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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날 Jun 16. 2022

정작 변해야 할 사람은 시부모입니다

PART 3. 제발, 선을 넘지 않는 시부모가 됩시다

유튜브나 인터넷에 들어가서 ‘고부갈등, 장서갈등’에 대해 검색해보면 엄청난 에피소드가 넘쳐납니다. 책은 어떤가요. 오죽하면 ‘며느리 사표 낸다, 며느리도 누군가의 딸이다’ 등등 며느리가 힘들다는 책이 연이어 나오고 소설과 드라마 소재로 단골처럼 등장합니다. 드라마를 보는 며느리는 열광하고 시어머니는 부글부글하고 아들은 중간에서 난처합니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분명 문제는 있는데 해결책은 없습니다. 모든 며느리가 사표를 낼 수도 없고 B급이라고 아예 대놓고 반항하며 승리를 쟁취할 수도 없습니다. 내용엔 공감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나도 저렇게 해보면 되겠다’ 이런 결론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이기 때문입니다. 본인의 성격상 어려운 경우도 있고, 직장으로 따지면 이 상사 저 상사 스타일이 다르고 회사 분위기에 따라 대처하는 방법이 다르니까요.


무슨 얘기냐면 어쩌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주체는 며느리가 아닐 수 있다는 겁니다. 결혼은 했는데 온통 못 살겠다고 아우성칩니다만 정작 변해야 할 당사자는 시부모입니다.


‘시어머니도 며느리다.’

‘며느리도 언젠가 시어머니가 된다.’


이 두 문장을 보고 있으면 오히려 서로를 더 잘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라는 말처럼 시어머니 며느리 적 생각 못 하더라는 겁니다. 지난날 사회 관습과 분위기는 개인의 일탈을 ‘두더지 잡기’처럼 때려잡았습니다. 비난에 맞서려면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죠. 그래서 어머니 세대는 순응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어머니의 어머니도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며느리와 사위인 여러분은 어떤가요? 다를 거라는 확신이 있으신가요? 당장에 저와 제 아내 또한 이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준비하지 않으면 말이죠. 다행히 저와 아내는 준비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의 시부모상을 위해서 말이죠. 사실 변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변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노력하지 않는 변화는 퇴화죠. 조금 더 나아지는 변화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마치 연어가 강을 거슬러 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처럼 말이죠.


이제 시부모가 되는 연령대가 50대 초중반부터 아닌가 싶습니다. 그때가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나요? A4 용지를 가로로 길게 놓고 가운데에 끝에서 끝까지 가로줄을 그어보세요. 처음과 끝이 멉니다. 자, 이제 A4 용지 가운데를 좌우 양 끝선이 닿도록 접어보세요. 50대라는 나이는 30~40대 시절이 마치 처음과 끝이 맞닿아 있는 것처럼 훌쩍 뛰어넘듯 지나간 느낌입니다. 물론 추억은 쌓여있습니다. 가운데 그은 줄이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있듯이 말이죠. 진실은 어느새 그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우왕좌왕 좌충우돌하다가 아들은 어느새 돌싱이 되어 당신 곁으로 돌아옵니다(물론 아닐 수도 있으니 미리 겁먹지 마세요).


다행히 지금 며느리 세대는 인터넷에 능숙합니다. 인터넷이든 며느리가 쓴 책이든 한번 찾아 보세요. 요새 며느리나 사위가 결혼 전에 어떤 걱정과 고민을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평소엔 다툼이 없다가도 유독 시댁 문제로 분쟁이 시작됩니다. 꿈같이 황홀한 결혼이 ‘듣보잡’ 악몽이 되니 이혼을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집니다. 이런 문제는 결혼을 앞둔 젊은 청년들이 비혼과 동거를 선택하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물론 비혼과 동거가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시민연대계약(PACS : Pacte civil de solidarité, 프랑스에서 시행 중인 두 이성 또는 동성 성인 간의 시민 결합 제도)과 같은 새로운 가족 형태가 제도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선택은 바람직한 선택인지 고민해 봐야 합니다.


몇몇 며느리가 시부모의 변화를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시부모가 바뀌어야 세상이 바뀐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현재 시부모가 바뀌길 바라는 건 권력층에게 권력을 포기하라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강렬한 저항과 탄압이 있을 뿐입니다. 오히려 지금의 며느리는 예비 시부모로서 어떻게 보면 변화의 주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변화의 주체가 현재의 시부모가 아닌 미래의 시부모인 바로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고부갈등의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부모의 변화를 외치는 며느리의 용기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시부모가 되겠다는 용기로 바뀌어야 할 때입니다. 시부모 때문에 고생한 당신이여, 자신과 미래의 세대를 위해 지금 필요한 건 굳은 다짐과 실천입니다.


고부갈등 종결선언


1. 자식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소중히 생각한다.


2. 자식의 행복을 내 기준으로 강요하지 않는다.


3. 자식의 결정을 존중한다.


4. 결혼한 자식의 가정을 속국이 아닌 하나의 독립국으로 인정한다. 내정간섭을 하지 않는다.


5. 소통은 아들과 직통으로 한다.


6. 자녀를 출가시킨 후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산다.


이 선언은 스스로 다짐하고 자녀가 출가한 이후엔 실제로도 그래야 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 고부갈등의 원인이 된 시부모 세대를 비난하거나 원망한다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행위일 뿐입니다. 자신은 불행하다고 느끼면서 타인에게 그것을 반복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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