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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슝이모 Jul 29. 2024

자랑도 풍년이었던 날

‘잉한니혼중웬’ 행사날

잉한니혼중웬? 

오타가 아님을 미리 밝힌다. 잉-잉글리쉬, 한-한국, 니혼-일본, 중웬-중국, 즉 네 개 언어과가 주인이 되는 행사의 명칭이다. 

태국 학교에는 행사가 많다. 하지만 언어과에서 주관하는 이 행사가 언어과의 하이라이트요, 꽃이다. 올해는 여기에 스페인어가 뜬금없이 꼈다. 한 달 전 새로 부임한 태국인 영어교사가 스페인어 전공이라는 이유다. 물론 아직 우리 학교는 스페인어과가 없다.

이 행사는 매년 열리는데 해마다 교사들의 회의를 거쳐 콘셉트를 정한다. 외국인 교사들은 태국인교사 회의에 참석하지 않으니 회의 진행방식이 어떠한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우리 한국어과 교사들 왈, 회의의 모든 결정은 결국 교장의 취향으로 종결된단다. 비단 행사 주제 얘기가 아니다. 교장의 권위가 태국 왕 바로 아래에 있다 해도 무방한 우리 학교는 그날 ‘그분’(태국 교사들은 교장을 이리 지칭하며 뒷담화를 한다)’의 기분에 따라 교문 색깔이 노란색이 될 수도, 소각장 위치가 동쪽에서 남쪽으로 바뀔 수도, 다음 달 행사가 내일로 앞당겨지기도 한다. 


작년 언어과 행사는 각 나라의 차(茶)를 소개하는 주제로 행사가 열렸다. 일본어과는 다도 예절과 함께 녹차 내리는 시연을 했고, 녹차를 빼앗긴 중국어과에서는 재스민 차를 골랐다. 영어과는 자연스럽게 홍차. 녹차, 홍차(?)를 모두 빼앗긴 한국어과는? 달디단 음료를 좋아하는 태국인들의 입맛을 고려해 달콤새콤 유자차를 선택했다. 그런데 예상외 결과가 나왔다. 유자차에 호불호가 이리 나뉘다니. 단 음료라니 그건 호(好), 그런데 그게 뜨거운 음료라서 불(不)이 되는 듯했다. 게다가 시고 떫은 맛이 학생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았다. 차 시음하기 위해 유자차 부스 앞에 선 줄의 길이가 타 과에 비해 다소 짧았다는 씁쓸한 결말을 남기고 행사가 끝났다.     


올해는 각 나라의 ‘소원빌기’가 주제였다.     


“선생님! 한국에서 소원을 빌 때 어떻게 빌어요?”

이번 행사의 테마가 정해지자마자 한국어과 계약직 태국인 교사 A가 득달같이 달려와 나에게 묻는다. 타 과에 비해 무조건 잘해야 한다는 경쟁심 하나는 세계 챔피언급인 20대 교사 A는 지난해의 설움(!)을 회복하겠다며 여느 때보다 적극적이다.

“음. 한국에서라면. 기독교인은 교회에서 기도하고, 불교신자들은 절에서 기도하고. 전통방식으로 무당을 불러 굿을 하기도 하고, 달을 보며 소원을 빌기도 하고, 돌을 쌓아 올리기도 하고.”

“굿을 하는 것만 빼면 다른 건 태국에서도 다 하는 거네요. 영화 ‘파묘’에 나온 그게 굿이죠?”

“맞아요. 그런데 우리가 굿을 할 수는 없을테고요.”

둘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다 불교가 국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무방할 태국이니 한국 절에서 하는 방식으로 고려해보기로 했다. 어깨너머로 들으니 중국어과와 일본어과 모두 종이에 소원을 써서 나무에 달아두는 방식이었다. 한국어과의 독창성이 시급했다.

한국절이라. 한국절, 한국절, 한국절...

내 머릿속에는 부처님오신날 절에 걸린 색색들이 소원등 무리가 바람에 하늘거리는 광경이 떠올랐다. 바로 인터넷에서 자료가 될 사진을 찾아 A에게 보여주었다.

“우와, 이거 너무 예쁜데요? 그런데 이 연등을 어디에서 사죠?”

“다행히도 한국어동아리 시간에 연등 만드는 활동을 하려고 제가 한국에서 가져온 연등 접는 종이가 있어요. 연등을 직접 만들어서 거는 거지요. 다만 연등을 걸 장소만 마련된다면요.”

“연등만 있다면야 나머진 걱정마세요. 제가 학교 직원분께 요청해서 연등을 어떻게든 걸 수 있게 해볼게요.”

한국어과에는 이제 학교 부임 3년차인 계약직 A 교사 말고도 정규직 교사 B가 있다. B는 학교 행사가 세상에서 가장 성가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10년차 교사인데 요즘 극한의 다이어트까지 하고 있다. 하루동안 낼 수 있는 에너지를 몽땅 수업에 쥐어 짜내는 중이라 이번 학교 행사 준비에 뒷전으로 빠져버렸다. 그런 까닭에 A와 내가 전적으로 행사 준비를 해내야만 했다.     



행사장 음식부스에서는 각 과의 특색에 맞는 음식을 팔아야 했다.

한국 음식을 뭐로 할까? 떡볶이? 떡이 비싸 이윤이 안 남는다는 의견. 떡꼬치? 학교앞 편의점에서도 쉽게 살 수 있어 안된다는 의견. 한국라면? 한국라면 자체가 비싸 이윤이 안 남는다는 의견(판매를 한 수익은 한국어과 재정으로 쓰일 예정이니 이윤이 중요하다). 김밥? 재료 준비가 힘들고 만들 때 옆구리 터지는 걸 학생들이 감당 못 할 거라는 의견. 불고기? 안 매워서 인기 없을 거라는 의견. 제육볶음? 돼지고기가 비싸졌다는 의견. 김치볶음밥? 김치 싫어하는 어린 학생들도 꽤 있을 거라는 의견.

나는 마치 허술한 공격수이고 A와 B는 능숙한 방어수 같다. 이번 행사에서 음식 선정에만 빼꼼 존재를 드러낸 B 또한 A와 합세하여 내가 던지는 의견을 딱딱 잘도 받아친다.

“다들 의견이 그렇다면... 가장 간편한 주먹밥으로 합시다!” 

오랜 논의 과정을 거쳐 한국어과에서는 주먹밥(김치, 참치, 김치참치 3종류로)과 오징어게임 열풍 이후 여전히 태국에서 인기 많은 달고나를 만들어 팔기로 했다. 이번 행사는 한국어 전공반 고3 학생들이 학교에서 하는 마지막 행사이니만큼 40명 전원 모두를 참여시키기로 했다.

주먹밥과 달고나는 행사 전에 연습으로 만들어보았는데, 웬걸, 달고나를 너무 얕봤다. 달고나 장사하시는 분들, 그냥 쉽게 돈 버시는 게 아니었구나. 달고나를 일정한 모양으로 동그랗게 만든다는 건 고도의 기술이었다. 결국, 만들기를 포기하고 인터넷 쇼핑몰에서 달고나 500개를 주문했다. 

행사를 코앞에 둔 어느 날 A가 절규하듯 소리치며 나를 찾았다. “선생님! 선생님! 일본어과에서 뭘 만드는지 알아요? 글쎄, 오리기니를 만든대요. 어휴, 주먹밥과 너무 모양이 겹치잖아요!”

아, 얄궂게도 오니기리와 주먹밥이 맞붙게 생겼다. 

A를 달래듯 말했다. 

“걱정 말아요, A쌤. 내 장담하는데 참치와 김치가 들어간 맛깔난 주먹밥이 담백한 오니기리보다 훨씬 학생들에게 잘 먹힐 테니까.”


대망의 행사날. 

한국에서 챙겨 온 한복이 일 년에 딱 한 번 세상빛을 보는 날이기도 하다. 한복을 차려입고 학교 안에 들어서니 여기저기에서 “선생님, 예뻐요!” 폭풍 인사치레가 쏟아진다. 한복 하나로 그간 저조했던 한국인 교사의 가치가 상한가로 치닫는 시간, 굽었던 어깨가 절로 펴졌다. 

행사에 참가하는 한국어과 학생들은 이미 새벽 5시부터 등교해서 곱게 화장하고 머리를 땋고 한국어과에서 보유한 한복도 갈아입었다.(올해 대구시 교육청에서 전 세계 한국어를 공부하는 학교 대상으로 주최한 ‘한복나눔’ 행사에서 우리 학교가 영예롭게 채택되어 다섯 벌의 진품 한복이 생겼다. 물 건너온 이 한복들은 기존에 한국어과에서 인터넷으로 사두었던 중국산 한복들과는 엄연히 다른 우아한 존재감을 과시했고, 행사 참여하여 한복을 입게 된 학생들 사이에서는 이 한국산 진품 한복을 향한 치열한 쟁탈전이 일어나기도 했다.) 

행사의 첫 포문은 각국의 춤으로 시작했다. 춤의 테마는(물론 춤도 ‘테마’가 있다) ‘등’이었다. 각국의 ‘등’을 들고 전통춤을 선보이는 것이 올해 각 과에 떨어진 과제였다. 

한국의 등이라면 뭐니 뭐니 해도 청사초롱! 청사초롱을 들고 추는 춤을 유튜브에서 찾으니, 역시 유튜브. 없는 게 없구나. 학생들은 여전히 더위가 머물러 앉아 있는 오후의 교내 빈공간을 찾아다니며 특별훈련에 돌입했다. 학생들은 춤연습을 하는 기간 동안 교사 A와 작당하고는 내게 연습과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완성작을 통해 내가 느낄 감동을 반감시키지 않겠다는 배려였지만 참을성 없는 나는 행사날까지 남은 날을 손꼽으며 혹독하게 기다려내야 했다.


영어과 학생들이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추고 그 뒤로 일본, 중국, 스페인(?)어과가 그간 연습한 결과물을 쏟아냈다. 다들 참 열심히 연습했구나. 드디어 마지막 순서, 우리 한국어과 학생들이 무대 위에 섰다. 

이게 웬일! 이 깜찍한 녀석들, 청사초롱만 춤 도구로 사용한 게 아니었다. 빨간 복면과 사물놀이 옷과 부채, 거기에 전통음악에 K팝이 가미된 음악까지 동원되었다. 앞 순서 춤들이 기억에서 한방에 사라져버릴 정도로 우리 한국어과 학생들의 퍼포먼스는 훌륭했다! 아니, 최고였다!!

이 느낌표 세례는 그저 팔이 안으로 굽어서가 아니었음을 자신한다. K팝의 노련함을 잘 아는 한국어반 학생들은 영악하게도 전통 청사초롱 춤을 화려한 퓨전 퍼포먼스로 탈바꿈해서 선보였고, 그 모습이 너무도 자랑스러운 나는 그 신명 나는 리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학생들 앞에서 눈물을 선보여야 했다.

한국춤 퍼포먼스가 끝나고 학생들에게 달려가 팬미팅 요청하여 얻은 사진


무대 행사가 끝남과 동시에 행사장 각 부스가 힘차게 가동을 시작했다. 각 언어과에서 준비한 다양한 국적을 대표하는 음식들과 나라별 소원빌기 활동, 퀴즈 대회 등이 학생들을 반겼다.

행사장 입구에서 맨 처음 방문객을 맞이하는 첫 부스가 한국어과 부스였다. 행사장에 들어서자면 방문객의 눈높이에서 바람의 리듬에 맞춰 하늘거리는 한국 연등 행렬이 방문객을 반긴다. 그 모습은 마치 한국의 어느매로 공간이동을 한 듯한 기분 좋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부스 앞에 한복 등신대를 세워놓으니 그 착각이 더욱 그럴싸해졌다. 학생들 키에 맞춘 한복 등신대는 얼굴 부분에 구멍이 나 있어 한복을 입은 듯한 사진 연출을 하려는 학생들로 그 주변이 북적였다. 

한국어과 부스를 방문한 학생들은 붓펜으로 종이에 소원을 쓴 후 연등에 다는 활동을 참여할 수가 있었다. 그 활동이 끝나면 부스 한쪽 벽면에 부착해둔 운세 종이를 통해 자신의 운세(!)를 알아볼 수도 있었다. 

1부터 31번까지 적힌 종이 중 자신이 태어난 날짜가 적힌 번호의 종이를 들추어서 그날의 운세와 행운의 숫자, 색깔을 알아보는 활동이다. 그 내용은 요즘 시대에 걸맞게 QR코드로도 안내받아볼 수 있도록 했다. 

31개의 운세 내용을 작성한 장본인으로서 운세 내용의 탄생 비하에 대해서는 묵비권을 행사하기로 하겠다. 다만, 운세 저자로서의 약력을 슬쩍 공개하자면, 한때 나는 천문학잡지사 기자로 분했던 경력이 있다. 그 잡지 맨 뒷장에 별자리운세코너가 있었는데, 그 바닥(!)에서 용하다는 소문까지 났던 그 별자리운세 작성 담당자가 바로 나였다. 이번 행사에 선보인 오늘의 운세가 완전 초짜의 손에서 작성된 내용은 아니었다는 변명 아닌 변명 되시겠다.


한국어과 음식부스에서는 계획대로 그 자리에서 만들어내는 주먹밥과 (기성품) 달고나를 판매했다. 소원빌기 부스 담당이었던 나는 가끔 한 번씩 주먹밥과 달고나 판매 상황을 알아보려고 음식 부스 쪽으로 가보았다. 주먹밥 담당 학생들은 행사장의 열기 속에서 채 식지 않은 밥을 쉴 새 없이 손으로 둥글리느라 정신이 쏙 빠져버린 듯한데도 나를 보면 “선생님!” 목청껏 부르며 웃어 보이는 걸 잊지 않았다. 비단 주먹밥 담당 학생들뿐만이랴. 달고나를 판매하는 학생들, 소원빌기 활동 방법을 설명하고 소원 종이를 연등에 다는 걸 돕는 활동 담당 학생들 모두 불쾌지수 높은 더위 속에서도 미소만은 잃지 않았다. 그 미소에서 읽히는 여고생 특유의 생기는 언제나 그렇듯 눈이 부시다.

오전 8시부터 시작된 행사는 1시쯤 막을 내렸다. 너무 많이 준비한 건 아닌지 걱정됐던 쌀과 김치, 참치가 때를 맞춰 똑 떨어졌고, 500개나 구매한 달고나도 완판이다. 주먹밥 판매 부스를 맡았던 A가 내게 귓속말을 했다. 

“선생님, 오니기리보다 주먹밥 사려는 줄이 더 길었어요. 찡찡!(‘찡찡’은 태국어로 ‘정말’이라는 뜻)!”


행사장 뒷정리까지 말끔하고 신속하게 진행하는 학생들. 고3 마지막 행사 참여라 그랬을까, 다들 정말 진심이고 열심이다. 그 모습이 마냥 예뻤음이 분명한 열혈 교사 A가 학생들을 향해 소리쳤다.

“고생한 너희를 위해 우리 선생님들이 조만간 맛있는 한국 음식 만들어줄게!”

‘맛.있.는’에 특별히 힘을 주어 말하는 A교사의 호언장담에 학생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와 동시에 나에게는 ‘이 기특한 녀석들에게 무얼 만들어주면 좋을까’ 즐거운 고민이 시작되었다. 


누군가를 즐겁게 해주려는 고민이라니. 

이런 고민으로 흘러가는 하루들이라니. 

이런 나날들이 마치 돼지저금통을 채우는 동전들처럼 내 마음 저장고에 하나씩 쌓여간다. 

이거 참, 근사하지 아니한가!


한 한국어과 학생이 전하는 고운 마음을 받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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