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르트르 <구토>
“아침이 되어 일어났다. 따뜻한 물을 한 잔 하고 머리를 감았다.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아내와 아이들에게 인사를 하고 출근을 했다. 회사에서 와서는 어제와 같은 일을 했다. 하는 업무의 내용이 매일 매일 조금씩 다르지만 큰 틀에서는 늘 같은 일을 하고 있다. 점심시간이 되어서 구내 식당에서 밥을 먹고 커피를 한 잔 한다. 이런저런 회의에 참석하고 일을 더 하다보니 퇴근 시간이 되었다. 소지품을 챙겨서 나왔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아이들과 좀 놀다가 시간이 되어 잠자리에 들었다. 다시 아침이 되었다.”
참 이상하다. 이렇게 무미건조하게 정리를 하면 인생은 참으로 단조롭고 심심하다. 매일 일을 하기는 하지만 딱히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살다가 퇴직을 하고 자녀를 출가 시키고 그렇게 살다보면 죽겠지. 어떤 이는 삶을 하나의 도전으로 받아드리고 매일 매일 투쟁하며 살아가는데 그렇게 써내려간 소설이 어떤 마침표를 찍게될지 모르겠다. 우스겟 소리로 누군가는 태어난 김에 산다고 했고, 또 누군가는 삶에 의미란 없단다. 그냥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이 의미란다. 이렇게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삶을 힘들어 하면서까지 우리는 도대체 왜 유지하려할까? 한 가지 명백한 것은 죽는 것은 두렵다. 그러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는데 어떻게 해야하지? 이렇게 가벼운 사유만으로도 우리의 상황은 처참하다. 이쯤 되면 우리가 처한 현실 인식부터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 이런 현실을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한 소설이 샤르트르의 <구토>이다.
이 소설은 일기라는 소제목을 가지고 처음부터 끝까지 일기의 형식을 띄고 있다. 일기의 특성상 의식의 흐름에 따라 주인공의 생각이 나열 되어 있다. 그래서 읽기에 상당히 지루하다. 프랑스 부빌이라는 도시에 사는 앙투안 로캉탱은 18세기의 인물인 롤르봉 후작의 전기를 쓰기 위해서 이 도시에 머물러 있었다. 어느날 물수제비를 뜨려고 돌멩이를 들었는데 갑자기 혐오감을 느끼게 된다. 그 후로는 평소에 익숙했던 모든 것들이 낯설게 느껴진다. 평소에 만나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구토를 느끼고, 심지어 단골카페의 여주인과 정사를 하다가도 욕지기를 느끼거나 구토를 느낀다. 그의 구토의 원인을 작가는 일상에 대한 혐오감이라고 정의한다. 그렇다면 일은 왜 이렇게 혐오 스러운 것일까?
왜 여기에 있는지, 왜 먹는지, 왜 사는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들은 사실상 자기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거지요. 단지 일상에 빠져, 하루하루를 그저 남들이 사는 대로 따라서 살고, 남들이 말하는 대로 따라 말하면서 무의미하게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없어도 그만인 남아도는 존재, 곧 ‘여분의 존재’라는 거지요.
- 김용규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인생이 생각의 주체로서 삶을 살아내기 보다 타인의 생각에 따라 살아가는 현실이 혐오 스럽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살고 있다. 그런데 내가 나로서 살고 있는지는 확인해볼 일이다. 그저 살아지기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타인들이 추구하는 삶에서 분리 되면 그 특유의 비교의식으로 인해서 소외감을 느끼기에 가능한한 비슷한 생각을 하며 비슷한 것을 추구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왜 내가 사는 삶인데 단독자로서 살지 못하는가? 이런 생각을 작가는 ‘실존 의식’이라고 정의한다. 타성에 젖은 삶이 아니라 주체의식을 지늰 자로서 살아가야한다고 사르트르는 역설한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실존 의식을 회복한 후에 있다. 실존 의식으로 자유로워진 우리의 의식은 다시 방황하기 십상이다. 작가의 말처럼 ‘저주받은 자유’에 가깝다. 그래서 자유로운 우리의 의식은 다시 자기 구속을 필요로 한다. 키르케고르는 이 구속을 신을 통해서, 샤르트르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 운동을 통해서 해결하고자 했다.
그런데 어디에다가 스스로를 잡아매냐고요? 사실인즉 어디에다 잡아매도 그만이지만, 키르케고르는 신에게다 잡아매라고 했고, 사르트르는 역사적 현실이 요구하는 사회 문제에 잡아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실천해 보였지요. 그는 마르크스주의에 동감하여 1952~ 1956년에는 프랑스 공산당원으로 일했지만, 스탈린 공산당이 보인 폭력에는 적극 반대했고, 미국에 대항하여 쿠바와 월맹을 지지했으며, 1956년에는 헝가리에서 자행된 소련의 조치에 맞서 항변했고, 1958년에는 바르샤바 조약 가입국들이 ‘프라하의 봄’에 개입한 행위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앙가주망을 보통 ‘사회 참여’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것도 이 때문이지요.
- 김용규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결론적으로 우리가 일상을 이렇게 무미 건조하게 살아가는 것은 진정으로 우리를 구속해줄 무엇인가를 찾지 못한 방황에 가까운 것이다. 그렇다면 이 방황이라는 일상 속에서 주체적 자아로 나아가는 길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이 책에서는 그 방안에 대해서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구토>읽으며서 인상적인 해결책을 발견했다.
우리가 주체적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타인의 생각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며 아무런 비판 없이 수용하고 내 삶에 적용을 하는 것에 원인이 있다. 우리는 삶의 한 가운데 있을 때는 그저 직선적인 시간의 흐름에 나를 맡기고 살아간다. 이것은 비주체적인 삶이 되기 쉽다. 아무런 결말이 존재하지 않는 계속 되는 흐름인 것이다. 하지만 삶의 어느 한 토막을 잘라서 이야기로 구성하는 순간 그것은 모험이 된다. 모험이 된다는 것을 결말이 존재하고 결말의 앞에서 언급된 모든 경험들은 이 마지막 한 문장을 위하여 정리되고 각색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삶에서 주인공이 된다.
… ‘나는 산책하고 있었다. 나는 모르는 사이에 마을을 벗어났으며, 골치 아픈 돈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 문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이 남자는 모험 같은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무슨 일들이 일어나도 아무 관심도 없는 그런 상태에서 우울한 기분에 잠겨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여기에 결말이 존재하고, 이것은 모든 것을 바꿔놓는다. 우리에게 이 남자는 벌써 이야기의 주인공인 것이다. 그의 우울함, 돈에 대한 그의 고민은 우리의 그것들보다 훨씬 귀중하며, 미래의 열정의 빛으로 아름답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이야기는 역방향으로 이어진다. 순간들은 우연하게 차곡차곡 쌓이기를 멈추고, 그것들을 끌어당기는 이야기의 결말에게 붙잡히며, 또 그것들 각각은 앞선 순간을 끌어당긴다.
- 샤르트르 <구토>
이게 무슨 말인가? 간단하게 말하자면 아주 솔직하게 말하자면 일기를 쓰라는 말이다. 매일 매일 있었던 일에 대해서 기술하고 거기에 자신의 생각을 담아서 의미를 부여하라는 말이다. 이것이 지독히도 무의미한 우리의 삶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동의하는가? 선택은 자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