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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아리 Mar 25. 2024

다시 쓰는 내 생활

경계선 청년 셋, 피부과 취업

  오랫동안 브런치를 쓰지 않았다. 게시글을 쓰지 않은 건 다분히 내 현실이 글로 쓰이기에는 미약했기 때문이다. 작년 12월도 올해 2월까지도, 나는 정신재활시설에만 다니며 백수로 생활을 영위했다. 평일날 시설에 가고 집으로 돌아와 아무것도 하지 않은 하루하루는 기록할 만한 점이 없었다.

  그러다, 국민취업지원제도를 통해 병원코디네이터 학원에 등록했고 병원 코디 쪽으로 취업을 하기 위해 교육을 받았다. 나는 국취제(이하 국민취업지원제도)에서 1 유형으로 선발돼 한 달 50만 원의 수당으로 생활하며 훈련을 받았고 결국 피부과 한 곳에 합격을 해 다니게 됐다.


  피부과 취업은 내겐 또다시 겪게 된 사회의 벽이었다. 복지 사각지대의 당사자로서 또 적응 문제와 직면하게 된 것이었다. 지금껏 해왔던 모든 경제적 일들에서 그랬듯 나는 피부과 업무에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내가 맡은 파트는 처치였는데 주로 시술받으러 온 고객들을 안내하고 각종 시술을 위한 준비를 하며 고객들이 여러 시술 방에서 원활하게 시술을 받고 나갈 수 있도록 내방 고객들을 시술 순서에 맞게 시술방에 배치를 하고 일일이 콜을  하는 일이었다.


  고객들은 많았고 한 번에 여러 시술을 했으며 그들이 받는 모든 시술을 파악하고 준비하고 배치하는 일은 한 번에 동시에 벌어졌고 소위 멀티가 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첫날부터 거듭 콜 실수를 했으며 고객들의 동선 파악과 시술 파악이 되지 않아 심각하게 업무를 헤맸다. 그때마다 직원들의 정색과 날카로운 말이  오갔다.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지금 뭐 하시는 거냐. 누가 그렇게 하라 그랬냐 같은 나를 몰아세우는 지적들. 

  나는 같이 들어온 동기보다 한참은 느렸고 일 못 하는 직원이 되어 여러 직원들의 눈총을 받았다. 업무가 나와 전혀 맞지 않았고 내 특성과 전혀 반대되는 능력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심지어 백화점 라운지 알바 때, 8살이나 새파랗게 어린 동기 여직원에게 한 소리를 심하게 들은 것처럼 나보다 6살이나 어린 이십 대 중반 수습직원에게 텃새를 당했다. 근무를 이어나갈 수 없었다. 이 업계는 처음인 데다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퇴사를 요청했고 사측으로부터 들은 답변은 심히 내게 난처한 것이었다. 퇴사를 하려면 인계기간이란 명목으로 퇴사 의사를 밝힌 날 기준 한 달을 더 일하라는 것. 들어온 지 이주도 안 된 초짜 직원인 나도 피해 갈 수 없는 회사 측의 단호한 규정에 나는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근로계약서에 정확히 명시된 규정이고 어길 시 민형사상 책임이 따른다는 엄중한 조건이 붙어 위압감에 차마 이를 어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사정을 이야기했으나 다시 돌아온 답은 개인 사정은 인정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 달이라는 긴 기간 동안, 나는 내  퇴사도 마음대로 못하게 됐다. 꼼짝없이 적응도 못할 일을 한 달이나 해야 한다는 현실이 부당하기까지 했다. 내가 인계할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나는 한 달을 일하는 걸 받아들여야만 했다. 내게 남은 건 업무에 적응하고 익숙해지는 것이 아닌, 하루 매시간 근무시간을 버티는 일이었다.


  오늘도 나는 정신없이 돌아가는 근무를 버텼다. 같이 일하는 직원들과의 마찰도 견뎌냈다. 여러 가지 일들을 얼마 못 가 관두며 해왔지만 이 피부과 같은 곳은 처음이다. 나는 일 못하는 직원 취급을 받으며 직원들의 따가운 지적과 텃세를 받으며 일하고 싶지 않다. 그건 자존심까지 상하는 일이었다.


ㅡㅡㅡㅡㅡㅡ

  복지관에서 만난 청년 셋과 취업을 위해 모임을 만들었다. 목적은 같은 경계선 지능 청년들이자 30대인 처지로 모여 여러 경계선 관련 기관이나 단체, 인물 등을  만나는 것. 우리의 목소리를 내고, 무엇보다 취업 지원 청탁을 하는 일이다.


  현재까지 우리는 밈센터, 동대문종합사회복지관 그리고 같은 복지관의 같은 카페에서 근무했던 당사자 청년의 어머니를 만났다. 밈센터와 동대문종합사회복지관으로부터 들은 답변은 비슷했다. 정부에서 지원을 해주는 게 없어서 현재로서 경계선 청년들의 직접적인 취업 지원은 없다는 것. 그저 이번 3월 25일 일경험 인턴십 과정 같은 단발성 사업이 한계라는 점이었다. 심지어 동대문 종합사회복지관의 복지사에게 들은 답변은 우리가 취업하는 건 우리 몫이라는 직설적인 말과 그나마 있는 경계선 청년들만의 일자리인 카페나 식당은 올해 모집 계획이 없으니 포기하라는 것이었다.


  또다시 우리는 한계에 부딪혔다. 지원이 현재로서는 없다는 답은 절망적이었다. 희망을 갖고 찾아다녀봤지만 허사였다. 세명의 경계선 청년 중 한 청년은 인지도 많이 떨어져 모임 활동에서 제 몫도 못할 수준이었고 온라인으로 우리 셋의 모임에 참여의사를 밝힌 일산에 사는 모 당사자 청년은 잠수 타고 모임 단톡방을 나가버리기까지 했다. 모임이 제대로 운영되기도 쉽지 않았다.


  우리 셋의 사정은 모두 비슷하게 불행한데 우리를 지원해 줄 어떠한 사회적 정책도 활동도 없는 점이 우리를 좌절하게 했다. 우리 셋은 모두 일반 취업으로는 도저히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취업을 못하게 되면 집안에 경제적 지원도 거의 못 받는 처지였다. 셋 중 두 청년은 집안에서 일하는 가족이 없다. 돌아가시거나 퇴직한 부모의 연금으로만 가족들이 생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내 가족 역시도 올해 일흔 인 자영업자 아버지의 외벌이에 가족 모두가 경제적으로 의존해 살아갔다. 국취제 수당이 아니면 용돈 지원을 거의 못 받았고 수당마저 여기 피부과의 한 달 퇴사 수리 기간 때문에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복지 사각지대를 여실히 느낀다. 차라리 장애인이면 정부의 혜택도 많지만 일반인도 장애인도 아닌 경계선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마련된 정부 복지는 없다. 일반인보다 현저하게 인지의 어려움을 겪는 청년들이라 일반인들 사회에서는 자립하기 쉽지 않은 데 정부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을 사회적으로 배려하지 않는다. 우리를 사회적 배려자로 인정하지 않는 정부의 무관심은 우리를 일반 사회에 뚝 떨어진 앨리스 같은 존재로 만든다. 일반인들의 속도로 이루어진 이 이상한 사회에서 우리 경계선 앨리스들은 집으로 돌아갈 길을 찾지 못한 채 헤매고 있다.


  그나마 우리를 도와준다는 국회의원분 한분과 자신의 경계선 아들과 경계선 청년인 우리를 위해 방법을 찾아나가자는 어머니도 있었어서 우리는 희망의 끊을 놓지 않을 수 있었다.


  우리를 위한 나라는 없다는 게 우리의 현재 생각이다. 경계선 지능 인구는 해마다 늘고 있는데 이들은 거의 방치되다시피 하고 있다. 사회적 자립을 이루지 못한 경계선 청년들에게 남은 건 나처럼 여러 직장을 전전하며 정착하지 못하고 헤매거나 결국 자립을 못 해 구직 의사를 완전히 포기한 채 은둔의 길로 빠지는 것이다. 나는 우리 사회에서 현재 화두가 되는 은둔형 외톨이 문제와 경계선 지능 문제가 전혀 상관관계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둘은 연결 돼있다.


  우리 세명의 경계선 청년들에게 돌아온 답답하고 다소 부정적인 답은 우리뿐만 아닌 모든 경계선 청년들의 현실이다. 우리는 언제쯤 자립하고 사회에서 제 몫을 할 수 있을까. 인생의 황금기가 다 지나가는데 우리는 언제 스스로 돈을 벌 수 있을까. 이 사회의 속도에서 밀려난 우리들은 우리들의 복지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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