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이 시끄럽다고?
그게 무슨 뜻인지 어릴 땐 이해할 수 없었어.
왜 그런 말 있잖아. 문법상 이해할 수 없는 어른들만의 용어.
예를 들면 뜨거운 국물을 먹을 때, 혹은 뜨거운 욕조에 들어갈 때 하는 말.
어우, 시원하다~
뜨거운 것과 시원하다는 것은 정 반대의 개념인데도 불구하고 일맥상통하게 만드는 어른들의 놀라운 어법.
심지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전율이 통하는 듯 절로 우러나오는 진정성 어린 말투에 놀라곤 했지.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다?
강한 거짓말은 강한 진심이다!
근데 어느 순간 내가 그런 말을 쓰고 있더라고.
특히 뜨거운 욕조에 들어가면 나도 모르게 그 말이 감탄사처럼 튀어나오곤 해.
어우, 시원하다~
이젠 속이 시끄럽다는 말도 이해가 되는 나이가 되어 버렸어.
예전엔 머리가 지끈거리거나 속이 답답하다고 느꼈던 감정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속이 시끄럽다는 감정으로밖에 표현이 안되더라.
머리가 아프면 두통약을 먹고, 속이 답답하면 소화제를 먹으며 애써 부정하려 했던 감정들이 이젠 약을 쓸 수 없게 되어버린 건 아닐까?
아무리 찾아봐도 속이 시끄러운데 먹는 약은 없더라고.
정말 죽을 맛이었지.
사방은 조용한데 내 속은 시끄러워 죽겠는 거야.
누군가 내 머리 위에서 드럼을 마구 두들기는 느낌이랄까.
그 정도로 끝나면 좋으련만 그 소리는 어김없이 심장으로 파고들어.
그럼 그때부터 내 몸의 세포들이 얼씨구나 비트를 쪼개가며 내 몸 구석구석으로 그 감정을 퍼다 나르고,
정맥 주사액보다 더 빠르게 그 시끄러운 감정들은 내 혈관을 타고 전달되어 날 좀비로 만들어버리곤 하지.
그럼 난 마치 뇌가 멈춰버린 것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여긴 어디, 난 누구?' 를 반복하는 바보가 되어 버려.
아무 의욕도 없고 의미도 없는 내 모습이 어찌나 한심스러운지...
'숨만 쉬고 있는 껍데기'
그게 나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더라.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노트를 꺼냈어.
하얀 종이를 펼쳐놓고 날 괴롭히는 시끄러운 감정들을 하나씩 밖으로 꺼내 보기로 한 거지.
내가 지금 속이 시끄러운 이유가 뭘까?
그냥 생각나는 대로 툭툭 써보는 거야.
그럼 사방에 흩어져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들이 하나 둘 하얀 백지 위로 튀어나오는 경험을 하게 돼.
의식의 흐름대로 무조건 적기만 하는 거, 그게 포인트야.
떠오른 단어를 문장으로 정리하려고 애쓰지 마.
주어 서술어 같은 문법 따위도 필요 없어.
속이 시끄러울 때는 뇌의 개입은 잠시 접어둬.
그냥 거침없이 막 쓰는 거야.
내 안의 검열이 시작되면 내 감정에 솔직해질 수가 없거든.
친한 친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감정들을 하얀 종이에 털어놓는 거지.
그럼 내 하얀 종이들은 금세 시끄러워져.
대신 내 안은 조금 조용해졌다는 걸 느끼게 될 거야.
머릿속을 떠돌며 날 괴롭혔던 감정들을 눈으로 확인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해.
내가 이런 것들 때문에 속이 시끄러웠구나...
깨닫게 되면 막연했던 감정들이 구체화되거든.
속이 시끄럽다는 건 감정적인 거잖아. 그걸 이성화시켜 놔야 뭔가 해결책이라도 마련해 보지 않겠어?
물론 해결책이 없는 것들도 많다는 거 알아.
세상엔 내 뜻대로 안 되는 것 투성이니까.
근데 또 마음먹기 나름 아니겠어?
세상엔 내 뜻대로 안 되는 게 많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내 뜻대로 되는 것들도 상당히 많다?
해결책도 없는 걸 속 시끄럽게 끙끙 앓고 있음 뭐 하겠어.
그냥 하얀 종이에 툭툭 털어놓고, 그 종이를 쫙쫙 찢어버리자고!
지나간 것은 이미 지나간 거고,
아직 오지 않은 걸 미리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왜 그런 말도 있잖아.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으면 걱정이 없겠네~
속 시끄러워할 거 없어.
닥치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