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이 고장 나서 작동이 안 된 지 일주일이 넘었다.
하필 며칠째 폭염경보가 이어지고 있는 이 시점에 처참하게 고장 나 버린 것이다.
마트에 가서 원터치 모기장을 사서 설치했다.
집안의 창문을 다 열어놓고 모기향을 피웠다.
그리고 선풍기를 회전으로 돌리며 잠을 청했다.
밖의 풀벌레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귀뚜라미 소리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평소 에어컨 때문에 문을 꽁꽁 닫아놔서 못 듣던 소리다.
모기향 냄새에 귀뚜라미 소리까지 더해지니 옛날 감성에 가슴이 몽글몽글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더위가 해소된 건 아니었다.
창문을 다 열어놔도 여전히 더워서 잠을 이룰 수가 없으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한 시간 만에 목에선 땀띠가 출몰했다.
모기장 안이 덥게 느껴져서 거실로 나왔더니 모기가 나만 물어뜯는다.
나온 지 1분 만에 3방 물리고 도로 모기장 안으로 피신해야만 했다.
에어컨 없던 시절엔 어떻게 살았나 싶은 게 앞이 까마득해졌다.
이런저런 이유로 에어컨 수리까지 한 달 정도가 소요된다고 한다.
여름 다 끝나고 고치면 무슨 소용인가.
아, 내년엔 에어컨 고장 걱정 없이 시원하게 잘 수 있겠구나.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대충 짐을 싸서 작업실로 도망쳐 왔다.
남편은 집에 남아 모기향과 풀벌레의 낭만을 즐기겠다고 한다.
부부는 함께 고통을 나누는 사이라고 했지만,
고통이라는 건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낫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NO~
즐길 수 없다면 피해라!
난 더위에 취약하다. 예민하고 성질도 더럽다.
더위 앞에서는 본성이 그대로 나와버린다.
그래서 불가마인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불쾌지수가 올라가면 쌈박질 밖에 더하겠는가.
가정의 평화를 위해 나는 나가련다~
작업실로 사용하고 있는 공간에는 20년도 훌쩍 넘은 누런 에어컨이 있다.
전에 엄마가 관리를 잘해놔서 매년 고장 없이 사용하고 있다.
인버터 에어컨이 아니라 장시간 틀어놓지 못한다는 단점은 있지만,
틀어 놓기만 하면 그 파워는 어마어마하다.
잠들기 전 30분 정도 켰다 껐는데도 아침까지 시원하게 잘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남편에게 안부 전화를 건다.
살아 있지?
집 나간 지 사흘 만에 남편이 작업실로 먹거리를 바리바리 싸들고 왔다.
금방 만든 뜨끈한 카레와 오이지무침을 한가득 만들어 왔다.
병약한 와이프 쓰러질까 봐 소고기에 돼지고기까지 사들고.
즉석밥도 잡곡으로 골라서.
뭘 이런 걸 해왔냐고 타박했지만,
남편이 전달해 주고 간 먹거리를 보니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이 더운 날 선풍기 틀고 반찬을 만들었을 남편을 생각하니 작은 감동이 몰려왔다.
남들은 '집밥'하면 엄마가 차려준 밥상이 떠오른다고 하던데,
난 '집밥'하면 남편이 차려준 밥상이 떠오른다.
내가 어렸을 때 엄마는 늘 바빴고, 내가 컸을 땐 엄마는 늘 아팠다.
그래서 엄마 밥상에 대한 아련한 추억은 별로 없다.
대기업 다니던 남편이 프리랜서를 선언하고 집안일을 도맡아 한지 4년 정도 지났다.
돈 벌어 오는 남편보다 아내 걱정에 도시락 싸 오는 남편이 더 좋으니 나도 참 별종이다.
졸지에 별거 아닌 별거를 하다 보니 남편에 대한 애틋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집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다.
사랑은 사랑이고, 더운 건 더운 거니까.
혼자는 싫지만 혼자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