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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린이맘 May 02. 2022

본캐는 나이고 부캐는 엄마입니다만

나를 잃지 않으며 육아하기의 시작

백일이 지나가고 엄청난 후유증이 찾아왔다. 백일을 치른 피곤함이 아닌 목표가 사라지며 생긴 마음의 공허함 때문이었다. 남편이 출근하면 아이를 안고 펑펑 우는 날들이 일주일 가까이 이어졌다. 하루 종일 아이와 씨름해야 하는 나는 회사로 도피(?)해버린 남편의 모습이 야속하기만 했다. 도피처라고 표현한 이유는 집을 나서면 그래도 육아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이 무척이나 부러워서였다.


당시 아이는 무조건 안아 재워주길 원했다. 하루에 4~5번 자는 아이를 안고 재우면서 체력은 점점 바닥이 났다. 바닥난 체력은 마음마저 우울감으로 물들였다. 아이를 안고 있으면 포근했고 엄마가 된 느낌을 만끽할 수 있었지만 점점 체력이 부쳤다. 엄마의 품에서 잠드는 맛을 알아버린 아이는 더 이상 여기에서 만족감을 느끼지 못했다. 안아서 등을 토닥여주어야 했고 집안을 걸어 다녀야 했고 둥가둥가 어르는 소리를 내야 했으며 완전히 잠에 들고 나서 침대에 내려놓아야 했다. 이 모든 행위는 적절하게, 조화롭게 이루어져야 비로소 끝이 났다.


잠으로 가는 숭고한 의식을 치를 때마다 힘들고 지쳤지만 새근새근 자는 아이를 보면 잠시 힘든 마음 사르르 녹기도 했다. 아이가 잠들고 나면 아이를 돌보는 데에 필요한 최소한의 인 젖병소독, 빨래, 장난감 소독만 하고 그대로 뻗어버렸다. 아이가   오래 자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집안일은 하면 티도 안 나지만 안 하면 더 크게 표가 나는 법이다. 어질러진 집안꼴이 마치 현재 내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엉망진창이 된 집을 보며 마음은 불편했지만 약간의 불편함만 감수하면 몸은 편했다. 나를 일으키는 건 오로지 아이의 울음뿐이었다.


남편의 퇴근시간은 나에게 유일한 숨통이었다. 아이의 투정과 울음을 혼자서 감당하지 않아도 되니까. 완전한 내 몫이 아닌 온전한 우리의 몫이 되니까. 남편은 퇴근하면 늘 “오늘은 어땠어?”라고 묻곤 했다. 어제에 비해 오늘은 좀 괜찮냐고 위로하는 일종의 남편의 배려심이 깃든 말이기도 했다.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아니 글쎄 오늘 런린이가 응가를 다섯 번이나 한 거야. 하루에 다섯 번은 좀 많지 않아?  화장실 들락날락하면서 기저귀 갈다가 하루의 절반은 보낸 것 같아. 유산균 먹는 양을 줄여야 하나? 다섯 방울 먹이라는데 아무래도 세 방울로 줄여야겠어.

“그래도 못 싸는 것보다 낫지. 근데 여보는 오늘 어땠어?”

“응? 나는 오늘 어땠냐구?”


남편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아이가 아닌 나의 안부를 묻는 물음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아이를 돌본다고 스스로를 방치해버린 내 자신이 부끄러워서였다.


출산을 하고 삶의 중심은 아이로 옮겨졌다. 나의 일은 엄마로서 아이를 돌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아이가 태어난 이상 아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을 텐데 그럼 이제 내 인생은 끝난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아니었다. 나의 삶이 전부라면 아이는 그 중 한 부분이 되어야 했다. 엄마라는 하나의 역할이 추가로 부여된 것이고 그 중심에는 나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의 인생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내 인생도 중요하다. 아이를 핑계로 나를 잃지 말자. 나를 돌보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말자. 본캐는 나이고 부캐는 엄마가 된 셈이니 말이다.


평소와 다를 바 없던 남편의 질문이었지만 백일 후유증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나를 꺼내주었다. 나를 잃지 않기 위해 지금의 나를 잊지 않기 위해 그렇게 다시 글을 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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