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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슝이모 Aug 21. 2024

결과보다는 과정!

‘골든벨 퀴즈대회’ 참가기

0.

고백하자면, 애정하는 제자들이 있다.

교사로서 각각의 학생들에게 품는 애정의 크기가 과연 똑같을 수 있을까. 다만, 그 크기의 다름이 겉으로 표출되지 않도록 고도의 연기를 해야 하는 사명만이 존재하는 건 아닌가 한다. 태국에서 교사로 분하다 보면 여러 가지 기술을 요구받는다.

그중 하나는 바로 명연기자 되기.

진정 명연기자로 지내는 중인지를 묻는다면 솔직히 자신 없다. 다만 노력하고 있다는 것만은 자신한다.     


처음 태국의 교사로 일하기 시작했던 2년 전, 나는 한동안 얼떨떨하고 긴장된 마음으로 수업에 임했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으니까. 그 초기 기간, 이 얼이 빠져있던 신입 교사를 안정시켰던 학생들이 있었으니, 그 당시 고 1 학생이었던 황민아와 윤쥬리다. 둘은 늘 붙어 다니는 단짝이다.


처음 한국어 수업을 듣던 고 1 학생들은 대부분 한국 이름이 없었기에 한국 이름을 제비 뽑기로 하사 받았던 것과 달리 이 두 명은 한국어 수업을 앞두고 한국 이름을 스스로 준비해 왔다. 심지어 성까지 만들어왔다. 참고로 한국어 이름을 만들어 줄 때 나는 이름만 지어준다.

황민아와 윤쥬리는 늘 교단 바로 앞에 앉아서 수업을 받았다. 태국어 사용이 전무했던 내 초창기 수업에서는 보통 영어 설명이 잦았다. 한국어는 물론, 영어도 잘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인 반에서 수업을 혼자 한다는 건 상상 이상으로 품이 들었다. 특히 신입 교사는 더욱 얼이 빠지기에 십상이다. 열심히 설명한 후 학생들에게 “알겠어요?”를 물으면 돌아오는 건 학생들의 침묵과 멍한 표정. 진땀이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순간이다. 내가 예능 PD였다면 이럴 때 염소 소리 “메헤헤~”를 넣으면 제격일 테다.

쩔쩔매는 내 표정을 기똥차게 잘도 읽는 맨 앞 황민아는 이런 순간이 오면 늘 “선생님, 그러니까 이러이러하다는 말씀이시지요?”하고 영어로 물어왔다. 내가 “그래, 맞아!”라고 하면 황민아는 울림통 좋은 목청으로 학생들에게 내 설명을 태국어로 통역해 주었다. 1년 차 교사였던 당시에는 나 혼자 고 1 학생들 수업을 맡았는데 이때 황민아의 통역이 큰 역할을 했다(이 학생들이 고 2가 된 작년부터는 새로 부임한 태국인 한국어교사가 내 수업에 보조 교사로 들어와 통역을 해주고 있어 수업이 훨씬 수월해졌다).

통역만이랴. 말이 안 통하니 말 붙이는 학생이 별로 없던 신입 교사 시기에 늘 수업 시작 전후 교단 앞 내게로 와서 밥은 먹었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안 먹었으면 어디에서 먹을 건지 늘 살뜰하게 물어오는 것도 황민아와 윤쥬리였다. 그러니 초기부터 내가 이 단짝 친구들에게 눈도장을 확실히 찍을 수밖에.     


1.

한 달 전, ‘인천시교육청’과 ‘태국한국교육원’에서 주최하는 ‘골든벨 퀴즈대회’가 한국어를 공부하는 태국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열릴 것이라는 소식을 접했다. 주최 장소는 태국 고등학생들이 선망하는 태국 최고 명문대, 방콕에 위치한 ‘쭐라롱꼰대학교’란다. 참가 선발은 접수 선착순대로 한 팀당 2인, 40팀을 선발할 거라는 안내였다. 골든벨 퀴즈에서 수상한 4팀에는 ‘한국 연수’라는 부상이 주어진다니, 한국어를 공부하는 태국 학생들에겐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이미 이 공고를 접한 우리 학교 학생들 여럿이 내게 참가하고 싶다는 의사를 보였다. 학교 이름을 걸고 참가해야 하니 실력이 있는 학생 선발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한국어 전공반 학생들 대상으로 교내 골든벨대회를 개최했다. 출전한 팀은 16명, 8팀. 고3들은 다들 바쁘다는 이유로 황민아와 윤쥬리만 참석했고, 나머지는 고 2 학생들이었다. 각 팀에 미니 화이트보드를 나눠준 후 방콕 출전을 앞둔 야심찬 교내대회를 시작했다.

퀴즈대회 명칭은 「야! 너도 한국 갈 수 있어!」     


“한글날은 10월 3일입니다. 맞으면 O, 틀리면 X”.

나름 한국어 전공반인데 이쯤이야. 모두 통과.

“한국의 국기 이름은 무엇입니까?”

학생들이 교실 앞문을 힐끔거린다. 아, 교실 앞문에 태극기라고 글자가 쓰여 있는 걸 깜박했다. 모두 통과.

“한국 사람들이 추석에 먹는 떡 이름은 무엇입니까? 두 글자입니다.”

이 문제를 기점으로 민심이 요동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정답 대신 슬슬 ‘선생님, 사랑해요’ 혹은 ‘미안해요’라는 글이 속출했다.

모두 20문제를 출제했고, 이 중 18개를 맞춘 고3 황민아, 윤쥬리 팀만이 실전 퀴즈대회 참가가 확정됐다. 2, 3등 팀도 참여시킬 만도 하지만, 2등은 3개를 맞춘 팀이었으니. 실력차를 감안해야만 했다.


2.

황민아와 윤쥬리. 안 그래도 이 애정하는 제자들 일이라면 뭐든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설 판인데 학교 이름 걸고 퀴즈대회에 나가게 되었으니 한 달간 내 모든 시간을 쪼개 특훈에 들어갔다. 고3이라 따로 공부시간을 내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보통 아침 조회시간과 방과 후, 야심한 밤에도 문제를 녹음한 음성파일을 보내 풀게까지 하면서 퀴즈대회 대비 준비를 했다.

공지된 출제 범위는 무려 한국어 문법, 문화, 사회, 역사, 스포츠, 예술이란다.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 이 출제 범위를 접했을 때의 기분, 마치 황량한 시베리아 벌판 위에 서 있는 듯했다. 가르치는 교사도 배우는 학생도 공부 난이도가 막막했다.

뭐 어쩌겠는가. 할 수 있을 만큼 해봐야지. 기본적인 애국가에서부터 시작해 전통, 역사, 문화와 문학, 독립 투사들의 생애, 심지어 윤동주의 서시까지 불러냈다. 우리 교무실 앞에는 김사인 시인의 시 ‘조용한 일’이 적힌 포스터가 붙어있는데 문학소녀 윤쥬리는 그걸 가리키며 “저것도 외워 버릴까요?” 한다. 무서운 기세다. 저 시까지는 안 나올 거라며 아이를 진정시켰다.


대회 준비에는 열혈 태국인 한국어 교사 A도 함께 했다. 내가 두 학생에게 뭔가를 설명하고 “알겠어?” 하면 바로바로 고개를 끄덕여 나름 안심을 했더랬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A 교사가 다시 태국어로 물어보니 엉뚱한 답을 한다는 걸 알고 태국어 설명까지 전격 투입되었다.

     

황민아로 말할 것 같으면 내 웃음 버튼이다. 몸으로 하는 유희가 일상화되어 있어 함께 준비하는 내내 이 아이의 재치 있는 언어와 개구진 몸짓에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잠자리에거도 떠올라 큭큭 웃게 만드는 마력의 몸짓 소유자, 그게 황민아다.

반면에 윤쥬리는 냉철하고 절제된 생활에 익숙한 아이다. 황민아의 언어유희에 빵빵 터지는 내 옆에서 시큰둥한 표정으로 일관한다.  그 모습이 너무 상반되어 두 아이를 한 프레임에 넣고 보는 재미가 있다. 윤쥬리는 세속의 것들에는 별 관심이 없는 아날로그 소녀라 K팝과 K드라마에 열광하는 다른 학생들과는 달리 문학책만 읽는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K문화에 무지하다는 건 황민아도 매한가지.

혹시 모를 퀴즈대회 문제를 대비해 유명한 노래와 드라마는 좀 봐달라고 이 아이들을 채근해야 했다.     


3.

드디어 결전의 날이 왔다.

새벽 6시 반. 학교에서 마련해 준 승합차를 타고 쭐라롱꼰대학교로 향했다. 두 아이의 긴장한 표정이 역력하다. 내 전속 코미디언 황민아가 조용해도 너무 조용하다. 이런 모습, 낯설다.

“긴장할 필요 없어. 그저 즐겨.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아이들에게는 들릴 리 만무한 말이지만 정말 그래 주길 바랐다. 이 아이들을 고1 때부터 보아왔기에 나는 이 아이들의 성정이 어떠한지 잘 알고 있다. 결과가 안 좋으면 우선 “선생님, 죄송해요.”라고 말할 녀석들이다. 나는 이 예의 바른 아이들이 때로는 다른 학생들처럼 얼마쯤은 이기적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대회에 함께 가는 나와 교사 A에게 문제를 좀 내달라는 부탁에 가는 길 내내 이 문제 저 문제를 내고 답하면서 대회장으로 향했다.


쭐라롱꼰대학은 그 명성에 걸맞게 넓은 교내에 웅장하고 세련된 건물들이 가득했다. 잎사귀가 큰 우람한 나무들이 교정의 아름다움에 느낌표를 줄줄이 찍어 놓은 듯 즐비하게 심겨 있어 전체적으로 교정이 푸르디 푸르렀다.

대회 시작보다 이른 시간에 도착한 우리는 교내 식당에서 아침 식사부터 하기로 했다. 식당에 가보니 다른 출전팀들로 보이는 고등학생들이 대학생들과 섞여 밥을 먹고 있었다. 아침 식사를 걸러 허기졌을 텐데 두 아이는 주문한 음식을 깨작거린다.

“대회가 1시 정도에 끝날 텐데 잘 먹어야지.”

이 말도 들릴 리 만무했고 결국 아이들은 반도 못 먹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회장에 들어서니 다른 학교 출전팀 학생들과 인솔교사들로 북적였다.

더욱 긴장한 내 전속 코미디언은 큰 눈만 껌뻑일 뿐 입을 꾹 닫아버렸다. 아는 한국인 교사들이 여기저기 보여 반갑게 인사하느라 나만 신이 난 모양새가 되었다.

대회장은 한국 TV프로그램 ‘골든벨 퀴즈’에서 보던 모습대로 꾸며져 있었다.

출전팀 40팀이 무대 앞 바닥에 착석했고, 인솔교사들은 무대 반대편 맨 뒷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황민아와 윤쥬리가 앉은 자리는 무대 앞 맨 왼쪽 두 번째 줄로 교사석과 거리가 있어 아이들과 눈빛 교환도 어려웠다. 관계자들의 인사말, 한국 학생들의 축하 무대 후 대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4.

1차전은 O, X 퀴즈였다.

문제들이 너무 평이하고 쉬워서 교사 A에게 “선생님! 아니 왜 고2 학생들은 출전 안 시키신 거예요.”라는 핀잔을 수차례 들어야 했다. 내 불찰이다. 퀴즈대회 수준을 알 수가 있어야지. 수준에 상관없이 경험을 선사하는 차원에서 팀을 더 꾸렸어야 했나 보다. 뒤늦은 후회다. 그러고 보니 다른 학교들은 고1, 고2 학생들도 많이 출전시킨 상황이었다.

1차전에서 탈락한 팀은 없었다.


2차전부터 한글로 답을 써야 했다.

첫 번째, 두 번째 문제도 수월했다. 탈락 팀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문제는, 세 번째 문제(였다고 기억한다).

「목걸이를 목에 ( )어요. 전화를 ( )어요. 공원을 ( )어요」에서 공통으로 괄호 안에 들어갈 단어를 쓰는 문제였다.

학생들을 가르친 교사로서 뇌리를 스치는 느낌이 싸했다. 우리 학생들은 ‘공원을 걷다’라는 동사는 잘 알고 있을 텐데 전화를 ‘걸고’ 목걸이를 목에 ‘건다’는 동사는 알고 있는지는 확신이 안 섰다.

하나라도 아는 동사가 있으니 쓸 수 있겠지? 있을까?? 있어야 하는데???

두 아이의 뒷모습에서 망설이는 기색은 먼발치에서도 확연했다.

대회 내내 흥분 상태인 교사 A는 이번에도 학생들 상황을 생중계한다.

“애들이 헷갈리나 봐요. 바로 못 쓰고 있어요!”

벌써 떨어지면 안 되는데. 제발!

“학생들, 답을 머리 위로 들어주세요!”

사회자의 안내에 쭈뼛쭈뼛 화이트보드가 학생들 머리 위로 올라온다.

우리 학생들뿐이 아니라 다른 학생들도 확신이 없는 듯하다.

“정답은, ‘걸’입니다!”

정답 공개에, 이게 웬일. 우리 학생들은 기뻐하는 기색이 없다. 황민아의 뒷모습에서 눈물을 닦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가슴이 철렁. 틀렸구나!

“틀린 학생은 뒷자리로 가세요.”

이 문제가 다른 학생들에게도 어려웠는지 학생들이 자리에서 우르르 일어난다.

어? 우리 학생들은 그대로 앉아있다. 뭐야, 맞았던 거야?

“맞았는데 황민아는 왜 우는 거죠? 어휴, 떨어진 줄 알았잖아요, 저 녀석!”

가슴을 쓸어 내리는 내 옆에서 속아서 분한 사람처럼 A교사가 방방 뛴다.

이 문제에서 40팀 중 10팀만이 살아남았다.

그 후 몇 문제가 더 출제되었고 두 아이는 이제 긴장이 풀렸는지 문제를 맞힐 때마다 화이트보드를 머리 위에 들고 덩실덩실 신나게 흔들어 재낀다.

저래야 황민아지.     



5.

패자 부활전이 있었고 대거 팀들이 기사회생한 상태로 3차전이 시작되었다. 퀴즈 문제들은 학생들과 공부했던 내용의 발뒤꿈치에도 못 미치게 평이했다.

높임말 문제와 어휘 문제가 많았다.

“자, 다음 문제입니다. 다음 문장을 읽고 괄호 안에 들어가는 말을 쓰세요.”

제시되는 문장은, 내 기억으로는 이랬다.

『바깥 날씨가 너무 추워졌어요.

창문을 (  ) 주세요.』


이것도 다 배운 거네. 거참, 안중근, 주몽, 김소월, 김홍도, 발해, 뭐 이런 내용은 안 내주려나.

평이한 문제들에 안심하며 문제 난이도에 혼자 불만을 품던 찰나였다.

“정답은 ‘닫아’입니다!”

진행자의 정답 공개에 어라, 우리 학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아닌가.

탈락석 자리로 가면서 우리에게 ‘열어’라고 쓴 화이트보드를 들어 보인다.

“쟤네들, 위 문장을 제대로 안 읽고 쓴 게 분명해요. 특히 성격 급한 황민아. 아는 걸 틀리다니 어휴 분해!”

또다시 흥분이 폭발한 우리 교사 A.

긴장의 끈이 툭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탈락석 자리에 앉으면서 우리를 돌아보는 학생들 얼굴에 미안함이 가득하다.

나와 A교사는 아쉬운 표정을 감추고는 입 모양으로 ‘잘했어!’라고 소리 없이 말하며 쌍엄지를 들고 마구 흔들어주었다.

(내게서는 더 이상 흥미가 사라진) 대회는 매끄럽게 막바지로 내달렸고 결승 결과 1등 팀은 치앙마이 소재 학교팀, 2~4등 팀은 방콕 소재 학교 팀들이 그 영광을 가져갔다.     



6.

대회가 끝나고서야 각 팀 학생들은 각자 교사들을 찾아왔다.

“죄송해요, 선생님...”

내 이럴 줄 알았지.

“무슨~ 이건 전혀 죄송한 일이 아니야. 너희들, 너무 잘했어. 정말로! 선생님은 너희가 자랑스러워!”

“아는 걸 틀렸어요. 위에 있는 문장을 제대로 안 읽어서.”

“답을 알고 있었던 거지? 그러면 됐어!”

실은 (성격 급하기로는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나도 위 문장을 건성 읽고 ‘얘들이 「열어」 정도는 알겠지’라고 생각했었다는 사실을 교사 체면에 발설할 수가 없다. 목에 칼(그렇게까지?)이 들어와도.     


“뭐 먹고 싶어? 선생님이 쏜다!”

아침부터 허기졌을 학생들과 함께 행사장 근처 한국 음식점을 찾아가 아이들이 궁금해하는 한국 음식들을 시켰다. 삼겹살, 순두부찌개, 떡볶이, 김밥, 비빔밥. 이제야 입이 터진 황민아는 목구멍까지 연 기세다. 편식하는 윤쥬리가 남긴 밥까지 맛있게 흡입했다.    


7.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드디어 마음이 편해진 황민아가 쉴 새 없이 재잘거린다.

“선생님, 오늘 문제 왜 그래요? 올림픽도 없어요(파리올림픽이 막 끝난 시기였으니 양궁 정도는 출제될 줄 알았다). 광복절도 안중근도 없어요(개최날이 광복절 바로 다음날이니 광복절 관련 내용이 하나 정도는 나와야 하지 않나). 뉴진스, 눈물의 여왕도 없어요(보기 싫다는 K팝과 드라마를 봐 달라고 애원까지 했건만). 어려운 거 공부했는데 하나도 안 나왔어요. 쉬운 걸 틀렸어요. 어휴, 너무 아쉬워요, 막막!(태국어로 '너무너무')!”

서시를 다 외운 윤쥬리는 특유의 무표정으로 차창 밖을 보며 ‘저 이것까지 외웠잖아요.’ 하듯 서시를 읊조린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괴로워했다는 그 구절에 내 맘이 움찔했다.

그래그래, 한 달간 혹독한 특훈 아래 엄청난 내용을 머릿속에 꾸역꾸역 집어넣느라 괴로웠겠지.      


“선생님, 그런데요, 저는 한국에 안 가도 괜찮아요. 가보고 싶었던 쭐라롱꼰 대학교에 가봤으니까요.”

“선생님이랑 공부하면서 재미있어요. 찡찡(태국어로 ‘진짜요’)!”

역시 예의 바른 아이들. 어찌 이런 제자들을 애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와~ 창밖 구름이 너무 예뻐요! 용 같아요. 아니, 호랑이인가? 고양이인가?”

아침에 차 안을 가득 채웠던 긴장감이 걷히니 기운이 난 아이들의 수다에 운전기사님까지 허허 크크 신이 나셨다.

난 벌써부터 걱정이다.

너희들과의 특별한 과외수업이 끝이 났으니 이젠 무슨 낙으로 방과 후 시간을 견디나.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건가? A교사 왈, “선생님, 다른 대회가 또 뭐가 있는지 좀 찾아볼까요? 심심해질 게 걱정되네요.”란다.

하하, 초록은 동색이라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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