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그리운 나의 할머니
오늘 남편과 아이와 함께 할머니를 만나러 갔다. 코로나와 임신, 출산 때문에 쉽게 만날 수 없었던 할머니와의 만남. 만남이 이루어지기까지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할머니는 내가 임신기간 동안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으시다 요양병원에서 2개월을 보내시고 지금은 간병인과 함께 집을 얻어 살고 계신다. 친정엄마는 할머니가 아프다는 소식을 전해주지 않으셨다. 행여 할머니께서 잘못되실 수도 있으니 임신한 나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다행히 할머니는 거동도 혼자 하실 수 있을 만큼 지금은 많이 나아지셨다. 아이의 백일이 지났을 때 엄마는 조심스럽게 할머니가 많이 아프셨다는 사실을 알려주셨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아이를 돌보고 아이만 생각하느라 미처 할머니라는 존재는 마음 저 편 구석으로 밀려나있었다. 때로 할머니가 보고 싶고 그립기도 했지만 당연히 잘 지내고 계시리라는 어떤 확고한 믿음이 있었는데…. 그동안 할머니를 병간호하며 임신한 딸을 챙기느라 힘들었을 엄마를 생각하니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엄마는 할머니를 뵈러갈 때마다 아이의 사진을 보여드린다고 한다. ‘고 녀석 잘생겼네. 아빠랑 엄마를 반반씩 닮았어.’ 사진을 볼 때마다 할머니의 눈은 또렷해지고 손으로는 핸드폰 액정을 만지며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할머니에게 얼른 아이를 보여드리고 싶었지만 조금 더 아이가 크면 뵈러 가자는 엄마의 말에 미뤄오다 드디어 만남이 성사되었다. 계속 미루다가 어쩌면 불발된 만남으로 그칠까 두려움에 조급함이 앞설 때 이루어진 만남이다. 날씨도 제법 풀렸고 아이도 이제 8개월이나 되었으니 가도 되겠다고 생각해 약속을 잡았다. 며칠 전부터 할머니와의 만남이 기다려졌다. 아이를 보여드리는 첫 만남인 만큼 더 기대가 되었다. 그동안 얼마나 보고 싶으셨을까. 보고 싶지만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우는 손녀를 배려해 보고 싶다는 말도 쉽게 꺼내지 않으셨을 테다.
집에서 아이에게 이유식을 먹이고 간단하게 짐을 챙겨 차를 타고 할머니네 집으로 갔다. 친정엄마와 아빠가 마중 나와 계셨다.
“할머니!”
그토록 불러보고 싶었던, 만나고 싶었던 할머니. 예전과 다르게 살도 많이 빠지시고 머리에는 흰 눈이 더욱 수북하게 내려앉아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더없이 푸근하고 자상하고 언제나 미소로 나를 맞아주는 할머니. 바라만보아도 마음이 편안하고 따뜻한 할머니의 품. 아이를 안은 채 할머니에게 아이를 보여드렸다.
“할머니! 아이랑 같이 왔어요. 너무 귀엽지? 예쁘지?”
“응. 그래. 사진으로 많이 봤어. 너무 예쁘다. 아이 키우느라 애쓴다.”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
눈에서 눈물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했지만 눈물이 터지면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울 것 같아 애써 꾹꾹 눈물을 참았다. 낯을 가릴 줄 알았던 아이는 신기하게 할머니의 무릎까지 기어서 갔다. 그동안 자신을 기다렸을 할머니의 마음을 아는 걸까. 그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함과 동시에 만감이 교차했다. 생애 첫 시작점에 서 있는 아이와 어쩌면 생애 마지막 지점에 서 있을지도 모르는 할머니. 그 중간 어디쯤에 서있는 나. 생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이 동시에 교차되어 오는 느낌이었다.
할머니는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세장을 꺼내 아이에게 용돈을 주셨다. 꼬깃꼬깃 구겨진 돈. 만날 날만을 기다리며 할머니는 연신 용돈을 꺼내보고 잃어버리지 않으려 주머니 깊숙한 곳에 넣어두셨을 테다. 보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용돈을 꺼내보고 애타는 마음을 꾹꾹 눌러 담을 테다. 할머니의 용돈이 항상 꼬깃꼬깃했던 이유.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아마 이 돈은 평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아니 평생 잊지 않고 기억하며 살아갈 것이다.
긴 기다림에 비하면 짧은 만남이었지만 인생에서 잊지 못할 순간이 되었다. 바라건대 할머니가 오래도록 우리 아이가 자라는 것을 보셨으면 좋겠다. 할머니에게도 생에 잊지 못할 순간에 나와 아이, 남편이 있기를 바란다. 나에게 할머니가 주셨던 사랑을 잊지 않고 또 다른 사랑을 통해 할머니에게 큰 기쁨을 드려야겠다. 너무 늦지 않게 또 다시 할머니를 뵈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