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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혁 Apr 11. 2022

광주의 인쇄공장 -5-


6년 뒤 전라도 광주

    

"와 축하한다잉. 너가 최종 후보에 올라갔다고?"

준영 과장님은 아파트 관리비 고지서 프로그램을 만드는 프로그래머였다.

"자네가 한건 했구마잉."

성덕 차장님도 아파트 관리비 고지서 프로그램을 만드는 수석 프로그래머였다.

그리고 나는 아파트 관리비 고지서 디자이너 겸 배송기사였다. 말이 거창해 디자이너지 아파트 고지서에 디자인이라고 할게 뭐 있겠는가. 그래서 사실 남는 시간에 직장동료분들 몰래 영상 공모전을 준비하고 있었던 터였다. 그런데 일이 켜져서 이쯤되면 더 이상 사측에 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뭣이 우승 상금이 1억이라고야?"

과장님이 너무 크게 말하는 바람에 이사님의 눈길을 끌었다. 이사님에게는 특히 눈치가 보였다. 내 학력을 문제삼지 않고 내 생애 첫 정규직으로 채용해준 분이기 때문이다.     


"요상하게 퇴근 후에도 사무실을 들락 거리더니마잉."     

 광주는 참 좋았다. 서울과 다르게 사람들이 여유가 있었다. 횡단보도도 천천히 건너고 차도 느긋하게 사람을 기다릴 줄도 알고. 무엇보다 자연이 가까이 있었다. 광주에서도 외곽, 나주에 가까운 곳이어서 시간 날 때 마다 각종 동식물과 꽃사진을 찍으러 돌아다니곤 했다. 수령이 500년은 되어보이는 고풍스러운 나무가 있는 한옥집에서 매미소리를 들으면서 촬영을 하면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러면서 메뚜기와 방아깨비를 구분하는 법도 자연스럽게 배워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취미생활을 누릴 시간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주말에 웨딩 비디오 촬영 아르바이트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원래 소스 없이 작업을 해왔다. 인터넷에 누군가 올려놓은 사진과 영상들을 바탕으로 애프터이펙트와 같은 편집 프로그램에서 이리저리 짜집기 하고 효과를 넣어 최종적인 결과물을 만들었다. 그러다보면 아무래도 아쉬울 때가 있다. 정확히 내가 원하는 장면을 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웨딩 비디오 촬영 아르바이트는 일석이조였다. 시간 대비 수입이 괜찮은데다 촬영 기술까지 덤으로 익힐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만든 단편영화가 상금 1억이 걸린 대회에서 최종후보까지 올라간 것이었다.     


 이 소식을 아버지에게 전했다. 아버지와는 애증의 관계였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하면 검붉은 얼굴을 한 채로 소주잔을 기울이는 모습 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빚쟁이들에게 쫒겨서 현관문을 그렇게 이중삼중으로 걸어잠궜어야 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때 나는 자전거를 사달라고 조르고 졸랐다. 그러던 어느날 소주 사러 다녀온 줄 알았던 아버지가 소주병을 웬 자전거 손잡이에 걸고 돌아왔고 그 날 나는 큰 기쁨에 젖었다. 하지만 그 또래 아이들이 의레 그렇듯 나의 새 자전거에 대한 관심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두 달정도 지나자 오래된 주공아파트 복도에서 흔히 보는 모양새 그대로 우리 집 앞에도 먼지 쌓인 자전거 하나가 적치되었다. 그리고 그 날 이후부터 아버지는 취기가 오를 때 마다 나를 부모 등골을 빼먹는 흥청망청 탕진하는 놈이라고 불렀다. 초등학생에게 가혹했지만 당시 사정을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양육비에 대한 부담감이 매우 컸음은 분명하다. 중학교 1학년 때에는 공부도 못하는 내가 똑같은 수준의 친구나 만나러 다닌다고 두 달 동안이나 집에 가두기도 했다. 그래도 그건 그 나름대로 유익한 시간이 되었다. 공부를 더 하지는 않았지만 집에 있던 세계문학전집을 그때 다 읽었다. 아버지에게도 나쁜 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탕수육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집이 망하기 전 한번도 직접 요리를 한적이 없던 아버지는 돈이 없어 못사준다는 말 대신 요리를 배워 탕수육을 만들어주었다. 처음 요리해 본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맛있었다.     


 "너네 아버지가 말은 그렇게 해도 속은 정말 여리고 따뜻한 사람이야."

어머니는 내게 항상 이렇게 아버지를 변호해주었다.

 "저는 따뜻한 말하는 나쁜 사람이 더 좋아요."     


 


아버지는 티비를 보다가 갑자기 욕을 하기도 하고.

 "저 새끼 부산고 다닐 때 등신이었는데."


병원에가서 불친절한 의사들을 만나면 욕을 했다.

 "의대 나때는 공부못하는 놈들이나 가는거였는데."     


 내가 대회의 최종후보에 올랐을 때 그러니까 내가 광주에서 지내고 있을 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접니다."

"그래."

"저 이번에 큰 대회에 나갔는데 최종 후보 명단에 올라갔습니다."

"그래 공부는 하고 있느냐."

"아직입니다."

"그렇게 살거면 폴리텍가서 기술이라도 배워라."

"저 이제 28살입니다."


"저는 영화감독이 될겁니다."

"그게 딴따라지 다를게 뭐냐."

"변함없으시군요. 아버지. 이번 작품은 제 삶에 대한 이야기에요. 술 드실 때면 아버지가 언제 화낼지 몰라 숨죽이면서 이불 뒤집어 썼던 제가 인생을 걸고 만든 영상이라고요.  대학가는게 그렇게 중요해요? 그럼 또 의지박약이다. 환경 탓하지 말라고 하시겠죠. 성실하게 노력하면 어떠한 환경이든 극복할 수 있다고요. 지금 제가 그 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을 보여드리겠다는 거에요. 아버지가 원하시는 방법은 아닐지 몰라도요.."     


 그로부터 5일 뒤 아버지로부터 한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요원한 꿈을 가지고 있지만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평범한 회사원의 일상을 주제로 만들어진 단편 [어느 회사원의 꿈]은 조니워커로 잘알려진 영국의 주류회사에서 주최하는 킵워킹펀드에서 우승하고 1억원의 상금을 얻었다. 이 상금을 바탕으로 3년에 걸쳐 제작된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링]은 EBS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 [링]은 영화제에서 배급사 관계자의 눈에 띄어 배급 계약을 맺고 2013년 전국개봉을 하였으며, 정부의 다양성영화 대국민 보급 정책에 힘입어 2015년 8월에는 KBS 1TV에서 방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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