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외가 친척으로 예수보다 먼저 하나님으로부터의 소명을 부여받은 요한은 요단강 물로 유대인들에게 죄를 사한다는 의미로 세례(洗禮)를 해주어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요한이 이때 행한 세례는 이마에 물을 끼얹어 주는 가톨릭의 주수례(注水禮) 방식이 아니라 아예 몸통 채로 물에 깊이 넣었다가 건져주는 침수례(浸水禮)였다.
정남진 장흥물축제 장면. 사진출처=한국관광공사
힌두교 역시 항하침욕(恒河沈浴)이라 해서 그들의 성수인 갠지스강에 몸을 넣는 침수례를 행한다. 힌두교는 왕에게만은 침례가 아닌 관정례(灌頂禮)를 행해주었으니, 즉위하는 왕의 정수리에 바닷물을 부어주는 방식이다. 불교도 이 관정례를 수용, 수행 마친 승려에게 지혜의 물을 정수리에 부어준다. 옛 중국인들은 상이계욕(上已禊浴)이라는 세례 세시를 즐겼다.
음력 3월 3일이 한국인에게 성스러운 삼짇날이라면 중국인들은 상이절(上已節)로 부르며 이날이 되면 계곡물을 찾아가 몸을 씻은 후 액막이 제례를 행하였다. 그런 만큼 세상 사람들이 물에 의탁하는 것은 곧 물에 정화(淨化)의 힘이 있다는 주술적 믿음 때문이다.
금란계첩 유두계회도의 일부. 사진출처=국립중앙박물관
한국인의 세례 세시는 음력 6월 6일 유두(流頭)에 맞춰 시행되었다. 7월(음력 6월)은 삼복(三伏)이 들어 있는 일 년 중 가장 무더울 때이다. 날씨가 후텁지근하고 뜨거워지면 극심한 체력 고갈이 따른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복날에 맞춰 각자의 몸에 맞는 보양식을 먹는다. 하지만 보양식으로 기력 추스르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 액까지 물리쳐야 온전한 여름을 보낼 수 있다.
대개 7월 중순에 음력 6월 6일 유두날이 든다. 한국인도 액을 물리는 데 물을 사용하고 있으니, 유두날이 되면 사람들은 물로 액을 물리치는 의식을 행하였다. 그 의식이란 맑은 시내를 찾아가 목욕하는 것이다. 유두는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는다는 뜻으로, 동류수두목욕(東流水頭沐浴)에서 나온 말이다.
조선시대의 유두풍속. 사진출처=국립민속박물관
사람들은 특히 동쪽을 향해 흐르는 물(東流水)을 좋아했다. 동(東)의 색은 청색이요 양기가 왕성하기에 그 물에 머리를 감아야(頭沐浴) 제대로 액 없애고 길고 긴 여름날 더위 먹지 않는다고 믿었다. 유두날의 이러한 풍속을 유두천신(流頭薦新)이라고 하였다.
13세기 초 고려 희종 때의 학자 김극기가 쓴 <김거사집(金居士集)>에, “동도(東都. 경주)에서는 6월 15일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아 액을 떨어버리고 술 마시고 놀면서 유두잔치를 한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이보다 더 자세한 기록으로 <고려사> 명종 15년 조에는, “6월 병인 날에 시어사(侍御史) 두 사람이 환관 최동수와 더불어 광진사(廣眞寺)에 모여 유두음(流頭飮)을 마련했다. 나라 풍속은 이달 15일에 동류수(東流水)에서 머리를 감아 불상(不祥)을 없애고 회음(會飮) 한다.”가 보인다.
이외에도 조선 후기 홍석모가 쓴 동국세시기나 동시대의 김이재가 전국의 읍지(邑誌)를 통합 편찬한 <중경지(中京志)> 풍속 조에도 유두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고 있으며, 김매순의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는 고구려의 유두 풍속까지 언급하고 있음을 볼 때, 시행 날짜가 지금과는 약간 차이가 있으나 모두 유두천신을 말하고 있다. 이런 것으로 볼 때 유두천신은 최소한 삼국시대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 한민족의 풍속으로 존재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태국의 물축제 송크란. 사진출처=나무위키
옛날 유두날 즈음은 전국의 생업 종사자들이 잠깐이나마 덜 바쁠 때였다. 그런 중에 유두라는 절기를 정해 시원한 물을 찾아가 몸을 적시는 유감(有感)으로 액막이도 하고 다가올 무더위에 대한 마음 다짐을 할 뿐 아니라, 봄철에 난 햇곡물로 조상과 농사 신에게 제사를 올려 가을의 풍요를 기원하면서 공동체 의식을 고취하였다.
농사짓지 않는 대처의 묵객 문사들은 가까운 계곡이나 경치 좋은 곳의 정자를 찾아가 술과 음식을 취하며 시를 짓는 등 여유 있는 하루를 즐겼다. 전국 팔도가 이날만큼은 일 년 중 가장 태평스럽게 지낸 것이다. 그렇듯이 유두날의 유두천신은 한민족의 지혜가 담긴 아름다운 세시였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인의 유두천신이 풍속형이라면, 동남아시아의 물 관련 세시는 불교 관정례에서 출발점을 찾을 수 있는 종교형으로서 전국적인 축제로 전승되고 있다. 태국에는 지상 최대의 물 축제라 하는 송크란이, 미얀마에는 띤잔, 라오스에는 삐마이, 캄보디아에는 본옴뚝이 있다. 중국 윈난성에는 소수민족 태족(太族)만 즐기는 포수이지에(潑水節)가 있기도 하다.
서울 근교 계곡의 물놀이 장면. 사진출처=연합뉴스TV 캡처
십수 년 전부터 이 땅에 송크란을 복사한 물 축제가 여기저기 시행되기 시작하였다. 종교적 의미까지야 굳이 따질 필요는 없으나 물이 갖는 정화의 의미는 어디에서든 찾아볼 수 없고, 그저 한바탕 유희에 불과하다는 것이 아쉽다.
오늘날의 한국인은 유두날에 대한 개념을 망각한 채 살고 있다. 그저 여름이 되면 계곡이나 바다를 찾아가 시원함만 즐기려 한다. 시원한 물놀이를 즐기는 것도 좋겠으나, 물 찾는 김에 물이 갖는 정화 의미를 되돌아보고 자연이 주는 혜택에 감사하며 풍류를 즐기는, 그런 미덕 넘치는 유두천신 세시가 전국적으로 복원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