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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혁 Apr 11. 2022

봉천 4동 -1-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 4동 

서울시 관악구 봉천4동.

내가 기억하는 첫번째 주소이다. 90년대 봉천동은 예로부터 못사는 동네로 유명했다. 친구들은 관악산 기슭에 세워진 집에서 살았으며 우리 동네에 평지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여기가 산동네라고 하면 왜 그 명칭이 붙여졌는지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왜 달동네라고 불리는 지는 알 수 없었다. 구로공단 때문인지 우리 동네는 달 자체를 별로 볼 수 없을 정도로 공기가 안 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때가 좋았다. 2층 집이었기 때문이다. 출근하는 아버지의 뒷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창틀에 기대어 바라보는 것이 좋았고 커튼을 젓히면 마루 바닥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에 먼지가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것이 좋았다. 그 다음으로 외워야했던 집 주소는 신림4동이었다. 남들은 아파트로 이사간다는데 우리는 지하실로 가는 것이 무언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어머니는 별다른 설명이 없었다. 그것은 내가 항상 가졌던 불만이었다.

'어른들 하시는 말씀 아이들은 몰라도 된다.', '커서 알려줄게.', '아이는 커피마시지 마라.'

 하지만 이번에는 참을 수가 없었다.


"학교가 멀어졌는데 모르고 있으라고요?"

 이사 갈 곳은 버스로 세 정거장 차이이긴 했지만 우리 학교는 도보로 통학하던 아이들이 거의 대부분이었기에 걸어서 만날 수 없는 거리에서 산다는 것은 교우관계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소년들은 개인의 성향보다는 옆집 산다거나 짝궁이 된다거나 부모끼리 친하다거나 그러한 물리적 거리가 친해지는데 훨씬 중요한 요인이었다. 유년기 또래집단 분석을 어머니한테 설명할 수 있을만큼 똑똑하지는 않았지만 설날이 없어지면 용돈이 없어진다는 것만큼 나쁜 미래를 예측할 수 있었다.

 "묘심스승이 이야기하는데 2~3년만 버티면 좋아질거란다. 2000년대 초에 길운이 있대."

 묘심은 어머니가 다니는 철학관의 법사였다. 어머니는 순흥 안씨들만 모여사는 보기 드문 집성촌의 종가집에서 자라 예절과 법도에 아주 엄격하신 분이었다. 하지만 주자니 팔자니 하는 나로서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동양 문화의 주술적 영역까지 함께 신뢰하게 되셨다는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나로서는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묘심의 말을 믿고 싶었다. 하지만 상황은 더욱 나빠져만 갔다. 출근을 더이상 하지 않는 아버지가 어머니랑 싸우다가 내 성적 문제로 불똥이 튀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불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두분이 정말로 내 성적 문제로 싸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바깥 일을 하는 사이 충분히 학업 관리를 하지 않았다느니 아니면 적어도 내가 예습복습을 잘하고 근면성실하게 하루를 살아가는 습관을 들이도록 교육을 어머니가 못시킨 것이 아버지가 생각하는 가장 큰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상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우리 집이 망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돈 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집에 빚이 7억이나 있는데 고작 자식 학업성적문제로 매일 죽도록 싸울리는 없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는 모든 문제를 다 맞추던 성적이 중학교 1학년 1학기 때에는 전교 8등 2학기 때에는 30등 내외로 떨어졌는데 심지어 80점짜리 과목도 있었다. 90점도 망했다고 할 판에 80점 대라니 그것도 수학이라는 중요과목에서! 그런 날은 집에 들어가기가 죽기보다 싫었다. 아버지는 피가 철철나도록 벽에다가 자신의 머리를 마구 찧었다. 어머니는 화내다가도 아버지가 자해하는 모습을 보면 울면서 사과했다. 내가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심각하다고 생각했던 상황은 얼마지나지 않아 내 생에 두세번째 심각한 상황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먼저 사라졌고 아버지가 사라짐과 동시에 나는 안양의 둘째 이모님 댁에 맡겨졌다.


 최근에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금천구, 관악구, 구로구 이 3개의 서울시내 저소득 자치구를 묶어서 '금관구'라고 따로 부르는 멸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나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자신의 지역이 어떤 지역인지 서울 시내 다른 지역 사람들이 어떻게 바라보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내 생에 처음으로 기억했던 주소지인 봉천 4동은 주민투표를 통해 청룡동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두번째로 외운 집 주소이자 가족이 함께 살았단 마지막 동네인 신림 4동은 신사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강남구 신사동에서는 2008년 관악구가 신사동이란 명칭을 쓰지 못하도록 법원에 가처분신청을 내었으나 기각되었다.

어릴적 살던 집(문이 열린 집)
화장실은 집 밖으로 나가면 대문 옆에 있었다
싱크대와 그 뒤로 비치는 안방
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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