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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