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수면의 과학〉(2006) 속 렘수면행동장애
슬립X라이브러리는 우리 일상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수면에 관한 상식과 오해에 관한 이야기를 담습니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영화 〈수면의 과학〉(2006) 속 렘수면행동장애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스테판(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배역)의 꿈에선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꿈속에서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 활동했던 듀크 엘링턴의 공연을 보러 가기도 하고, 그를 면박 주었던 직장 상사를 창밖으로 던져버리기도 하죠. 그가 짝사랑하는 스테파니(샤를로뜨 갱스부르 배역)와 웨딩 촬영도 찍습니다. 물론 그가 원하는 대로 꿈에 다 반영되는 건 아닙니다. 스테판의 오랜 무의식과 기억, 소망 또한 기이하게 변형되어 나타납니다. 양손이 몸보다 커진다든지, 매일 사용하던 면도기가 괴상한 벌레로 변한다든지, 알 수 없는 이유로 경찰에 쫓긴다든지 등 현실에선 실현 불가능한 온갖 일들이 그의 꿈속에서 일어나죠.
〈이터널 선샤인〉 〈무드 인디고〉 등으로 유명한 미셸 공드리 감독의 영화 〈수면의 과학〉(2006)은 스테판의 꿈의 세계를 그린 작품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꿈과 현실을 매일 혼동하며’ 사는 스테판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죠.
여섯 살 때부터 꿈과 현실의 경계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살아온 ‘드리밍 보이’ 스테판의 일상은 수시로 꿈과 뒤섞입니다. 그러다 보니 꿈속의 행동을 그대로 옮기는 실수도 저지릅니다.
꿈속에서 욕실에 앉아 목욕하며 횡설수설 쓴 쪽지를 이웃 스테파니네 대문 아래 밀어 넣은 그는 꿈에서 깨어난 뒤 스테파니네로 향하는 물 묻은 자신의 발자국들을 발견하곤 화들짝 놀랍니다. 그는 스테파니네 문 앞으로 다시 몰래 가서 옷걸이로 종이를 빼내는 데 성공하지만, 안타깝게도 스테파니는 그사이 쪽지를 이미 읽고 있었죠. 그러다 문틈으로 옷걸이 철사가 들어오는 걸 보고 그녀는 종이를 몰래 제자리에 둡니다. 스테판은 그것도 모르고 편지를 회수한 것에 안도했지만요.
스테판의 실수는 계속됩니다. 하루는 꿈에서 문을 박차고 나갔는데, 깨어보니 진짜로 대문을 활짝 열고 나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때마침 집에서 나오고 있던 스테파니를 보고 스테판은 여전히 꿈속인 줄 착각한 채 거침없이 말합니다. “나랑 결혼해줄래?” 그의 꿈속에선 현실과 달리 스테파니가 스테판을 더 좋아하고 있었으니 그런 말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었죠. 하지만 스테파니는 당황스러워할 뿐입니다. 그러니 대답은 당연히 “NO”였고요.
사실 스테판만큼은 아니더라도 꿈속에서의 행동을 그대로 옮기다 놀라 깨어나는 분들이 실제로 꽤 있습니다. 여러분도 한 번쯤 경험해보셨을지 모릅니다. 예를 들어 꿈속 상황을 실제로 혼동해 손을 꽉 움켜쥐거나, 팔을 휘두르고 주먹질하거나 발로 차는 행동 등이 있는데요. 꿈속에서 팔다리를 심하게 움직이며 싸웠는데 일어나 보니 옆에 자고 있던 배우자를 정말 때리고 있었다든지 했던 적 혹시 있으신가요? 렘수면행동장애가 있는 환자들의 꿈 내용이 공격적인 경우가 정상 군에 비해 많다는 연구 결과도 있는데요. 이 같은 환자들은 결국 수면의 질이 낮아지고 우울감이 심해 전반적인 삶의 질이 떨어진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렘수면행동장애는 렘수면(REM) 단계에 원활히 잠들지 않을 때 나타나는 질환입니다. 수면 도중 우리 뇌는 렘수면과 비렘수면(NREM) 단계가 서로 짝을 이루어 4-5번가량 반복되는데, 수면의 4분의 1 정도를 차지하는 렘수면 단계에서 꿈을 꾸게 됩니다. 렘수면 동안 우리 뇌는 깨어 있을 때와 거의 동일하게 활동하지만 눈과 호흡근을 제외한 모든 근육이 긴장도를 잃는 상태가 됩니다. 하지만 렘수면행동장애가 있으면 근육의 긴장상태가 지속되어 꿈속의 내용대로 몸을 움직일 수 있죠.
윤인영 분당서울대병원 정신의학과 교수는 “렘수면행동장애는 특히 50대 후반-60대에 유병률이 높은 편”이라며 “60대 이상 인구의 2퍼센트 정도가 이 질환을 갖고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라고 전합니다. 윤 교수는 “렘수면행동장애는 뇌 퇴행성 변화가 병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질환이기에 그냥 두면 파킨슨병 혹은 치매로 진행될 수 있다”라고 경고하기도 합니다.
렘수면 단계는 여러모로 중요합니다. 이 단계에서 숙면을 취할 수 있어야 잠들기 전 학습했던 내용도 더 잘 기억할 수 있고요. 렘수면이 부족하면 신체적, 정서적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최근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발표한 한 수면 관련 논문에 따르면 “렘수면이 5% 짧아지면 심혈관계 질환 발병 및 조기 사망 위험이 13~17%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죠.
꿈 때문에 잠을 설치지 않으려면 수면 생활 습관부터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수면과 기상 시간을 규칙적으로 정해두고, 밤늦게 흡연하거나 카페인 음료, 알코올 등을 섭취하는 것은 피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 외에도 조명과 침구 등 숙면을 유도할 수 있는 수면 환경을 구축하는 것 또한 렘수면을 늘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방법들에도 효과를 보지 못했다면 근본적인 원인을 찾기 위해 병원에서 수면다원검사를 받아보셔야 할 테고요.
스테판은 사실 꿈과 현실의 넘나듦이 워낙 자유로워 렘수면행동장애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몽유병(수면보행증)으로 볼 수도 없습니다. 몽유병은 비렘수면(NREM) 단계에 일어나는 각성장애이기 때문에 꿈과 현실을 오가는 스테판의 사례와는 확실히 맞지 않죠. 스테판에게 수면장애 병명을 애써 붙여주기보다, 영화적 상상력으로 감상하고 넘어가는 게 좋을 듯합니다.
하지만 그가 꿈속의 행동을 현실에서 그대로 옮겼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스테판은 스테파니와 꿈을 공유했다고 믿고 있죠. 그는 자신이 스테파니의 문틈으로 끼워 넣었다 도로 빼내었던 쪽지 내용을 스테파니가 다 알고 있자 깜짝 놀라며 동료에게 말합니다.
“내가 꿈에서 쓴 전하지도 않았던 편지를 그녀가 읽었어요. 어떻게 읽었는진 몰라도 나에게 직접 말해주더라고요. 내 편지를 다 외우고 있었어요. 어떻게 그런 줄 알아요? 그건 바로 우리 뇌에 연결고리가 생성됐다는 뜻이에요.”
스테판의 상상력은 끝이 없습니다. 그는 REM(Rapid Eye Movement, 급속 안구 운동) 수면 단계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눈동자를 통제하면 꿈의 내용을 바꿀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감은 눈꺼풀 위로 기다란 막대기를 테이프로 붙여 그 끝을 여러 물건들과 연결해둔 채 잠을 청하기도 하죠.
하지만 꿈이란 우리의 무의식과 더불어 기억과 경험, 뇌의 무작위적 자극 등 다양한 원인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 밖의 것이죠. 영화 〈인셉션〉이나 〈수면의 과학〉 속 스테판의 상상처럼 꿈을 직접 설계하고 조작하는 일은 아쉽게도 현실 세계에선 아직 불가능합니다. 물론 언젠가 가능해질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