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일이의 작고 여린 몸에 생긴 상처
봉사의 시작
광일이의 작고 여린 몸에 생긴 상처
“이진혁 감독님 맞으신가요?”
검정고시를 치루고 대입을 준비하던 찰나에 하트하트재단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소외계층을 위한 영상을 만들고 싶다는 나의 인터뷰를 보셨다고 했다. 그런 마음이 전혀 없이 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적당한 발언이기도 했기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유명인사가 된 기분이 들어 매우 기쁘기도 했다. 미안한 마음은 거의 들지 않았으나 행여 속내가 들킬까 조바심이 났다. 이영고 선생님은 다행히 내 마음을 눈치채지는 못한 것 같았다.
“심하게 다친 영아가 있는데 혹시 촬영을 도와주실 수 있는지요?”
“아 비용이라면 저희가 약소하지만 실비 선에서 지급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리 꺼내놓은 말이 있어 진행하려고는 했었지만 무료라니 더 이상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내게 있어 이일은 일종의 특권처럼 느껴졌다. 그 시간을 번다 한들 지금 마음가짐으로는 내가 더 가치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하나병원은 부산역에서 좀 떨어진 장림동이라는 인적이 드문 지역에 있었다. 병원 앞에는 공장지대를 가로지르는 커다란 도로가 있었지만 다니는 차들에 비해 도로가 지나치게 넓었다. 정류장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 횡단보도에 나 혼자 서게 되었을 때 디스토피아에 온 것 같은 을씨년스러움이 엄습했다. 10대 시절 평일 오전에 삼성역 코엑스 몰의 한산한 지하 쇼핑센터에서 느꼈던 그 공허함. 번화한 인파 속에서는 내 존재를 희석시킬 순 있어도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나면 외로움을 부인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 이후로는 오랫동안 시설을 혼자 점유하는 쾌락을 누린다고 마음먹기로 했었는데 이런 감정은 참 오랜만이었다. 오늘 방문한 목적이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참 바보 같았다. 그런 건 신경 안 쓰는 사람인줄 알았는데, 어쨌든 건물은 찾기 쉬웠다. 콘크리트 회색 풍경 사이에서 홀로 색을 입은 병원의 녹색 십자가 표식은 금방 눈에 들어왔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아무런 대비를 하지 못한 채.
“먼 길 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김영희 복지사 선생님은 매우 친절했다. 병원에는 의료진뿐만 아니라 환자와 환자 가족의 정서적인 측면과 의료진과의 소통을 담당하는 의료사회복지 전문가들이 있다. 중증의 환자 가족들은 치료비와 더불어 간병을 하는 가족들의 출근 문제로 상당한 경제적 부담을 지게 될 수 밖에 없다. 광일이는 세상에서 가장 축복받아야 할 돌 잔치를 병상에서 맞았다. 어머니가 설거지를 하는 사이에 싱크대 밑에서 끓여놓은 냄비 아래에 깔려있던 앞치마를 광일이가 잡아당겨 큰 화상을 입은 것이다. 엎친데 덮친 겪으로 광일이의 아버지는 현대자동차의 하청업체에서 일하다가 그만 해고를 당하고 말았다. 이런 일은 너무나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규모 있는 병원들은 그 문제를 따로 전담할 담당부서를 꾸리고 있다. 광일이의 사례를 내가 맡게 된 것은 하나병원의 김영희 선생님이 전국을 수소문 한 끝에 하트하트재단의 어린이의료지원사업 공고를 찾아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의료기관 담당자가 모두 이런 식으로 사례를 관리하는 것은 아니다. 매일 새로 발생하는 환자들의 사연은 하나같이 기구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일일이 감정을 이입하다 보면 얼마 못가 스스로 무너지고 만다. 감정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교사들과, 공무원 그리고 1분 만에 진료를 끝내는 의사들처럼 자신과 가족을 지키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서둘러 깨닫지 않으면 안 되는 환경에 놓인 것이다.
김영희 선생님은 바람도 쐴 겸 소일거리로 나온 내게 연신 굽신거리면서 잘 좀 부탁드린다는 말씀을 반복해 나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환자들에게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상황을 담은 보고서를 읽고 왔지만 현장에서 맞닥뜨리게 될 차이에 대해서 단단하게 준비를 했다. 하트하트 재단의 계획은 후원영상을 찍어 사람들에게 사연을 호소력있게 전달할 수 있는 온라인 모금 컨텐츠를 제작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참고할만한 사례가 많지 않은 새로운 시도였다. KBS 동행이나 SBS 희망TV 등과 비슷한 내용이지만 온라인에서 잠깐 집중해서 볼 수 있도록 3분 내외의 짧은 영상으로 만들어야 했다. 후원영상 촬영은 처음이었기에 바짝 긴장했다.
“광일이 어머님, 아버님이 어제 약간 다투셔서 예민하실 수 있으니 잘 좀 부탁드릴께요.”
나의 경직된 태도로부터 어떤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김영희 선생님은 또 다시 부탁드린다는 말을 하면서 이번에는 실수하지 말라는 걱정이 포함된 말투로 건넸다. 내가 눈치 없이 광일이 아버지, 어머니께 예민한 질문들을 쏟아내서 문제가 불거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김영희 선생님의 말로는 아버지가 광일이 사고에 대한 책임을 어머니에게 묻는 바람에 어제 밤에 큰 소동이 있었다고 했다. 약간의 수사적인 실수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흔하지만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는 것이었다. 애초에 가벼운 마음으로 왔지만 감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지키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실감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동물적 본능같은 것이었다.
“선생님 제가 말을 잘 못하는데 잘 좀 찍어주이소.”
광일이 어머니는 선량한 분이었다. 어느 부모가 자식을 해코지하려고 하겠는가. 하지만 사고는 명백한 부주의로부터 비롯되었다.
완벽을 바라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나도 끔찍한 일들을 당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가끔 좋은 공기를 마실 때에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며 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막상 사고가 일어나고 나면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자식에게 큰 불행이 닥쳤을 때는 누군가를 탓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게 된다. 광일이의 아버지는 분노와 슬픔, 자책 세 가지 감정 사이를 쉴새없이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타겟이 어머니가 된 것이다.
병실로 들어가니 광일이는 온 몸에 붕대를 감은 채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여느 아이와 다를 것 없이 생긋생긋 잘 웃고 있었다. 생각보다는 상태가 괜찮아 보였다. 어머니는 전업 주부셨는데 인상이 참 좋아보였다. 아버지는 남자답고 책임감있어 보였다. 나는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촘촘히 주변 환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어떤 말을 해야 될지 몰라 나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두 분도 서로 말이 없었다.
곧 광일이가 드레싱을 받으러 이동했다. 드레싱은 감염의 방지를 위해 온몸의 붕대를 풀고 소독을하는 과정이다. 광일이는 전신에 심재성 2도 화상을 입어 패혈증이 일어나면 언제라도 생명이 위독해질 수 있는 상태였다.약품이 살갖에 달 때마다 아기는 자지러졌다. 차마 눈뜨고는 못 볼 지경이었다.
"광일아 괜찮다 괜찮아. 다 됐다 다 됐어. 아가 이제 다 끝났다. 이제 다 끝났어"
통증으로부터 아기의 주의를 조금이라도 분산시키려는 어른들의 외침이 드레싱이 진행될 수록 아기 울음소리를 따라 점점 커지더니 나중에는 아이의 울음인지 어른들의 울음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의사 선생님은 굳은 표정으로 아기 광일이의 뇌가 치료 과정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성장해야할 나이에 오히려 수축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상태로는 광일이의 수술은 진행할 수 없으며 소아정신과 진료부터 받아야한다고 했다.
드레싱을 마친 직후 병실로 돌아와 어머니께 다가가 인터뷰를 부탁드렸다. 광일이 어머니는 짐짓 밝은 목소리로 뭘 하면 되냐고 나에게 물어왔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어머니는 눈물을 참기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카메라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마력이 있다. 빨간불이 들어온 카메라 앞에 마주섰을 때 세상에 의해 자신이 했던 행동을 평가받게 된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되는 것이다. 광일이 어머니에게 자신의 평가 대상은 바로 부주의였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광일이가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 그것이 유일했다.
"미안해 광일아 엄마가 미안해. 엄마가 잘못했어."
엄마는 자책감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정면으로 쳐다보지는 못했지만 오늘 내내 한마지도 하지 않던 아버지도 옆에서 소매로 눈가를 훔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대신 촬영할께요."
이윽고 말을 잇지 못하는 어머니를 물리고 아버지가 인터뷰에 임했다. 아버지는 모 자동차 회사의 하청업체에서 파견직 근로자로 일하고 있었는데 경기가 어려워지는 통에 정리해고를 당하신 상태라고 했다. 비록 체구는 크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한마디 한마디에는 가장으로서의 의지와 책임감이 돌아와 있었다. 아버지의 촬영이 끝나갈 무렵 광일이를 안고 어머니가 다가왔다 그리고 셋은 함께 손을 맞잡았다.
내 스스로에게 이번 일이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는지 알 수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28년간 내가 지탱해 온 형식이 무너졌거나 최소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촬영을 마치고 나니, 만나기로 했던 친구가 병원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같은 부산이라고 해도 꽤 먼거리였는데 여기까지 나와 준 친구를 보니까 너무 반갑고 고마웠다. 친구는 정말 좋은 일을 했다며 이번 일의 가치를 높게 평가해주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가 더 길게 이어지는 것을 원치는 않는 듯 했다. 우리는 같이 밥을 먹고 또 간단하게 오랜만의 해후를 즐겼다. 우리의 화제는 주로 10대 때 우리가 저질렀던 엉뚱한 추억담이나 그 친구가 결혼하기 전에 만나던 마지막 여자친구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들이었다.
“야 여기 사람들은 운전을 진짜 더럽게 해. 이번에 소나타 NF 산거 알지? 휠을 이번에 독일제로 바꿨는데 그거 한 짝에 400이다. 팍 박아뻐리고 그냥 가네. 기스만 나도 그거 얼만 줄 알고 박은기가. 원래 더 좋은 거 뽑으려 그랬는데 나이 어리다고 해서 어른들 눈치본다꼬 튜닝으로 해놓으니까 더 골치 아프네. 그래도 블랙박스를 사방으로 달아놓으니까 잡기는 잡았다는거 아이가. 안 다행이노. 야 진혁아 니 머하노? 여기까지 왔는데 깨작거리지 말고 양껏 묵어라.”
내가 오늘 맞닥뜨리게 된 가치관의 혼란에 대한 이야기는 분명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쓸 소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더 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다 지쳐있었다. 연봉, 승진, 결혼, 시험, 유학 세상에서 정의하는 행복에 이르는 길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거기에 맞춰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내가 지금하고 있는 고민들은 고등학교 혹은 대학교 졸업과 함께 같이 퇴장했어야할 그런 것들이었다. 승진을 하고 시험공부를 하는 데에는 생각의 가지를 치고 내려가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그것은 중학교 시절 내 성적표를 손에 쥐고 아버지가 말해주던 것이었다. 공부는 뇌가 맑은 어릴 때 빠르게 하고 끝내야 하는 것이고 아르바이트나 군대, 사회 경험을 쌓고 나면 잡생각이 많아져 결국 실패하고 만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그런데 나는 은연중에 그런 생각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미래가 정해져 있어요? 어째서 내 미래에 대해 생각을 하면 안되는데? 그에 대한 명징한 대답은 현실이었다. 내가 입 밖으로 꺼내어 반박하지 못하는 원인은 아버지에 대한 경외심이나 두려움이 아니라 나도 이미 알고 있었던 현실에 대한 이해가 아버지 또는 여느 사람들이랑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충분한 이해를 거친 내 공포가 부적응의 신호인 작은 흔들림의 누설조차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그런 흔들림은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겪고 있었다. 흔들리기 시작한 추는 잡을 수 있지만 일단 진폭이 커지고 나면 누구도 걷잡 수 없음을 알기에 다들 나처럼 필사적으로 저항해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뭔 생각을 그리 많이 하노. 서울 사람이라 그런가. 어떻게 그렇게 사노? 잊아뿌고 마시는게 답 아이가? 니 생각 많은건 알겠는데 그게 참말로 똑똑한기가? 참 신기하단 말야. 그래서 내가 닐 좋아한대이.”
“그래 네 말이 맞다. 먹고 마시자. 자꾸 쓸데없는 이야기만 늘어놔서 미안해.”
광일이 사연은 총 1800만원 정도의 온라인 모금이 이루어졌다. 이 후 장영출 할아버지의 사례로 5년만에 다시 하나병원을 방문하게 되었다. 하지만 내 희망과 달리 나를 마중나온 사람은 낯선 이의 얼굴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김영희 선생님을 거취를 물어보았으나 이미 오래전에 그만두어 그녀를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김영희 선생님이 개척해 놓은 길은 여전히 잘 작동하고 있는 듯 했다. 성공적인 저소득환자들의 의료비 조달 경험들은 하나병원이 환자들에게 가장 많은 기회가 돌아가는 곳으로 성장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서로 다른 두 곳의 복지기관에서 요청을 받고 온 곳이 전국의 수많은 병원 중 부산의 하나병원이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라고 볼 수 없었다. 나는 김영희 선생님이 이뤄놓은 이러한 놀라운 변화들을 확인하고 그만둔 이유가 문득 궁금해졌다. 그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지난 날 선생님의 크고 넘치던 열정이 그녀의 작은 사회 내에서 충분히 공감 받지 못해 혼자 스스로를 보듬다 지쳐 결국 모두 소진되어 버리고 말았거나 아니면 이미 김영희 선생님의 의지가 자리 잡은 이곳을 떠나 또 다른 환자를 돕기 위해 분명히 워드프로세서만 간신히 돌아가는 오래된 컴퓨터를 배정받았을 어느 한 지방병원에서 새 의료비 지원서의 양식을 만드느라 끙끙대고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