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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신앙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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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둥 Jun 03. 2022

아담은 선악과를 손에 들고...

선악과와 자유의지

기독교인들과 무신론자들 간에 해묵은 논쟁은 어느 세대에서나 어느 시절에나 존재한다.

“하나님이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하나님이 전지전능하다면서 세상은 왜 이 모양이야?”

이런 류의 질문이나 항변은 가장 흔하다. 문제는 이런 질문에 대해서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변호사라도 되는 것처럼 이런저런 설명을 하기는 하지만 뭔가 흡족한 대답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미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런 비슷한 의문들이 신앙인들에게도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만드셔서 우리를 이렇게 힘들게 만드셨나?”
“하나님은 아담을 만드실 때 그가 선악과를 따먹을지 모르셨나? 분명히 아셨을 텐데 왜 하와가 선악과를 따는 순간에 막지 않으셨을까?”

20대 중반에 믿음을 가지기 시작해서 꾸준히 교회를 다니며 성경도 많이 읽었지만 20년이 다 되어가는 신앙생활을 거쳐도 이런 의문에 대한 흡족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목사님들 이런 질문에 답이 될 만한 설교를 잘 하시지도 않는다. 한국 교회 내부에서는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 내지 불신앙처럼 여겨지기는 분위기가 있어서 자유롭게 질문하지 못한다. 다 공감하겠지만 사람이 한 번 의문을 품은 것에 적절한 답을 얻지 못하면 가슴 한 구석에 콕 박힌 압정처럼 남아서 계속 괴롭힌다. 그리고 삶에 기복이 있듯이 신앙의 여정에도 기복이 있기 때문에 해소되지 못한 의문들은 신앙적인 방황이 있는 시절에 그 위력을 더해서 믿음에 대한 의심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신앙의 길에 들어선다는 것은 세계관의 변화를 의미한다. 과학적 세계관, 진화론적 세계관, 자본주의 세계관, 민주주의 세계관 등 우리를 둘러싼 환경 인식의 틀이 신적, 영적 세계관으로 전환됨에 따라 세계관의 충돌 불가피하다. 그 충돌의 파편으로 무수한 의문들이 튀어나오듯 발생 되게 마련인데 이것은 성경과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 같은 경우에는 신적 인식의 틀에서 인간을 이해해야 비로소 가졌던 의문들을 풀어나가는 실마리를 찾게 된다. 기독교에 있어서 신앙이라는 것은 결국 신과 인간과의 관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인간을 알아야 하며 더 깊이 있게는 나를 아는 참 지식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만드셨을까? 안 만들어도 아담과 하와 그리고 그 자손들하고 에덴동산에서 즐겁게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것 아닌가? 인간의 모든 관계는 인정을 필요로 한다. 부모와 자녀, 스승과 제자, 상사와 부하, 형제, 자매, 친구, 부부, 동료 등 인간이 맺는 관계에서 상대에 대한 인정을 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 너와 나는 서로가 서로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면서 비로소 관계가 탄생하게 된다. 여기서 인정이라는 것은 암묵적의 약속이다. “오늘부터 너와 나는 친구로서 존재한다.”, “오늘부터 당신과 나는 아내와 남편으로 존재한다.” 하나님은 우리와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관계를 만드실 때에 인정의 증거로서 선악과를 남기셨다.

“아담, 네가 나를 창조주로서 인정한다면 이 선악과를 먹어서는 안돼. 나는 네가 이 선악과를 잘 보존하는 것으로 네가 나를 창조주로서 인정하는 것을 알겠다. 이건 우리 사이의 약속이야. 만약에 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우리의 관계는 깨어질 거야.”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선악과인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관계는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사랑을 근간으로 하는 관계이다. 이것은 자율성을 전제로 한다. 창조주와 피조물은 위계가 명확해서 신은 우리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강제로 사랑하도록 만들 수 있고 복종하도록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강압적인 역학 관계에서는 사랑이 성립되지 않는다. 우리가 만든 로봇이 우리를 향하여 사랑한다는 말을 반복한다면 우리는 로봇의 사랑을 인정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관계를 허락하시되 분리 또한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허락하신 것이다. 인간과 하나님의 분리는 하나님과 정반대의 성향인 죄에 있다.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죄이고 선악과는 하나님의 집을 떠나 밖으로 나가는 문이었다. 그 문을 열 것인가 영원이 닫을 것인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이었던 것이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는 것을 하나님이 막게 되면 자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유의지를 침해하는 결과가 되고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친숙한 관계가 아니다.


이 모든 추론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하나님은 아담을 만드는 순간에 이 친구가 선악과를 먹게 될 것이며 온 인류는 하나님을 떠나서 방황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는 것이다. 만약에 아담이나 하와가 선악과를 잘 지켰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역사가 달라졌을까? 결코 아니다. 아담이나 하와는 선악과를 먹지 않았을 지라도 이 자유 의지의 덩어리인 사람은 분명히 그 자손 또는 그 자손의 자손을 통해서 선악과를 먹게 되었을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누구나 알게 되는 사실이 있다면 지식이 머릿속에 있으면 가치가 없고 가슴속에 있을 때 비로소 삶을 변화시키는 가치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쉽게 오지 않는다. 오랜 경험과 시행착오 속에서 몸으로 느껴야 비로소 깨달음이 된다. 그 전에는 아무리 들어도 모른다. 그래서 누군가 정말로 내게 필요한 말, 좋은 말을 해줘도 그대로 실행할 수 없다. 이것이 인간이다. 불에 데어 보기 전까지는 얼마나 뜨거운지 모른다. 아무리 뜨겁다고 말해줘도 한 번은 덴다. 어릴 때 엄마가 아주 날이 잘 드는 가위를 사 오셨다. 나더러 이 가위 아주 잘 드니까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셨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입고 있던 티셔츠 옷깃을 가위질했는데 아무런 잘리는 느낌이 없어서 옷이 안 잘린 줄 알고 가위질을 계속했다가 옷을 버린 일이 있다. 그 뒤부터는 그 가위를 조심해서 썼다. 들음과 깨달음의 차이인 것이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아무리 조심하라고 말해줘도 결국 먹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다. 지독히도 말을 듣지 않는 우리 집 다섯 살 딸아이처럼 하나님 입장에서 아주 골치 아픈 것이 인간이다. 이걸 죽이지도 못하고 살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바보로 만들어버리면 하나님 입장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인간이다. 모두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유의지에서 발현된 산물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는 우리로 하여금 신을 떠나게 하는 자유의지이기 때문에 악한 것일까? 아니다. 이것은 긴 방황을 거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가 인간이 처한 실존적 상황을 깨닫는 것은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자유의지는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어떠한 가치를 판단하게 하는 능력이 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식 틀도 이 자유의지를 바탕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유로운 마음,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도 자유의지로서 가능하게 된다. 신적인 시각에서 인류의 역사는 낮 동안 집을 떠난 아이가 열심히 놀이터에서 뛰어놀다가 엄마가 저녁에 밥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에 달려와 집에 들어가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는 모두 집을 떠나 있기에 삶의 어느 순간에도 안주할 수 없다. 오직 해질녘에 부르는 엄마의 정겨운 소리를 듣고 돌아와 밥상 앞에 앉았을 때 비로소 안식이 시작된다. 오묘하지 않은가? 인간은 자유의지로 떠났다가 자유의지로 인해 되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만드는 순간에 인간의 방황과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한 회귀를 각오하시고 창조를 시작한 것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인간은 하나님에게 이 모든 수고와 엄청난 희생을 각오하고서라도 창조할 수 밖에 없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뗏국물이 줄줄 흐르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있는 부모의 눈길처럼 인간은 아무리 죄로 더럽혀졌어도 하나님 앞에서 그 본질을 잃지 않고 사랑받을 만한 존재인 것이다. 나도 당신도, 사고로 다리를 잃고 병원에 누워있는 누군가도, 지하철역 통로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시커먼 얼굴의 노숙자도 사랑 받을만한 존재인 것이다. 설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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