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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날 May 26. 2022

자녀로부터 마음의 독립을 하세요

[며느리는 백년손님 PART 2] 시부모가 처음인 ‘시린이’를 위한 조언

많은 어머니가 아들을 놓아주는 게 쉽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까지 아들에게 ‘희생’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보상심리가 생긴 거죠. 나아가 아들뿐 아니라 며느리에게도 ‘희생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게 됩니다.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죠. ‘희생’은 다른 사람이나 어떤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 재산, 명예, 이익 따위를 바치거나 버림. 또는 그것을 빼앗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왠지 억울한 느낌이 듭니다. 게다가 이 단어는 마치 엄마가 아들의 훈육에 바쳐진 제물처럼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마음의 독립을 할 수 있을까요. 마음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면 단어를 바꿔볼까요.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라는 사이어-워프 가설을 근거로 말이죠. 우리는 지금까지 아들에게 희생이 아닌 ‘헌신’을 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헌신’은 내가 능동적으로 온 힘을 쏟아부은 것입니다. 그로 인해 아들은 멋진 남성으로 자라서 한 가정을 책임질 수 있는 남편이 될 수 있었죠. 어떤가요? 자랑스러운 마음이 생기지 않나요? 엄마로서 최고의 자부심입니다. 자기 자신을 대견하게 여겨도 됩니다. 여기에 무슨 억울함이나 보상심리가 있을까요. 이렇게 희생이 아닌 헌신으로 바꾸면 이미 키울 때 같이 울고 웃던 추억으로 충분합니다.


‘내 아들은 나의 것’이라는 소유 심리를 가지고 있는 시어머니도 있습니다. 아들을 자신의 배에서 열 달 동안 품고 얻은 이유로 그런 생각을 가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소유했다는 것은 사람을 소유한다는 것인데 노예나 노비, 하인을 소유한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내가 소유한 사람에 대해서는 내 마음대로 지시할 수 있고 사고파는 처분에 대한 권리가 있다는 것인데 아들이 그러한가요. 아들을 노예처럼 부릴 수 있고 사고팔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모는 없을 겁니다. 현대 사회에는 사람을 소유할 수 있는 노예제, 노비제도는 이미 폐지되었습니다. 지금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인신매매’가 됩니다. 한편으로 이해는 되나 아들을 소유한다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습니다. 이 개념을 가지고 있다면 아들은 내 것이고 고로 아들의 가정과 그 구성원인 며느리도 내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져 고부갈등은 갈수록 노답이 됩니다. 옛말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하지만 살다 보니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있더군요. 그리고 돈으로 갑질하는 손님이 바로 우리 시댁이더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모든 생각은 위와 같은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돈으로 사람을 소유한다는 생각. 이 역시 매우 오만하고 위험한 생각이므로 이런 생각은 아예 말아야 합니다.


결정적으로 며느리에게 아들을 돌려달라는 ‘소유물반환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이 청구권은 ‘소유물’에 한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아들은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만에 하나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더라도 최소한 아들이 결혼 전까지 단 1%도 남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희생이라든지 소유라든지 하는 생각은 이기적이고 편협한 생각이라서 빨리 전환하는 게 좋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생각은 자라지 못한 채 몸만 어른이 된 어린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요새는 주식을 처음 하는 초보자를 ‘주식+어린이’를 합쳐 ‘주린이’라고 부른다더군요. 그렇다면 이런 시부모를 우리는 ‘시린이’라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생물학적으로는 부모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전혀 부모라 할 수 없는 행태’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타인을 내 맘대로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건 매우 오만한 태도입니다. 앞으로 소유라는 단어와 개념은 저세상으로 던져 버리고 ‘희생’이라는 단어보다 ‘헌신’이라는 말을 더 자주 써보십시오. 어머니로서 자식에게 쏟았던 모든 피, 땀, 눈물이 고귀한 행위로 느껴지며 충분히 가치 있는 삶이었다고 느껴질 것입니다.


이런 마음 상태라면 시원섭섭한 마음이지만 쿨하게 ‘바이바이’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습니다. 후회나 미련도 남아있지 않으니까요. 혹시 최선을 다하지 못한 아쉬움이 든다고요? 그렇더라도 우리는 놓아줘야 합니다. 떠나보내야 합니다. 아들도 부모님으로부터 헌신의 사랑을 받은 것처럼 다가온 인연(며느리)과 다가올 인연(자녀)에 사랑으로 헌신할 기회를 누릴 수 있도록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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