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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쓴이 Jul 07. 2024

초단편 소설

열문장: 이별의 온도

8년 연애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만난 남자와 여자의 얼굴 위에는 의외의 평온함이 비쳤다.          


‘한동안 우리 관계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갖자’는 진부한 이야기를 나누고서 그들은 길고 긴 일곱 번의 낮과 밤을 보내며 지난 시간들을 정산했다.          


함께한 추억들이 주는 압박감은 생각보다 거대했지만 ‘그래서 지금도 서로를 최우선으로 생각할 만큼 사랑하는가?‘는 의구심을 틀어막을 정도로 강력하지는 못했다.          


이윽고 여섯째 날 저녁, ‘아, 이제 서로가 아니어도, 서로가 없더라도 죽고 못 살진 않겠구나’라는 결론에 기어코 도달하고야 말았을 때, 남자는 늑골 안으로 박하향 같이 화하고 얼얼한 기운이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순식간에 코까지 침범해 버린 매운 기운이 어찌나 민첩하고 날카로웠는지 남자는 건조한 표정 위로 눈물이 범람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난 우리의 연애가 사고사로 끝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          


일주일 만에 마주한 그들 사이에 흐르는 침묵을 쫓아내며 여자가 꺼낸 말에 남자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갈기갈기 찢긴 채로 태워버리기엔 우리가 함께한 시간들은 참 값지더라. 흠.. 그러면 우리 연애의 사인은 자연사로 하자. 기왕이면 천수를 누린 호상으로 하면 어때? “          


‘자연사’와 ‘호상’이라는 말에 웃음이 터진 여자가 잠시 웃다가 크게 한숨을 쉬고 남자의 눈을 다정하게 바라보며 악수를 청했다.          


그날, 잘 익은 시간들을 후하게 장례 치른 그들은, 비로소 먹먹한 상복을 벗고 각자의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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