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율아리 Aug 16. 2023

콘크리트, 유토피아,

영화를 보고 나서

  콘크리트 유토피아라는 영화를 엄마와 함께 오늘 관람하고 왔다. 광복절 휴일도 지나고 오늘은 평일임에도 영화 예매율은 높았다. 내 앞에서 누군가 오펜하이머 영화를 예매하는 걸 봤는데 아예 좌석이 매진이었을 정도. 엄마와 예매한, 우리가 볼 영화 역시 좌석이 꽤 차 있었다.

  5관 F10, F11열. 콜라를 사가지고 영화를 감상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쓴다.


  내가 쓰는 글은 짤막한 영화 감상평이 담겨있지만 영화를 해석하거나 분석하거나 정리하는 글은 아니다. 그런 글을 원한다면 네이버 블로그 해석이나 영화 평론가의 글을 읽으면 된다. 나는 그저 영화를 빌미로 내가 느낀 순수 감상과, 영화에서 영감을 받아서 하는 '다른 얘기'를 하고 싶어서이다. 그래서 제목도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아닌, 콘크리트, 유토피아다. 나는 두 단어를 '따로' 얘기하고 싶다.

  그러니까 영화 감상 10퍼센트에 90퍼센트는 '딴소리'가 될 글이다. 나는 내가 어떤 글을 잘 쓰고, 어떤 글을 잘 못 쓰는지 소위 글쓰기 역량을 잘 안다. 해석이나 평론글 같은 논리 정연하고 문단과 의미의 상관관계가 훌륭한 정제된 글은 내 역량에서는 쓸 수 없는 글이다.

 

  영화는 소개글만 봐도 잘 알 수 있는 선이 굵직하고 확실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대지진이 일어나 초토화가 된 세상에서 황궁 아파트만 유일하게 살아남아 생존을 위해 아파트를 지키려 외부인(영화에서는 바퀴벌레라고 묘사된다)을 몰아내고 아파트를 노리는(이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해 몰려오는 것에 가깝지만) 그들과 투쟁을 벌이고 사투하는 황궁 아파트 입주자들을 다룬다. 거기서 아파트 입주자들이 아파트를 사수하기 위해 서슴없이 벌이는 행각들과, 대표로 뽑힌 자의 무자비함과 영화 속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의 지위의 인물이 자신의 아내와 가정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잔혹함에 동화되는지, 아파트 입주자들끼리의 내부 분열 등 인간 군상의 내러티브가 펼쳐진다.


  영화를 보면 선과 악처럼 분명하게 나뉜 두 층위를 볼 수 있는데 바로 유일하게 살아남은 황궁 아파트 입주자들과 폐허로 아파트를 잃고 생존의 기로에 놓인 절대다수의 외부인이다. 아파트는 주민의 것이라는 단결된 구호 아래 입주민들은 처절하게 외부인들로부터 아파트를 지켜내려 한다. 여기에 선과 악은 분명히 나뉜 두 층만큼이나 분명하지 않다.

  입주민. 이웃이 아닌 입주민의 개념은 아파트 한 곳으로 한정 돼있다. 입주민 이외의 절대다수는 타자고 이 영화의 재난 상황에서 타자란 자신들을 생존을 위협하는 적이다. 그들은 영화에서 서사의 중심이 되는 인물 군상이다. 입주민은 곧 소속 집단이다. 같은 주거 건물에서 사는 집단. 그러나 이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웃이라기에는 너무 개인화된 집단이다. 영화의 스포가 될 수도 있는데 영화의 입주자 대표가 정말 입주민이 맞는지,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도 입주자 다수는 모르는 상황이 나오고 그 상황은 영화의 절정에서 갈등이 된다.


  영화의 입주민 집단을 떠올리면 사회의 여러 소속 집단들이 떠오른다. 소속 집단들은 같은 소속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같은 개념과 사상, 신념을 공유한다. 그 집단들은 콘크리트처럼, 견고하고 쉽게 움직이거나 변하지 않는다. 대부분은 폐쇄적이다.       

  콘크리트. 아파트의 재료이자 하나의 상징 개념이기도 하다. 콘크리트층. 콘크리트층. 하며 주로 정치권에서, 쉽게 표심을 바꾸지 않는 충성스러운 유권자층을 지칭하는 용어로 많이 쓰는데 좋은 의미보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더 담겨있다.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게 집단화된 무리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공고히 하고 그 공고함은 타 집단이나 개인들을 철저히 배제하거나 무시한다. 유권자, 입주자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집단도 마찬가지다.


  장애가 없는 비장애 계층. 즉 일반 계층도 콘크리트층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의 개념이 무궁무진하지만 여기서는 뚜렷한 장애가 없고, 아파트나 개인 주거공간을 소유하고 있거나 또는 사회 내 직장이든 사회 커뮤니티든 소속된 다수의 평시민을 말한다.

  거기서 소속되지 않는 계층들은 편견이라는 그들의 틀로 사회 내에서 배재되거나 그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무시된다. 일반 계층들은 자신들이 '일반적'이라며 같은 '일반적' 사상을 공유하고 일반적이지 않은 것들은 집단에서 제외하는데 여기서 많은 사회 문제가 야기되고 있다. 비장애 위주로 만들어진 사회 시스템 안 장애인들의 고충이나 고충을 넘어선 생존권, 인권 유린이라든가 장애인뿐만 아닌, 사회 내 일반 계층에 소속되지 못한 아웃사이더들의 사회 적응 문제 등 심각하다. 영화에서 아파트는 주민의 것이라는 구호가, 이 사회는 일반인의 것이라는 구호처럼 들리면 환청인 걸까. 분명 이 사회는 똑똑한 일반 계층, 그러니까 일반 계층 내 특권층이 이끌어가고 다수의 장애가 없이 멀쩡한 일반 계층들이 유지하며 돌아간다. 여기서 장애인이나 아웃사이더 같은 일반적이지 않고 일반적 함의로서 능력이 없다고 여겨지는 계층이 유입되는 건 일반 계층들의 생존권과도 연결될 수 있다. 그들과 더불어 살려면 사회를 유지 구성하는 다수의 일반 계층의 어느 정도의 희생을 치러내야 한다. 희생뿐 아니라 자신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유지해 왔던 이 사회에서 그들의 자리 역시 크고 작지만 위협될 수 있다. 꼭 영화에서 황궁 아파트 입주자들이 외부인을 바퀴벌레라 지칭하며 아파트를 지켜내려 했던 이유가 생존뿐만 아닌, 자신들이 힘들게 입주하고 지켜낸 아파트에 쉽게 침입해 살려는 그들에 대한 경계심으로 나타나는 걸 보는 것 같다. 꼭 사회의 축소판 같은데 영화와 사회의 다른 점이라면 영화는 황궁 아파트 입주민 집단이 소수지만 사회는 일반 계층이 다수라는 것이다. 집단 생존권 투쟁이라는 점은 현실과 같다. 영화는 극한의 재난 상황에서 펼쳐지지만 재난 상황을 빼고 내러티브의 내적 의미와 갈등을 살펴보면 현실 사회와도 닿아있다.


  영화에서 입주자 집단들은 외부인의 침입을 막아내고, 식량 수색이라는 명목하에 폐허가 된 도시의 식량들을 갈취하는 식으로 식량을 축적하고 자신들만의 축제를 벌인다. 그들만의 축제, 그리고 황궁 아파트는 그들만의 유토피아가 된다. 하지만 유토피아는 이상향이기 전에 없는 곳이다. 재난으로 멸망한 도시에서 그들만 잘 먹고 잘 사는 유토피아는 없다.

  그들만의 유토피아는 없는 것. 일반 계층들만 포용하는 유토피아 사회는 없다. 한쪽에서는 생존하여 잔치를 벌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폐허가 된 도시에서 생사를 오가며 얼어 죽는다. 한쪽에서는 복지와 문화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다른 한쪽에서는 삶의 구석으로 내몰려 암울한 인생을 살아간다. 어느 한쪽으로만 기울어진 유토피아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이다 영화는 희망을 계속 찾는데 마지막, 희망이 입주자들끼리의 무자비한 단결이 아니라 외부인들도 같이 살아가는 것임을 보여주는데(영화를 보면 아시겠지만) 이 사회의 희망도 영화가 넌지시 던진 메시지와 같지 않을까.


  경계선 지능임에도 주제넘게 내 글에는 이런 담론들이 적지 않은데 실제로 내가 체감하는 사회가 결코 온정적이지 않기 때문이며 나 역시 일반 계층에 속해있지 않고 오히려 분류가 쉽지 않은 미정의 계층으로 사회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인생을 어둡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 계층만의 편의로 이루어진 사회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람은 자신의 기준과 경험대로 세상을 해석한다. 이런 영화를 보면서 내 처지와 사회를 생각하는 나는 영화를 곡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이 글은 이 영화가 나타내는 문법과 주제를 '정독'한 게 아닌 '오독'한 것이며 지나친 확대해석일 수 있다. 그래서 앞에서 밝혔다. 이 글은 영화를 해석한 게 아닌 영화와는 다른 얘기라고. 나는 그저 내가 생각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참고로 영화는 재밌었다. 초중반부의 힘 있는 전개와 달리 후반부 뒷심이 조금 부족했긴 했지만. 다음에는 오펜하이머를 봐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거짓말의 가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