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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과몰입오타쿠 Dec 14. 2023

좀비 타워, 이곳은 우리의 유토피아입니다.

웹툰 <위아더좀비>가 보여주는 청년 문제, 그리고 청년 문화


초대형 쇼핑몰 서울타워에 좀비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하고, 진압을 위해 정부는 서울타워를 봉쇄한다. 주인공 김인종은 탈출하지 못해 좀비와 함께 타워 안에서 1년을 살아간다. 그리고 타워에는 각양각색, 저마다의 이유가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몰래 숨어 산다. 이들은 왜,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고 스스로를 격리시키고 있었을까.     


주인공 인종은 할머니 손에서 자란 청년이다. 대학 역시 다니지 않는다. 각종 아르바이트만 전전할 뿐이다. 인종의 장래희망은 단순했다. 평범한 사람. 이것이 인종의 장래희망이었다. 평범함을 꿈꾸는 인종은 타워 안에서 정반대의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생활을 이어간다. 대표적인 인물로 경업이 있다. 경업은 부모님 권유로 의대에 입학하지만 학문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결국 군대로 도피하지만 특유의 남성중심적 문화에 적응하지 못한 경업은 부적응자로 낙인 찍히고, 좀비 사태가 발생한 틈을 타 탈영을 하게 된다. 이 외에도 인종의 무리에는 나이도, 직업도, 성향도 모두 다른 사람들이 존재했다. 꿈이 없는 고등학생, 명문대를 졸업했지만 우울을 가지고 있는 공무원, 소심한 성격 탓에 할 말을 다하지 못하는 대학생, 손이 느려 구박 받는 카페 알바생 등. 저마다의 고충을 안고 있었다. 공통점이 전혀 없어 보이지만, 이들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연결고리가 있다. 바로 청춘이라는 것.    

  

<위아더좀비>는 청춘과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청춘이라 하면, 응당 캠퍼스가 먼저 떠오르기 마련이다. 벚꽃과 사랑, 열정, 동기들과 밤새 기울이는 술잔, 그리고 동이 트고서야 파하는 술자리! 우리의 청춘은 그런 것이다. 그러나 청춘이라고 해서, 모두가 벚꽃 만개한 캠퍼스를 거닐고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일찍이 노동의 현장에 뛰어들고, 또 누군가는 숱한 고뇌의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무언가를 향한 열정이 존재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과연 그동안의 대중문화는 ‘그렇지 않은’ 청춘들을 재현해왔던가. 지배적 가치에서 벗어난 청춘은 대중문화 속에서 배제되어 왔던 것은 아닌가. 그동안 우리의 대중문화는 '소수'의 대학생만을 ‘청춘’의 대상으로서 묘사하고 있었다. 이 지점이 바로 우리가 <위아더좀비>에 주목해야 할 이유다. 


작품 속 인물들은, 여태 대중문화가 묘사했던 ‘청춘’과는 사뭇 다르다. 사랑과 낭만. 이런 단어들과 거리가 멀다. 어딘가 ‘하자’가 있는 이들이 모여 서사를 주도해 나간다. 마음 속 우울을 다스리고자 좀비 소굴로 들어온 명문대 출신의 공무원.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며 다른 친구들과 달리 꿈을 찾지 못한 고등학생. 남들보다 행동이 느려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지냈던 직장인. 일찍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주인공 인종 등. 이들은 모두 좀비가 득실거리는 서울타워로 모인다. 이렇듯 <위아더좀비>는 여태 대중문화가 다루지 않았던 청춘들이 주인공이 된다. ‘좀비’라는 허구성을 더한 작품이지만, 인물들의 고충은 마냥 픽션이 아니었다. 작품 밖의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이었다. <위아더좀비>는 청춘들의 다양한 삶과 고민을 솔직하고 담백하게 서술한다. 하지만 그동안의 대중문화는 청춘을 그저 '대학생'으로 묶고 있었다. 청춘과 청년이라는 개념 속에 존재하는 다양성은 배제한 것이다. 이와 달리 <위아더좀비>는 청춘을 면밀하게 들여다 보며, 그 안에 속한 다양한 청년들의 이야기에 주목했다. 


덧붙여 이 작품은 좀비 아포칼립스 답지 않게, 느긋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갖는다. 주인공들에게 서울타워는 결코 디스토피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좀비가 득실거리는 타워 안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타워는 세상으로부터 상처받은 청년들의 도피처가 되어준다. 즉, 타워 밖의 ‘현실’이 청춘들에겐 디스토피아였던 셈이다. 현실이라는 재난에서 벗어나, 타워 안에서 타인과 소통하며 회복의 시간을 갖는다. 청년을 고립시키는 사회를 비판하는 동시에 청년을 대변하고, 청년에게 위로를 건네는 작품이었다.     


요약하자면, <위아더좀비>는 다양한 청년들의 모습을 묘사했다. 나를 재현하고 대변하는 대중문화라니! 누군가는 그동안 대중문화를 향유하며, 이 작품을 통해 처음으로 소속감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에게는 분명 선물같이 찾아온 작품이었을 것이다. 그동안의 대중문화가 제시했던 청춘의 모습만이 결코 정답은 아니라는 것. 바로 이 점을 <위아더좀비>가 제시했다. 그리고 이것은 곧 대중문화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기도 하다. 기득권, 혹은 주류 집단만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곳곳을 조명해야 한다. 대중문화가 우리의 삶에 스며든 이상, 대중문화는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존재를 품고 다양한 목소리를 전할 책임이 있다. 대중에게 소외와 배제의 감정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소외와 배제는 결국 차별과 혐오를 낳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위아더좀비>와 같은 대중문화가 우리에게는 더욱 필요하다. 다양한 집단의 모습을 재현함으로써, 세상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작품. 아름다운 세상으로 가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그리고 이 글을 통해 전하고 싶다. <응답하라>의 나정이 같지 않아도 된다. <치얼업>의 도해이가 아니어도 괜찮다. 하지만 그들과 마찬가지로 당신 역시 틀림없는 청춘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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