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1년이 넘어간다. 한국사는 말 그대로 한국의 역사이다. 기원전 2333년 고조선 때부터 현대까지의 우리나라의 역사를 의미하는데 교과과정과 한국사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고조선 이전 선사시대까지 공부해야 한다.
그렇다 분량이 상당히 방대한 데다가 사건사건들의 연속과 상품 일련번호를 연상케 하는 연표, 수많은 왕들의 계보, 수많은 인물들... 근현대사로 넘어오면 그 사건들과 연표, 인물들이 더 촘촘해지고 더 상세해진다. 역사를 공부하며 태정태세문단세를 한 번쯤은 다들 외워봤을 것이며 근현대사의 거의 1~2년 주기로 발생하는 사건들과 연표, 또 우리를 난독과 게슈탈트 붕괴로 이끄는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들과 독립운동가들의 이름.. 신민회, 신간회, 대한인국민회, 대한국민회, 김두봉, 양세봉, 김원봉... 이름은 같지만 다른 단체인 한국 독립당 등등을 경험해 봤을 것이다.
한국사를 공부하며 우리는 수많은 '암기'의 장벽과 그와 동시에 망각의 산에 빠진다. 역사적으로 빛나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빗나간 의미가 되어 속절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 역사인 것이고 한국사인 것이다.
내가 학창 시절부터 유일하게 잘한 과목은 한국사와 역사였지만 역사가 암기과목임을 부인하진 않겠다. 유일하게 암기하는 의지는 강했던 내게 유일하게 빛나는 성적을 제공했던 과목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건 딱 '시험' 때 까지고. 내가 하려는 역사 분야. 그리고 앞으로 이 분야로 역사를 공부하려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이런 '접근법'으로 공부해서는 안된다.
역사를 설명하려는 분야. 직업. 역사를 해석해서, 이야기로, 쉽게, 또는 적절하게, 타인에게 지식을 제공해야 하는 쪽으로 가면 달라진다. 시험에서의 공부는 그저 개인을 위한 공부라 암기만 잘하고 소위 기출문제만 잘 풀면 된다. 개인을 위한 공부에는 청자가 없다. 소통이라는 중간 유통과정이 없이 바로 내 머리에 때려 넣기만 하면 되는 거라 다분히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편의적이다. 그러나 이 지식을 타인에게 제공하려는 경우는, 타인이라는 청자가 생기고 그들에게 효과적으로 소통하기 위한 과정. 즉 중간 유통과정이 생긴다. 나 혼자서 공부했을 때는 내 머리와 수준에 맞추면 됐는데 이젠 타인의 수준과 머리를 맞춰야 되며 '말'이라는 소통의 전달과정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타인에게 '지식'을 '말'로 잘 '설명'해서 잘 '이해'시켜야 한다. 신석기 혁명보다도 더 혁명적인 차이다.
나는 현재 역사 체험학습 회사에서 신입강사로 입사 교육을 받고 있다. 교육에서 늘 나를 짓누르는 것은, 지식이 아니다. 시연 강의 때 초등학생 아이들을 상정하고 '잘 말할 수 있는 지혜'이다.
물론 수업을 받으며 역사적 지식이 부족함도 느낀다. 하지만 지식은, 계속 주입하다 보면 는다. 머릿속으로 지식을 넣는 건 쉽지만 말로 표현하고 해설하는 건 정말 어렵다. 가령 내 머릿속에 조선시대 붕당과 사화에 대한 내용들은 어느 정도 주입되어 있다. 그러나 동서 분당이 나뉘고 이 분당이 역사적 사건과 논쟁, 환국을 만나며 분열하고 그 분열 과정에서의 역사적 관계를 누군가에게 이해가 가게 설명하는 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분당 이전 사화의 과정과 붕당을 이룬 훈구파와 사림파에 대해서도 설명이 들어가야 하는데 내 머리로 이해한 파편적 지식들로 설명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의 맥락을 잡아야 하고, 시험 문제를 풀 때 감으로 익히는 지식을 넘어 사건들을 적확하게, 유기적으로 알아야 한다. 게다가 아이들의 재미나 듣는 이들의 주위를 환기시키기 위해, 시험교재나 교과서에서는 못 봤을 일화들을 설명해야 할 때도 있는데, 그때는 세세한 일화들에 대한 깨알 지식도 필요하다.
뭐든 느리고 더디 배우는 내게 지식을 배우고, 그 지식을 전달하는 수준까지 가려면 남들보다는 배는 걸린다. 그럼에도 한국사는 내가 좋아하는 분야고 그나마 잘하는 분야라 빠른 편일 뿐이다.
한국사를 어려워하는 느린학습자에게 역사 공부의 왕도가 하나 있다. 느린학습자 뿐 아니라 한국사, 역사가 유달리 약한 사람들에게, 내가 전달하고 싶은 '접근법'과 공부법(시험만을 위한 공부법은 아니다)이 있는데 이건 나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다.
우선, 한국사를 절대 재미없는 개론서나 수험서 같은 걸로 배우지 말라이다. 수험서는 스토리가 없다. 이해시키려고 전달하는 글이 아닌, 그저 사실의 나열만 있을 뿐이다. 스토리가 없는 글은 '작가'가 없는 글이다. 글이 아닌 단어들과 연표의 연결일 뿐이기에 역사를 풀어쓰고자 노력하는 작가가 있는 역사책을 읽어야 한다. 역사는 시험이 아니라면, 아니 심지어 시험이어도 흐름과 스토리는 이해와 암기에 중요하기 때문에 이런 접근법은 중요하다.
1882년 임오군란. 흥선대원군의 재집권. 별기군 창설 구식군인들의 반란. 통리기무아문 폐지. 청군 진압. 제물포 조약 체결. 1884년 갑신정변. 급진개화파 우정총국축하연 거사. 김옥균, 14개조 개혁정강 청군 진압. 한성조약과 톈진조약 체결.
위의 글이 있다고 쳐보자. 그럼 느린학습자 당사자와 역사를 어려워하는 사람들한테는 연표부터 사건들까지, 그냥 외우게만 되고 머릿속에 이해는 되지 않을 것이다. 1882년. 1884년. 연표부터 조약들이 머릿속에 연결되지 않고 헷갈릴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설명이 들어가면 어떨까? 통리기무아문은 조선후기 개화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당시 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해 개화를 선택하고 추진했던 정부가,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발달한 나라였던 청나라의 문물과 제도를 본떠 만든 기관이다. 이 기관에서 역시 발달한 나라였던 일본의 제도를 모방하여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만들었다. 그러나, 별기군에만 지원을 다하느라, 별기군 이전 구식 군인들은 차별을 받았다. 그 차별은 급료로 받을 쌀이 13개월치나 밀릴 정도였다. 13개월 후 간신히 받은 쌀 급료에는 겨나 모래가 섞여있었고 참다못한 구식 군인들은 봉기했다. 자신들이 받은 차별의 근본 원인이 정부의 개화 정책과 그 개화정책을 시행하는 통리기무아문에 있다는 것으로 생각한 구식군인들은 개화와는 무관했던 흥선대원군을 찾아갔고 개화 정책 기관이었던 통리기무아문은 폐지되고 이어 별기군도 없애게 된다. 개화 정책이 다시 올 스탑 되면서 개화 정책의 선봉이었던 명성왕후와 민 씨 정권은 밀리게 되고 흥선대원군이 재집권 하게 된다. 민 씨 정권과 명성왕후는 반란에 놀라 청나라에 진압 요청을 하게 되고 청나라 군대에 의해 군란은 진압된다. 그런데 군란 과정에서 분노한 구식 군인들은 신식 별기군의 교관이었던 일본인을 살해하고 일본 공사관을 불태웠다. 일본 측은 봉기로 불탄 공사관 수리를 위한 배상금과, 자국민과 일본 공사관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 경비병을 공사관에 주둔시키게 하라는 강한 요구를 하게 되고, 그래서 제물포 조약이라는 것이 체결되게 된다.
조금 길지만 이렇게 스토리가 붙으면, 1882년. 제물포 조약. 통리기무아문. 같이 단어로서 다가올 때 보다 자연스러운 인과관계에 따른 흐름으로 머릿속에 이해가 되게 되는 것이다.
갑신정변도 마찬가지다.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2년 후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당시 개화파는 나라문을 아예 활짝 열고 성리학적 질서까지 무너뜨려서라도 개화를 급진적으로 추진하려 했던 급진 개화파와 성리학적 질서는 그대로 두고 문물만 개화하자는 온건 개화파로 대립했다. 당시 정부는 온건 개화로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고, 김옥균을 포함한 급진개화파는 그런 정부가 임오군란 당시 청을 끌어들여 내정 간섭이 심해진 것 등에 불만을 품게 된다. 그 결과, 급진개화파 무리는 일본에 지원을 약속받고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 자리에서 민 씨 일파 등 온건 개화파를 공격하는 거사를 단행했다. 정권을 잡은 급진개화파 인사들은 바로 불만이었던 청나라를 배격하는 조항, 사대 금지, 임오군란의 배후로 지목되어 청나라에 납치된 대원군 귀국 등과 또 그에 더한 사회 개혁 요구, 신분제 폐지, 재정낭비와 부패를 막기 위해 호조로 재정을 일원화 등을 담은 폐정 개혁안을 발표했으나 공격당한 민 씨 측이 청군을 또다시 끌어들여 청군에 의해 3일 만에 진압된다. 그 과정에서 창덕궁에서 갑신정변의 인사들을 호위하는 일본군과 진압하려는 청군 사이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었고 청군과 일본군은 양국의 전투를 피하기 위해 양국 군사가 조선에 파병을 하거나 철병할 때 서로 알린다는 톈진조약을 체결한다. 갑신정변 와중 일본 공사관이 불타고 일본 측 피해도 있었기에 정변 이후 공사관 신축 비용과 일본 측에 대한 배상금 지급을 요구하는 일본 측과 한성조약도 체결한다. 톈진 조약은 이후 일본이 청나라에 전쟁을 벌이게 되는 청일 전쟁으로 악용되었고 동학농민운동 당시 청군 출병과 함께 일본군이 우리나라로 들어와 경복궁을 점령하게 되는 나쁜 계기를 만들었다는 부연 설명까지 하면 이후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에 대한 배경도 설명이 되는 것이다.
이렇듯 역사를 단어의 나열로 외우지 말고 차라리 스토리로 설명된 줄글을 읽어야 한다. 역사는 암기가 아니라 이제는 문해력이다. 파편화된 정보가 아니라 맥락화된 스토리를 외우지 않고 읽고 이해하는 것.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한국사. 역사를 접근하는 가장 이상적이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것 같다.
느린학습자여도 충분히 역사적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만약 느린학습자 아동이라면 더더욱 스토리 위주의 책을 읽어야 한다.
한 번에 많은 것을 습득하지 못하는 느린학습자 특성상 사건 위주보다는 인물 위주로 선택하는 게 좋다. 인물은 행동에 개연성이 더 풍부하고 감정적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사건보다 더 이해하기 쉽고 생생하다. 그에 더해 이해를 돕는 그림이나 사진 자료가 풍부한 책이나 자료를 찾아 공부하면 된다. 만화 같은 시각 자료도 느린학습자나 느린학습자 아동에게 도움이 많이 된다. 하다 못해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춤형으로 설명하는 체험학습을 신청해 듣거나 유튜브 같은 영상을 보는 것도 물론 도움이 된다. 단 유튜브 영상은 통 한국사를 다 보는 게 아니라 이해가 필요한 시대나 부분만 찾아봐야 흥미가 떨어지지 않는다. 기존 지식을 쌓고 나서, 세세한 지식을 원할 때, 그때 네이버 지식백과 같은 백과사전을 참고하거나 그때 공무원 한국사 수험서를 찾아보면 된다.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지식을 혼자서만 공부하며 아는 것과 설명하는 것의 차이가 크다는 사실. 그와 더불어 느린학습자나 역사를 어려워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역사에 접근해야 하는지를 썼다. 설명할 수 있는 공부, 이해로 접근하는 역사. 다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역사는 암기가 아니라 이해라는 것.
남에게 이해시킬 수 있는 역사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에 대한 효과적인 이해를 위해 접근법을 달리 해야 한다는 부분까지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