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이슬립 Jun 20. 2022

나도 혹시 기면증...? 갑자기 잠이 쏟아질 수 있나요

영화 〈아이다호〉(1991) 속 기면증 이야기



Editor's note

슬립X라이브러리는 우리 일상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수면에 관한 상식과 오해에 관한 이야기를 담습니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영화 〈아이다호〉(1991) 속 기면증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사진 출처 : 영화 <아이다호> 공식 예고편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영어 사전의 한 페이지가 화면을 한가득 채웁니다. 알파벳 ‘n’으로 시작되는 여러 어휘 목록 가운데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단어 하나가 눈에 띕니다.


narcolepsy : a condition characterized by brief attacks of deep sleep 

(기면증 : 수면 발작이 나타나는 병)


곧이어 아이다호의 드넓은 초원 사이에 뻗어 있는 텅 빈 도로로 장면이 전환됩니다. 그곳에서 마이크(리버 피닉스 배역)는 끝도 없이 펼쳐진 도로를 응시하며 천천히 왔다갔다 하죠. 눈을 무겁게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면서요. 그러다 갑자기 발작이라도 일으키듯 팔다리를 파르르 떨더니 길가에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듭니다.


마이크는 그 뒤로도 예상치 못한 순간 순식간에 잠의 소용돌이로 빠져듭니다. 신호등을 기다리며 서 있다가도 곧바로 쓰러져 잠이 드는가 하면, 식당에서 친구들과 밥을 먹다가도 불현듯 픽 쓰러져 잡니다. 포틀랜드 사창가에서 몸을 팔며 하루하루를 보낼 때도 마찬가지였죠. 친구들은 그런 마이크를 향해 “이러면서 사는 게 신기할 정도”라며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그가 쓰러졌을 때 제일 먼저 달려가 챙겨주는 친구는 스콧(키아누 리브스 배역)뿐이었습니다. 스콧은 친구들에게 설명해줍니다.


“얘 병 때문에 기절한 거야. 기면증은 뇌의 화학 반응으로 일어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발작하는 거지.”


위의 내용은 모두 영화 〈아이다호〉(1991)에 나오는 장면들입니다. 영화 〈굿 윌 헌팅〉 감독으로도 유명한 구스 반 산트의 명작 〈아이다호〉는 뛰어난 연출과 작품성은 물론, 영화에 등장하는 매력적인 배우들 덕분에도 오래도록 사랑받고 있는 작품입니다. 특히 젊은 날의 풋풋한 키아누 리브스와 배우 호아킨 피닉스의 형이기도 한 리버 피닉스를 볼 수 있는 귀한 영화죠. 리버 피닉스는 안타깝게도 영화가 개봉한 지 2년 뒤 약물 과다 복용으로 만 23세의 나이에 사망했지만요.


사진 출처 : 영화 <아이다호> 공식 예고편


리버 피닉스가 〈아이다호〉에서 연기했던 마이크도 극중 마약을 종종 즐겼지만 마이크는 약물 중독이 아닌 기이한 수면장애에 시달리며 고생합니다.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잠 때문에 일상을 제대로 살아나가기 힘들 정도였죠. 도대체 마이크에게는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걸까요.


영화의 첫 장면, 그리고 스콧의 대사로도 이미 눈치 채셨겠지만 마이크에겐 ‘기면증’이 있었습니다. 기면증은 밤중에 7시간이 넘도록 충분한 수면을 취했음에도 주간에 참을 수 없는 졸음이 쏟아지는 수면장애입니다. 기면증의 발생 원인은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현재로선 중추신경계에 있는 ‘히포크레틴’이라는 각성 물질이 제대로 분비되지 못하는 경우 나타나는 질환이라는 가설이 가장 유력하죠. 히포크레틴이 부족하면 낮에 각성 상태를 유지하기가 어려워 진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반대로 이 물질이 뇌의 시상하부에 너무 많이 분비되면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고요.


기면증이 있으면 마이크처럼 멀쩡히 잘 있다가도 급작스럽게 온몸에 힘이 빠지며 잠들 수 있습니다. 보통은 ‘졸리다’는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 뒤 실제로 잠이 들기까지 약간의 텀이 존재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기면증 환자들은 그 텀이 극도로 짧다고 할 수 있죠.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에 수면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겁니다.


실제로 평소 몸의 힘이 갑자기 빠지는 ‘탈력 발작’이 자주 발생하거나 만성피로로 시달리는 분은 기면증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위눌림 등의 수면마비를 자주 겪는 분들도 마찬가지고요. 주간졸림증(수면발작)이나 탈력발작(졸도발작), 수면마비는 모두 기면증의 주된 증상에 해당됩니다. 수면 상태에 들어갈 때 환시나 환청이 동반되는 것(입면환각)도 마찬가지고요. 영화에서 마이크가 잠이 쏟아지기 직전 환각을 통해 행방이 묘연한 그의 엄마를 자주 보았던 것도 그때문일 겁니다.


기면증을 치료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수면 패턴을 일정하게 유지시키는 일입니다. 그 외에도 식이 조절, 약물 복용 등 다양한 행동요법과 약물치료가 병행되어야 하죠. 증상이 심한 경우 병원에서 정교한 검사와 처방을 받아봐야 함은 물론입니다.


마이크의 기면증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에겐 시련만 계속됐죠. 마이크는 그를 버리고 떠났던 엄마를 찾아 고향 아이다호를 다시 찾지만, 엄마는 이미 로마로 떠나버린 뒤였죠. 게다가 이복형으로 알고 있던 형이 사실은 그의 아버지였다는 사실까지 거듭 확인했고요. 마이크의 애정전선도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스콧을 친구 이상으로 사랑했던 마이크는 스콧과 함께 엄마를 찾아 로마로 떠나지만, 스콧은 그곳에서 만난 여자(스텔라)와 사랑에 빠지고 맙니다.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었던 스콧은 이후 미국으로 돌아와 유산을 물려받고 스텔라와 결혼합니다. 마이크는 로마에서 엄마도 만나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도 잃은 채 포틀랜드로 돌아와 예전처럼 부랑자로 지내고요.


하지만 마이크가 스콧보다 실패한 인생을 살게 되었다고 단정하긴 어려워 보입니다. 영화가 거의 끝나갈 무렵, 스콧과 마이크는 공동묘지에서 다시 마주칩니다. 그곳에선 두 개의 장례 예식이 진행되고 있었죠. 하나는 스콧의 아버지 장례식이었고, 다른 하나는 스콧에게 배반당해 슬퍼하다 죽은 부랑자 밥의 장례식이었습니다. 마이크는 밥의 장례를 위해 와 있던 것이었고요. 말쑥한 양복을 차려입고 스텔라와 정숙한 분위기의 장례 의식에 참여하고 있던 스콧은 시끌벅적한 밥의 장례식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봅니다.


밥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며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하고, 밥의 이름을 하늘 높이 외치며 악을 쓰는 부랑자들 사이에서 그는 마이크를 발견합니다. 마이크는 동료들과 밥의 이름을 여러 번 큰 소리로 외쳐대며 그만의 방식으로 애도를 표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스콧을 향해 무언가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는 듯 씩 웃어보입니다. 이는 그야말로 진한 여운을 남기는 미소였죠.


영화가 끝나기 직전, 마이크는 다시 처음과 같은 장소에 서 있었습니다. 아이다호의 삭막한 초원을 배경으로 뻗은 텅 빈 도로 위에서 마이크는 말합니다.


사진 출처 : 영화 <아이다호> 공식 예고편


“나는 길의 감별사야. 나는 평생 동안 길을 맛봐 왔어. 이 길은 절대 끝나지 않아. 이 길은 아마도 온 세상을 돌고 돌겠지.”


이 말을 끝으로 마이크는 또다시 사지를 파르르 떨다 쓰러지며 잠에 빠져듭니다.


마이크의 남은 삶에 펼쳐진 길도 그리 순탄치만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그는 곧 잠에서 다시 깨어나 자신만의 길을 계속 걸어갈 것입니다. 비록 마이크 역을 맡은 리버 피닉스는 너무 일찍 세상을 떴지만, 영화 속 마이크만은 지금도 어디선가 잘 살아가고 있기를 희망해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대체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진짜인가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