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술관의 변명> - 김한범 감독
예술가는 괴리에 고통받는 사람들이다. 뜻하는 것을 자유롭게 펼치길 원하지만 치열한 예술계에 발을 들이려면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미술관에서>는 무성 코미디 식의 풍자로 이런 이상과 현실의 불일치를 그리며, 양계장을 빠져나올 수 없는 암탉 같은 예술가들의 현실을 알린다.
주인공이 겪는 예술가의 괴리감은 크게 두 가지로 표현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무성 영화 시대의 코미디를 닮은 형식이다. 익살스러운 배경음악이 공백을 채우고, 흑백 화면에 노이즈가 자글거리며 중간중간 자막이 상황 설명을 더한다. 바보 같은 표정이나 과장된 몸짓이 쉽게 찰리 채플린을 떠올리게 하며 풍자조를 더하는데, 특히 의상과 소품이 그렇다. 의상이나 자동차 등 현대를 살고 있는 행인들과는 달리 고전적인 양복을 입고 옛날 신문을 보는 주인공은 홀로 과거를 살고 있는 것 같다. 이런 형식을 취해야 했던 이유는 예술가의 이상은 과거를 사는 듯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남들과 같은 길을 살기 바쁜 현대 사회에서 예술적 이상을 좇으며, 그 꿈이 쉽게 금전적 보상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바람은 너무 구시대적일 만큼 낭만적인 것인지 모른다.
두 번째는 그가 그리는 그림이다. 첫 장면에서 주인공이 그리는 그림은 머리에 새싹이 돋은 병아리인데, 첫 작품이 팔린 후 갤러리에 걸기 위해 그려온 그림들 속에서 그는 닭이 되어 있다. 그중 가장 큰 작품인 용맹한 닭 그림에는 얼마 전까지 아마추어였던 자신도 유명한 예술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반영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그림이 벽에 걸리는 장면은 여유롭게 계란을 까먹는 갤러리 직원의 모습과 병치되는데, 이는 주인공의 순진한 믿음이 곧 깨질 것임을 암시한다. 작품이 팔려도 제대로 된 대가를 받지 못 하고, 정성 들여 그려온 그림이 처참히 망쳐져 버렸을 때 주인공은 마침내 깨닫는다. 자신은 용맹하고 자유로운 야생 닭이 아니라 양계장에 갇힌 산란용 암탉이었으며, 피땀 흘려 창작해낸 자신의 작품들은 그저 누군가의 배를 불려주기 위한 계란일 뿐이었음을.
예술적 이상을 꿈꿨던 용맹한 닭은 결국 양계장을 탈출하지 못 했다. 열정을 착취할 또다른 순진한 예술가를 찾는 갤러리 주인을 보면 이 좌절의 고리는 쉽게 끊어질 것 같지 않다. 그런 이유로 영화는 ‘현실과 고군분투 중인 작가들’에게 바쳐진다. 지금도 좁은 양계장 안에서 자기 달걀이 빼앗기기만을 기다리는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그들이 혼자가 아님을 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