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탈날 탈> - 서보형 감독
현관 불을 켜면 현관이 밝아지고, 우리 집 문을 열면 우리 집이 나와야 한다. <탈날 탈>에서는 너무 당연해서 인지조차 하지 못했던 인과관계들이 어긋남에 기묘함이 흐른다. 그러나 익숙한 인과관계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불안감이 고조되고,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의 연속에 혼란스러워할 때, 영화는 문득 우리에게 저울질하게 한다. 낯섦에서 오는 불안함이 정말로, 지루하게 반복되는 익숙함보다 더 두려운 것이냐고.
새벽 어스름이 갤 무렵 집에서 잠을 자는 주인공은 평범해 보인다. 이 평화로울 만큼의 평범함은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의해 깨지고 만다. 이후로 영문 모를 기이한 현상들이 이어진다. 화장실 불을 켜니 텔레비전이 켜지고, 텔레비전을 끄고자 리모컨 버튼을 누르면 여행 패키지를 구매했다는 문자 메시지가 도착한다. 택배를 받으러 문밖으로 나갔다가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아랫층에 도착해있다. 다시 제 층을 찾아 문을 여니 낯선 사람이 자신의 아내라며 문을 연다. 영화는 당연하고 사소한 현상들을 조금씩 비틀어 효과적으로 기묘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그러나 이런 현상들보다도 더욱 이상한 것은 이를 대하는 주인공의 태도이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깰 때부터 모르는 여자가 자신의 아내처럼 말을 걸어올 때까지 주인공은 한 번을 놀라는 법이 없다. 왜 이런 이상한 현상들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질문하지도 않는다. 공포영화의 주인공들은 대개 두려움을 느끼고 벗어나고자 애쓰면서도 결국 공포감에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관객을 몰입시키는데, 이 주인공은 다르다. 알 수 없는 이 현상들을 두려워하거나 적극적으로 그들에게서 벗어나고자 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주인공에 대해 아는 거라곤 그가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 뿐이다. 낡은 복도식 아파트의 작은 방에 살며 냉장고에는 배달 음식의 흔적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영영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일상에 숨 막힌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에겐 일상이 어긋나는 데서 오는 두려움보다 반복되는 익숙함에서 벗어난 시원함이 먼저였는지 모른다. 켜지도 않은 텔레비전에서 여행 상품 패키지가 나올 때, 주인공은 불쾌해하거나 귀찮아하는 대신 정신을 잃은 것처럼 광고에 집중한다. 칙칙한 복도식 아파트와는 거리가 먼 눈부시게 파란 바다와 해변에 시선을 빼앗기는 주인공은 어딘가 벗어날 곳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처음 보는 아내의 누운 등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천장 조명은 주인공의 머리 바로 위에 배치되어 빛을 아래로 비춘다. 마치 주인공을 빨아들이는 비행접시 같다. 비행접시가 자신을 먼 우주로 데려가듯 원래의 일상에서 떨어져 나가는 불가사의한 상황을 주인공은 조명 아래 가만히 서있는 것처럼 온순하게 받아들인다. 그저 이 낯선 아내가 시키는 대로 덤덤하게 침대에 누울 뿐이다.
탈날 탈은 머리두에 정지할 지가 결합되어 쓰인다. 생각함을 멈추었다는 영화의 제목은 탈이 난것처럼 이상하고 기묘한 현상들이 아니라 이 이상함에 대한 의심을 멈춘 주인공을 가리키는 것 같다. 마지막에 주인공이 아내에게 물어보려고 한 말은 무엇이었을까. 왠지 아내를 포함해 그에게 일어난 모든 이상한 현상들에게 던진 의문은 아니었을 것 같다. 낯섦보다 더욱 두려운 것은 벗어날 수 없는 익숙함일지 모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