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서의 일상을 논할 때 "산책"을 빼고 이야기 할 수 없다. 러시아인들의 산책은 많은 것을 포함한다. 문자 그대로의 산책뿐만 아니라, 남녀 사이의 데이트, 가끔은 집에서 편히 쉬는 것, 심지어 수업을 빼먹고 놀러가는 땡땡이도 "산책"이라는 단어에 포함이 된다. 그러니 러시아에서 가볍게 "산책갈래?"라는 말을 들었다면 문맥과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여 이해를 해야 할 것이다. 보통은 문자 그대로의 산책을 의미하지만 러시아인과 산책을 나가기로 했다면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산책을 정말 오래 한다는 것. 필자는 나름의 건장한 성인 남성으로 군생활도 조금 했고, 남들보다 뒤떨어지는 체력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웬만한 러시아인의 "산책력"에는 당해낼 수 없다. 별거 아닌 산책에도 내가 뒤쳐지는 걸 보니 각 운동에 맞는 필요한 근육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긴 했다. 필자의 에피소드를 들려주는 것이 이해를 도울 수 있지 않을까.
모스크바에는 한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이 있다. 그중 하나가 원불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원광학교인데, 전에는 무료로 한국어와 한국문화 등을 가르쳐주었지만 필자가 러시아에 도착했을 당시엔 부담되지 않는 수준의 소정의 수업료가 존재했었다. 일전에 소개한 적이 있는 vk(러시아판 페이스북)라는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 원광학교 관련 그룹이 있는데 여기에 러시아 친구를 사귀고 싶다고 글을 올리면 종종 연락이 오곤 했다. 필자에게도 연락이 온 친구가 있었는데 초면부터 산책을 하면서 이야기 하자길래 잠깐이면 되겠지 하는 생각에 약속을 잡고 가벼운 마음으로 승리공원이라는 곳으로 향했다. 승리공원을 지도로 한 번이라도 확인하고 갔다면 적어도 마음에 준비라도 했을 텐데, 일면식도 없는 러시아 친구만 믿고는 공원으로 나가봤다.
전승기념공원이라고도 불리는 승리공원(영어로는 Victory Park)은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모스크바에 만들어진 (대략) 폭은 약 700m에 길이는 1.4km 정도의 공원이다. 공원 바로 옆 지하철 역에서 처음 보는 친구를 만나 어색하게 인사를 하곤 "산책"을 시작했다. 내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묻자 친구는 아무 방향이나 가고 싶은 곳으로 가면 된다고 하더라. 뭔가 싸한 느낌이 지나갔지만 일단 가보기로 했다. 다행히 러시아 친구는 이미 한국어를 배운 지가 조금 되어서 능숙하게 잘하여 내가 떠듬떠듬 러시아어를 할 때 많이 도와주었다. 이곳저곳 기웃기웃하며 한 시간가량 걸었을까 공원의 중심부에 있는 전승박물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필자는 이미 그만 집에 가고 싶은 상태였지만 친구에게 이제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점잖게 물어봤다. 들려온 대답은 처음 만나서 물어봤을 때 들었던 대답과 다를 게 없었다.
"아무 방향이나 가고 싶은 곳으로 가면 돼"
필자는 무언가 대단히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재빨리 이제 슬슬 집에 들어가 봐야 하지 않을까 하고 정중히 말하고는 귀가를 할 수 있었다. 그 친구에게 나쁜 마음은 없었지만 또 한 번 산책을 가는 게 어떠냐는 친구의 말에 몸이 안 좋다는 말을 했더니 금세 연락이 뜸해지더라.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그 한 번의 충격이 상당히 커서 그런지 이후에도 러시아인이 산책을 하자고 하면 거절할 수 있는 경우 본인은 산책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는 러시아인으로선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말로 정중히 사양을 하였고 나가야 할 것 같은 약속에는 장소를 모스크바 중심부 쪽으로 잡았다. 후자는 필자의 잔꾀에 해당하는데 모스크바는 서울의 종로와 비슷하게 도보로 10분 정도 거리마다 지하철역이 있기에 체력이 간당간당 할 때 탈출에 굉장히 용이했고 지하철역 근처에는 공원과 달리 볼 것들도 많고 커피샵, 디저트 가게 등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아서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러시아인들이 왜 이렇게 산책에 환장하는지 이야기를 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러시아는 날씨가 대체로 안 좋다. 어느 정도 잘 알려진 영국의 날씨도 거의 매일 흐리고 가랑비가 왔다 안왔다를 반복한다는데 모스크바도 이와 다를 게 없다. 그래서 그런지 해가 잘 비치는 날에는 정말 많은 사람이 여러 공원에 나와있다. 모스크바 대부분의 공원은 여러모로 잘 정비되어 있고 할 거리도 많고 모스크바강을 끼고 있어 한가로움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기에 불곰국 국민들을 불러내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어쩌면 이들의 생활 수준이 아직 금전적으로 부담이 될 수 있는 여가를 즐기기에 조금 부족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모스크바에 사는 사람들의 월급 수준은 대체로 낮은 편이라 상대적으로 비싼 임대료를 견뎌대기가 힘들다. 따라서 소련시절에 모스크바에 살고 있지 않아 아파트를 받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모스크바에 집을 사는 건 매우 힘들고 따라서 교외지역에 살며 통근열차를 타고 다니는데 이들에게 시간적으로나 금전적으로나 돈 내고 하는 취미 생활보단 근처의 잘 조성된 공원에서 산책을 하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산책이라는 이야기를 하며, 편견이라기 보단 다른 이들에 대한 이해를 먼저 한다면 '여우와 두루미' 이야기 속 여우와 두루미처럼 상호 의도치 않은 불친절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 다시금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