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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아리 Jul 28. 2023

거짓말의 가치

나 자신을 위장한다는 것

  굳이 밝힐 필요 있을까요?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몰라요. 경계선 지능처럼 안 보여요. 내가 외부로부터 듣는 말들은 내 거짓말을 합리화한다. 맞다. 어쩌다 검사를 해서 경계선 지능임을 '진단'받았을 뿐 모르고 살았으면 나는 일반인이었다. 나와 같은 부류들과 달리 검사를 받지 않은 '잠재 경계선 인구'도 적지 않게 있을 것이다. 일반인 중에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경계선인 사람들은 일반인처럼 섞여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오늘도 자신의 능력과 공부머리, 일머리를 탓하며 자신의 자존감을 짓밟고 자신이 멍청한 탓이라며 한탄을 한다. 그들은 자신의 본질과 정체성은 정상 지능을 가진 일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사회에서도 그런대로 적응해나가 경계선 지능임을 본인 스스로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나도 경계선 지능으로 진단받았으나 다른 사람, 사회에서 만나거나, 특히 연애를 전제로 만나는 특수한 경우의 사람들에게는 내 정체를 철저히 숨긴다. 그들에게 나는 완벽한 일반인이다. 물론 업무나 일 같은 비즈니스적인 공적 영역에서는 낮은 지능 지표로 인해 물리적 기능이 떨어지고 수행능력이 저조해 탄로가 날 수도 있겠지만 업무나 일 외 사적으로 만나는 경우 자신의 약점과 뒤떨어지는 기능들을 충분히 숨길 수 있다. 사적 만남에서 중요한 것은 인상과 언변, 친밀한 태도 같은 인간적 요소이지 업무 능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특히, 내 연인이 될 만한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다녔다. 소개팅 어플을 통해 연락이 된 모든 남자들에게 카페에서 일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 카페는 망하기 일보직전인 복지 일자리 카페가 아니라 그럴싸한 공공기관 내 개인카페가 된다. 나는 그들에게 향후 개인카페를 차릴 예정이라고, 전도유망한 척 가식을 떨었다. 나에게는 과분한 남자들, 좋은 피지컬과 직업을 가진 그들에게 나는 최대한 내 멍청함을 숨기고 매력적으로 보이려 애썼다. 실제로 그들도 첫 만남에서는 내게 호감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실제 연인으로 발전하기도 전에 대부분은 연락이 끊어졌다. 아무래도 여러 이성과 연락하는 어플의 특성상 맺고 끊음이 빠르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고 현재 안정적인 직장이 없다는 현실적인 능력의 문제가 내 매력을 반감시키고 그들이 더 이상 연락을 이어나갈 호감을 못 느끼게 했을 것이다. 이 모든 건 추측일 뿐 사실 나도 왜 연락이 중도에 끊어져버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경계선 지능임이 티가 나서, 모자란 거 같아서 까인 경우는 없었다.

  내 전 남친에게도 연애 내내 숨겼는데 마지막에 헤어질 때 그는 내게 미래가 없다는 말을 하고 돌아섰다. 나를 절절히 사랑했던 그였지만 그는 내 경제적 능력을 들먹이며 헤어졌다. 외관과, 내면의 일부까지도, 숨길 수 있어도 그 사람의 사회 경제적 능력치나 이력은 또 다른 문제였다. 아무리 내가 경계선임을 숨겨도 능력이 없으면 나는 매력적이지 않았다


  사실 현대 사회는 능력만능주의다. 능력은 곧 돈이다. 나는 복지관 카페에서 한 달에 30만 원도 못 받고 일하고 있다. 나는 돈이 없고 별다른 스펙도 없다. 그런 내게 연애란 단순한 인간관계가 아니었다. 사랑받고 가치를 추구하는 일이었다. 잘난 일반인 남자를 연인으로 만들면 내 가치가 올라갈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연락이 숱하게 끊겨도 연락할 사람이 숱하게 나타났다. 나 자신을 숨기고 나는 차분하고 신중하고 지적인 것처럼 나 자신을 꾸몄다. 책을 좋아하고 보수적인 여자. 나는 그들 중 일부에게 똑똑해 보인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럴 땐 기분이 좋았다. 나 자신이 인정받는다 느껴졌다. 경계선 지능이라는 열등감에서 똑똑하다는 소리는 일종의 카타르시스였다.


  하지만 결국 나는 경계선 지능이었다. 수학은 초등학교 수준보다 못할 정도로 끔찍했고 일머리가 떨어져 알바 하나 제대로 못하는 느린 학습자였다. 가 아무리 거짓말을 하고 내 자신을 지적으로 포장해 남자들에게 호감을 사도, 결국 내가 경계선 지능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일반인보다 떨어지는 지능은 사실이었고 객관적 수치가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지능검사상의 수치들은 내게 수치였다. 수치들에 대한 객관적 해석은 나라는 존재가 경계선 지능이라는 걸 조목조목 가리켰다. 내 내면까지 학술적 서술로 난도질당하는 기분이었다. 군더더기 없이 내 지능지표의 의미를 나열하는 서술문들은 내게 술보다 지독했다.

 

  세상의 기준은 점점 엄격해지고 일반인들은 점점 잘나 졌으나 경계선 지능인 같은 소수의 '더딘 학습자'들은  그로 인해 존재를 잃어갔다. 일반인들의 수준이 잘나질수록 그들과의 차이가 극명해졌고 경계선인들은 사회의 가장자리로 더 밀려났다. 그렇다고 장애도 아니어서 일반인들 틈에 섞여야 하는데 그들은 도저히 수준이 높아져 가는 일반인이 될 수 없다. 그들은 일반 사회에 적응을 못하고 경제활동 인구에서 제외된 채 사회적 배려자가 되거나 장애등급을 받고 사회적 지원에 의존해 겨우 자립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그들은 심각한 장애는 아닐지언정 일반인이 아니었다. 일반인과 경쟁하면 학살당하듯 일자리에서 밀려났다. 그들은 사회에서의 몫을 잃고 가족들의 경제적 부담이 됐다.  


  연애시장에서 경계선 지능 같은 장애는 철저하게 외면받는다. 연애가 아닌 연애시장은 자본주의의 확실한 단면이고 계급주의로 이루어져 있다. 소개팅 어플도 연애시장의 한 부분이다. 외모로 직업으로 급을 나누고 급에 맞는 사람들만 소개된다. 외모나 직장이 일정 수준 이상이 아니면 가입이 승인되지 않기도 한다. 직장 인증까지 까다롭게 해야 하는 어플의 경우, 여자는 인증을 하지 않아도 되거나 까다롭지 않아서 망정이었다. 나 같은 경계선 지능은 애초에 그곳에 있을 자격이 안 됐다.


  어느 직장 인증 어플은 파티 기능이라고 자유롭게 이성을 구하는 게시글이 따로 있었는데 내용을 읽어보면 완전 그들이 사는 세상이었다. 다들 의사나 전문직종, 고액 연봉 같은 직업과 소득으로 무장하고 자신을 어필하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최상으로 나온 매력 지수를 당당하게 공개했다. 그곳의 이성들은 모두 잘생기고 직업이 출중했다. 원하는 여성상은 키 160대 중반에 슬래머(슬림 글래머)이거나 골반이 넓거나 자신과 같은 급을 원했다. 남자는 직업이었고 여자는 외모였다. 나는 어느 조건도 그들의 기준에 못 미쳤다. 나는 어플을 삭제했다.


  똑똑하고 잘나게 태어난 사람들. 우리 같은 경계선 지능이 아닌 그들은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들이 잘났고 그건 사실이니까. 우리와는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아무리 경계선인 게 티가 안 나도, 일반인인척 하며 아무리 자신을 포장한다 해도, 나와는 수준이 한참 맞지 않는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이미 그 자체로 완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상대적 박탈감이 느껴졌다. 내 존재 가치가 그곳에서 박탈당한 것 같았다. 박탈당할 게 있어야 박탈도 당하는 건데 내가 가지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직업도, 돈도, 명예도....

  

   나는 오늘도 경계선 지능을 숨긴다. 나는 외로웠다. 내가 경계선 지능인 만큼 나를 보완해 줄 그럴듯한 남자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런 남자는 결국 없었고 내 주제에 찾을 수도 없었다.

  경계선 지능을 이해해 주고 만나줄 남자는 없다. 나는 그 현실을 안다. 나는 경계선 지능임을 끝까지 숨기고 그들이 매력을 느낄 만큼 나 자신을 치장한다. 마치 그림을 지우기 위해 다른 그림으로 계속 덧칠하는 것처럼 경계선 지능을 지우기 위해 나 자신을 거듭 꾸며낸다.

  남자가, 남자들이 내게 호감을 보인다. 그들이 보인 호감은 내가 철저히 숨긴 정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보내는 호감이다. 내가 보여주는 밝고 깨끗한 면에만 공감한 호감. 그러나 나는 그 호감이 싫지 않다. 더 밝은 척 과장한다.

  경계선 지능을 숨기기 위한 내 위장술은 효과가 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경계선 지능이 범죄이력도 아니고 숨겨야 하는 일일까. 하지만 경계선 지능 커뮤니티에 소속돼 있고 일반인과도 어느 정도 교류해 본 결과 나의 답은 이렇다. 경계선 지능은 범죄이력만큼이나 위험하다. 경계선 지능은 분별력이 일반인보다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일반인보다 세상 물정을 모르니 남에게 이용당하기 쉽다. 무시나 멸시에 노출돼 상처받기도 한다. 경계선 지능이란 사실이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고 집단 조롱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경지라는 사실을 숨기고 애써 일반인을 연기해야 한다. 경지들이 살아남고 무시를 당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는 모방과 꾸밈이 필요하다. 진실 그대로 경계선 지능임을 순수하게 드러내놓고 살다 간, 혹독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경계선 지능은 숨길 수 있다면 숨겨야 하는 멍에다.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드러나려는 정체성을 의식적으로 통제하는 학습이나 훈련이 필요하다. 겉모습을 바꾸는 건 쉽다. 경계선인들이 시도조차 하지 않아서 그렇지 자신을 위장하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다.

  바뀌지 않는 건 내면이다. 그러나 겉모습을 바꾸면 내면을 그 안에 숨길 수 있다.


  그런데, 나는 문득 불안해진다. 내 의도적인 은폐. 경계선 지능을 숨기고 더 매력적이고 밝아 보이려고 했던 표면적인 거짓말이 걷히고 내 민낯이 드러난다면 어떻게 될까. 내가 경지라는 사실을 온 세상이 알아버린다면, 정체가 발각된다면.

 끔찍했다. 나는 그들과 연인도 친구도 될 수 없을 것이다. 연애는 끝장이었고 내가 이룩한 모든 호감들과 이미지들은 편견과 편견에 따른 부당한 무시로 무너질 것이다. 환심의 대상에서 경멸의 대상으로 전락한 나는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다.


  경지라는 사실은 끝까지 쫓아오는 그리스 신화의 복수의 여신처럼 내 인생을 쫓아다닐 것이고 나는 불편하고 불안한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살아갈 것이다.

 

  너는 일반인이 아니라고 경계선 주제에 일반인과 왜 대등하게 섞이려 하냐는 궂은 목소리가 내 안에 울렸다. 경계선 주제에. 그 말이 내내 맴돌았다. 타인에게서 들은 말이 아닌 내 자신이 하는 말은 타인의 말보다 더 싸늘하다.

 나는 지능이 경계선이라고 정의되고 싶지 않았다. 내 숱한 거짓말들은 경계선 지능과의 단절을 원했다. 학명이 붙여지듯 붙여진 내 진단에 대한 강한 부정이었다


  거짓말들에 이제는 지치려 한다. 경계선 지능을 그만 인정하면 편할까. 거짓에서 진실을, 일반인인척 하는 탈을 벗고 경계선 지능임이 밝힌다면 내가 얻는 것은 무엇일까. 그보다 잃는 것들이 무엇일까.

  경계선 지능으로서의 삶은 모든 걸 잃을 뿐이었다.

  경계선 지능과, 거짓말과 기만으로 이루어진 정상성 중 어느 것이 더 나을까.  만약 당신이 경계선 지능이라면 경계선 지능을 떳떳하게 밝힐 수 있을까. 자신을 더 매력적이고 훌륭하게 과장하는 거짓말을 과연 나만 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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