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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슝이모 Jul 02. 2024

너의 비밀 친구가 되어줄게!

마니또 게임 하기

“여러분, ‘마니또 활동’을 알아요?”

학생들 대답의 총량과 데시벨로 가늠해 보니 고3 학생들은 마니또 놀이를 대부분 알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렇다면 긴 설명까지는 필요 없겠네요. 나의 수업은 손발짓과 영어 섞은 한국어 설명이 단순할수록 학생들은 집중을 잘합니다. 설명이 길어져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게 학급의 맨 앞줄 도우미들이 있습니다. 만국 공통의 법칙, 교실 맨 앞에는 우등생들이 앉는다! 교실 맨 앞자리 학생들은 대부분 성적과 눈치력이 우수한 외향적 학생들. 이 아이들이 종종 내 통역 역할을 자처하곤 해서 큰 도움을 줍니다.

“우리, 마니또 활동을 할 거예요”라는 제 말에 “그게 뭔대요?”라 말하듯 눈만 껌뻑이는 아이들의 속내를 간파한 맨 앞자리 민아가 친절하게 설명에 들어갑니다. 


마니또가 어느 나라 말이었더라? 이번 기회에 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스페인어로 비밀친구라는 뜻이었네요. 표준어로 ‘마니토’라고 사전에는 명시되어 있지만 마니또가 아닌 마니토라니. 마니또 맛이 안 나는 발음 아닌가요? 발음은 '마니또'라고 하면서 마니토로 알려주는 것이 어색해서 그냥 저는 마니‘또’라고 학생들에게 알려주기로 했습니다.

 

마니또 활동을 2주간 진행하겠다고 선포하며 원활한 마니또 활동을 위한 ‘마니또 활동지’를 학생들에게 배포했습니다. 우선 마니또 활동을 비밀리에 충실히 이행하겠다는 서약서에 엄숙하게 서명까지 시켰습니다. 활동지에 적힌 ‘마니또가 좋아하는 음식 알아보기, 마니또가 좋아하는 아이돌 알아보기, 마니또와 하이파이브하기, 마니또 도와주기, 마니또에게 편지 쓰기’ 등등 마니또 활동 기간 중 해야 할 미션들을 설명하는데, 이 녀석들, 그 어느 수업보다 진지합니다.

누군가의 비밀친구가 된다는 사실에 한껏 흥분한 학생들을 보고 있자니 제 마음이 싱글벙글 즐거워지네요. 

학생들은 한 명씩 앞으로 나와 저와 둘만 알 수 있게 마니또 이름 제비 뽑기를 했습니다. 자신과 친한 친구가 마니또가 된 아이들은 제게 음흉한 미소를 흘렸고 서먹한 친구가 뽑힌 아이들은 콧등을 찡그리며 난처하다는 표정을 보였습니다. 

“이 기회에 서먹했던 친구들과 서로 알게 되면 좋잖아!” 

제 말에 아이들은 수긍하면서도 아쉬움이 뚝뚝 묻은 얼굴입니다.

수업이 끝나고 교실을 나서는 아이들은 ‘하이파이브’ 미션 때문인지 여기저기서 하이파이브를 하며 교실을 나섭니다. 

“웬 하이파이브? 너, 설마?” “글쎄?” 

서로 손가락질해 대며 호호 깔깔. 고3 여고생들에게 얼마간의 활력을 준 제 자신을 칭찬하게 되었습니다. 



교무실로 단 한 번도 오지 않던 아이들도 이번에는 저를 찾아 뻔질나게 교무실 출입이 잦아졌습니다. 마니또에게 줄 편지를 제게 맡기러 오거나 혹시 자기에게 온 편지가 없냐며 물어보러 오는 학생들이 매일 줄을 이었지요. 그 덕에 저도 가장 정이 많이 든 고3 학생들 얼굴을 자주 보고픈 흑심을 채울 수 있어 매일매일이 신났습니다.

마니또 활동이 진행되었던 2주간은 학생들에게 즐거움이 뚝뚝 묻어있었습니다. 고 3이 되면서 목소리에도 어깨에도 힘이 하나 없던 학생들이었는데 이 활동으로 얼마간의 긍정 에너지를 얻은 모양입니다. 마니또 활동을 기획한 제 자신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대망의 마니또 발표날.

고3 한국어전공반 학생들의 출석률이 백 퍼센트였던 유일무이한 날로 기록해야겠습니다. 

교실로 들어서는 학생들의 손에 제각각 마니또에게 줄 선물꾸러미들이 들려 있습니다. 

마니또를 발표하기 전, 학생들에게 활동지 한 면에 자신을 뽑은 마니또가 누구인지 이름을 써보게 하고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써보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자기가 뽑은 마니또 이름과 그 친구의 장점 세 가지를 쓰게 했고 마지막으로는 마니또 활동에 대한 감상을 적어보라고 했습니다. 활동지에 적는 칸을 많이 주었지만, 여전히 한국어가 두려운 학생들은 구글번역기의 힘을 빌려 어색한 문장으로 적어 내려갑니다.

대략 이런 거죠.

내 마니또의 장점은?

“키가 매우 높다(‘키가 크다’는 표현을 구글은 ‘높다’고 쓰나 봐요). 숫기가 좋아요(구글도 외향적이라는 표현을 ‘숫기’라고 쓰네요. 서술어가 어색하지만). 한국어를 잘 배우세요(대부분 명령형, 청유형 문장이 많네요), 거친 말을 하지 마십시오(거친 말을 안 한다는 뜻이겠지요?), 치과치료(태국 학생들 사이에서도 치아 교정이 붐이에요. 치아 교정을 치과 치료로 찾아냈겠지만 이게 장점도 되는군요.), 마니또이는 돼지고기 김구이를 좋아요(주어 뒤에 이/가나 은/는이 온다는 걸 알긴 안다는 거죠). 머리를 짧게 자른다요(서술어를 ‘아요/어요’로 바꾸는 활동에 익숙하다 보니), 착하게 굴어라(구글이 ‘착하다’를 ‘착하게 굴다’라고 표현하나 봐요), 게임을 좋아요(여전히 어색한 좋아요와 좋아해요), 하얀색으로 좋아해요(여전히 어색한 조사)” 이하 등등

아직 구글이 갈 길이 멉니다. 

끄응.. 그래, 이 선생님이 알아서 해독하도록 하마.     



한 명씩 자신의 마니또를 발표할 때마다 소리 지르고 손뼉 치고 책상 두드리는 학생들로 교실이 들썩 공중부양을 합니다. 자기 마니또를 예측했던 학생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몰랐던 학생들이 많았나 봅니다. 자신의 마니또가 발표되자 눈이 휘둥그레지며 쓰러지는 시늉을 하는 학생들이 속출했습니다. 마니또에게 건네는 선물도 요즘에 유행하는 인형, 학용품, 액세서리, 과자, 초콜릿 등등 제각각입니다. 미처 선물을 준비하지 못한 학생은 돈으로 송금하겠다며 은행 계좌를 물어보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마니또를 발표하는 시간 내내 교실이 하도 시끌벅적 난동에 가깝자 옆 반 영어 교사가 뭔 일인가 궁금했는지 문틈으로 쓱 구경하고 가네요. 

“마니또 활동, 어땠어요?”

“재미있어요!” 

“마니또 활동을 통해서 서로 잘 몰랐던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는 모습이 보기 좋았어요. 마니또 활동을 잘 해준 학생들, 참 잘했어요!”

요란한 박수소리. 이렇게 즐거운 이 주간의 마니또 활동이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저는 여전히 학생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 욕심이 큰 외국인 교사입니다. 


그래서 마니또 일원 중 한 명으로 내가 쓱 들어가 볼까 하는 과욕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태국에서 학교생활이 농익어가면서 느낀 점은 학생들에게 진정 필요한 건 친구와 같은 교사보다는 또래 친구라는 거죠. 그러니 진정한 친구가 되지 못할 운명이라면 나는 한 반에서 서로 잘 알지 못하는 학생들끼리 서로 어울릴 기회를 마구 제공해 주는 중개업소 소장쯤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어봅니다.

말이 잘 안 통하는 외국인 선생님이 자꾸 학생들 사이에 끼어서 뭔가 하려 하니 학생들 입장에선 불편한 부분도 있겠지요. 

다만, 학생들에게 늘 마음을 활짝 열고 있다는 걸 학생들이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눈치 빠른 외향적 아이들은 알아서 저를 찾아오니 너무 섭섭해 하지는 말아야겠지요. 제가 가르치는 모든 학생에게 친구와 같은 교사가 되어주겠다는 욕심은 마음으로만 가지고 있어야겠습니다. 태국에서 이렇게 학생들과 적당한 거리를 찾아가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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