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이라는 말이 새삼스러울 만큼 인사치레는 필요하지 않던 우리가, 어느새 흔한 안부 말고는 물어볼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렸네. 문득 오늘만큼은 너에게 내 하루는 어땠다는 사소하고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하고 싶더라, 그런 얕고도 깊은 이야기를 하나하나 풀어내면 그걸 곰곰이 듣고 도르륵 눈을 굴리다가 건너편에서 자리를 옮겨와서 나를 안아주던 생각이 나. 그게 내 일상이 되지 못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이래, 나는.
네가 내 곁에 있었을 때마다 나는 그 순간을 박제해버리고 싶었어. 하지만 알고 있었지, 박제한다는 건 심장을 뛰게 하는 안께를 전부 긁어내고 껍데기만을 전시하는 짓이라는 것을. 그리고 네가 없어졌지. 사람의 정신작용이 추상적인 고통이 아니라 생리적인 통증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어. 그때는 그래도 네 잔상이 내 온몸에 남아서 우리라는 형체를 보존해 볼 수는 있었는데. 그런데 시간은 잔인하고 사람은 잊어가더라. 내 망막에서 네 형상이 사라지고 고막 안에 감금되었던 네 목소리가 흐려질 때는 안도했어. 이제야 나는 하루를 버티지 않아도 흐르도록 내버려 둘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데 점점 더 잊어가더라고. 사진으로는 제대로 담기지 않았던 네 얼굴, 네가 입안에서 굴리던 내 이름, 민들레 꽃씨처럼 번지는 미소. 그런 기억들이 모서리부터 둥글어지고 오래된 필름처럼 마모되었어. 그게 견딜 수 없어져서, 사랑, 그리움, 외로움, 그 무엇이라도 너의 부스러기가 내 안에 남아있어야 할 것 같아서, 그때에서야 내 심장을 도려내서 포르말린에 담가버렸어.
일 년 하고도 반이 좀 넘게 지났는데 이제야 발걸음이 조금 가벼워졌어. 그리고 그 발걸음을 매주 두 번씩 해부 실습실로 옮기지. 포르말린에 절인 카데바에 머리를 박고 눈이 시릴 때까지, 인두가 따끔거려서 문득 토하고 싶을 때까지 사람 몸을 파고들어. 포르말린에 보존된 심장을 꺼내고, 막을 벗기고, 그 단단한 근육을 자르는 순간, 그래서 심장의 방을 확인하던 그날에, 나는 내 심장도 포르말린에서 꺼냈어. 포르말린은 단백질의 구조를 완전히 바꾸어놓고 그걸 그대로 고정해 버려서, 한때는 온몸에 붉은 피를 돌게 했던 펌프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딱딱하게 그걸 굳혀놔. 포르말린은 1급 발암물질이야, 그걸 공기로 들이마시는 나도 십 년은 수명이 짧아진 것 같다고 생각할 만큼 지독한 거였어. 그거에 담긴 심장이, 죽은 거랑 다를 게 뭐가 있겠어. 그 안에 담긴 너마저 이미 죽어버린 걸 이제는 알아. 그래도, 이제는 괜찮다고 말해보려고,
심장을 창가에 내놨어. 바람 좋은 날 봄냄새가 스며들고, 여름비가 촉촉이 적시고, 가을 낙엽이 살며시 스치고, 함박눈이 소복이 쌓이면, 그렇게 계절이 몇 번 가면, 그러면 다시 심장이 말랑말랑해질지도 몰라. 나는 그동안 이 헛헛한 가슴으로 살아내 볼게. 너를 닮은 사람도, 너와 완전히 다른 사람도 만나지 않을 거야. 너를 생각하지 않다 보면, 너를 떠올리지 않아도 누군가가 내 가슴에 들어찰 수도 있으니까. 가슴이 비었으면 비어있는 대로, 벅차오르게 뛴다면 또 그대로, 그냥 그렇게 살아보려고 해.
이게 내가 쓰는 마지막 편지일 거야. 이제껏 하나도 보내지는 않았었는데, 이거 하나는 보내볼까, 하는 생각도 있어. 네 말대로, 모두가 자신의 워라밸을 지키는 지구 반대편 나라의 비효율성에 한번 내 운을 맡겨볼까? 너에게 닿는다면 닿는 대로, 닿지 못하고 스러진다면 또 그대로. 그게 어떤 방식이라도, 어쨌든 끝은 끝이니까.
나는 잘 지낼 거야. 너도, 네 심장도 안녕했으면 좋겠어.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