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빈둥 Jun 02. 2022

권태

사뮈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살다 보면 누구나 이런 순간이 있을 것 같다. “이게 다 뭐지? 나는 여기서 뭐 하고 있지?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이며, 나는 누구이지?” 그러다가 원인 모를 회의감이 나를 덮치고 그동안 노력해서 얻고자 한 것들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지퍼보게 되는 그런 순간 말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그렇게 중요한가를 생각해 보면 딱히 그런 것 같지 않다. 물론 부양할 가정이 있으면 그것 나름대로의 의미를 찾겠지만 어떤 관계를 탈피해서 누구나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는 견지에서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그리고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이 그렇게 의미 있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것 같다. 이렇게 삶에서 나를 치장하고 있던 껍데기를 한 꺼풀 한 꺼풀 벗겨가다 보면 내 삶에서 정말로 소중하고 가치 있게 여겨지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그 순간 우리는 지독한 권태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매사에 의욕이 없다. 뭐든지 “그거 해서 뭐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사는 이들을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 혹은 의욕이 없는 사람, 허무주의자 이런 식으로 낙인을 찍는다. 스스로도 이렇게 살면 안 될 것 같아서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이 생각들을 떨쳐 버리려고 하는데 근원적인 해결이 안 된다. 누구도 그것에 대해서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다만 건강하지 못한 생각이니까 치료를 받든지 어떻게 해서든 빨리 털어버릴 수 있도록 운동을 독려하기도 하고, 취미 생활도 좀 해서 활력을 찾으란다. 이 근원적인 물음을 한 사람이 인류 역사상 나 밖에 없는 것은 아닐 텐데 정확한 답을 찾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 다만 임기응변만 난무할 뿐이다. 죽을 때까지 임기응변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잊어버려라. 그게 건강하다.” 스스로를 속이며 살라고 한다. 아주 시시한 게임을 정말로 즐거운 듯이 하는 TV 예능의 연예인처럼 잠시의 즐거움을 연속적으로 가져가기 위에 우리는 계속해서 뭔가에 몰두하면서 살아야 한다. 생각해 보면 산다는 것은 과정의 연속이지 결론이 있는 것이 아니다. 결론은 죽음밖에 없다. 죽음 앞에서는 드러난 우리의 실상이란 이 지독한 권태이다. 약 3천 년 전에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다 누렸던 어느 왕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
솔로몬 <전도서 1:1~11>

이 권태를 잊어버리기 위해서 700명의 후궁과 300명의 첩을 들이고 금을 물처럼 쓰고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다 해봤는데 그 말년에 남긴 글의 첫머리가 이와 같다. 이것이 과연 내가 바라는 삶의 결론인가? 이 허무를 어쩌지… 작가는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통해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권태의 실체를 설명한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삶의 부조리 자체를 보여주는 연극이다. 총 2막으로 구성되는데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특이한 것은 여기에 긴장을 유발하는 사건이 하나도 없다. 그저 목적을 알 수 없는 기다림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등장인물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1막과 2막 사이에 차이도 없다. 무대 장치도 그대로다. 다만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고도를 기다리면서 늙어가고 쇄약 해져 가는 등장인물들만 있다. 1막과 2막 사이에 대사도 반복된다. 솔로몬이 말했던 인생의 부조리가 아주 적나라한 형태로 드러난 것이다. 이런 삶에서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작가는 하이데거의 의견을 인용한다.

하이데거는 ‘깊은 권태’를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하나, 곧 ‘실존(Existence)’하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실존이란 다른 사람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세상 사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신의 ‘존재 가능성(Seinsknnen)’을 기획하고 그것을 따라 산다는 것을 말하지요. 그는 이러한 행위를 ‘기획 투사(Entwurf)’라는 용어로 표현했습니다. 기획 투사는 단순히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운다는 말이 아닙니다. 기획 투사는 자신의 존재 가능성에 스스로를 던져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듦으로써 자기 자신을 새롭게 구성하는 행위이지요. 한마디로 진정한 자기, 본래적 자기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김용규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주체적 자아를 회복해서 본래적 자아로 살아가라는 말이다. 그런데 뭔가 빈약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타인의 인식이나 관념을 벗어나서 나로 살아가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자기 일에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거나, 뭔가 독특한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거나,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길을 과감하게 뿌리치고 원하는 길을 찾아가는 사람 등 세상에는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존재하는데 그들이 실존 의식을 가지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 마저도 외적 가치판단의 투사인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나로서 충만한 사람은 과연 이것이 맞는지 늘 의심 속에서 살아가지 않을까? 샤르트로도 하이데거도 주체 의식의 충만으로 삶에 대한 확신 속에서 살았을까? 현실에 대한 이들의 통찰은 경의롭기까지 하지만 이들의 해법에는 항상 물음표가 남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7. 실존적 자아 인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