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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리 Jul 05. 2023

물 없이 오이지 만드는 남편

주부 경력 20년 차다.

나름 일을 하고 있고, 살림에 소질 없는 나이롱 주부지만 냉장고에 들어있는 식재료로 나만의 요리를 딱 만들어내는데 도가 튼 지 오래다.

알뜰한 성격으로 식재료를 버릴 수 없기에 1~2주에 한 번씩 냉파는 기본이다.

있는 식재료로 뚝딱 음식을 차려내는 주부 9단에게도 유독 맛을 내기 힘든 음식들이 있다.

그중 가장 힘든 건 단언 김치다.

김치는 아무리 고수의 레시피를 흉내 낸다 해도 깊은 맛을 내기가 힘들다.

그래서 우리는 쿨하게 김치는 사 먹기로 했다.


그다음으로 맛이 안 나는 게 있으니 바로 오이지다.

귀차니즘 때문인지 오이지를 만들라치면 무르거나 감칠맛이 안 나기 일쑤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오이지도 사 먹기 시작했다.

여름철 오이지는 마약과도 같아서 안 먹으면 서운하기에.


내가 오이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옆지기가 4년 전부터 오이지를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결혼 16년 만에 아내의 식성에 관심을 가져준 남피온님 만쉐이~!)

생전 요리에 관심도 없던 남편이기에 믿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물 없이 오이지를 담근다고? (그냥 생오이를 씹을게요...)

내 우려와 달리 옆지기는 과감하게 오이지를 담았고,

난 그 오이지에 감탄하며 4년째 옆지기가 해주는 오이지를 먹고 있다.

처음엔 10개로 시작한 오이지가 다음 해엔 20개, 30개로 늘어나더니 올해는 반접도 거뜬하다.

옆지기의 요리 비법은 인터넷에 떠도는 레시피다.

대여섯 개의 레시피를 정독한 뒤 그럴듯한 레시피에 토대로 그램 수까지 정확하게 지켜가며 만들어낸다.

내 식성과 맞는 레시피를 찾는 게 실력이다.

고수들의 레시피에 의존하다 보니 내가 손대중으로 대충 만든 음식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걸 인정 안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여름철만 되면 우리 집 오이지를 담그는 건 옆지기의 몫이 되어버렸다.

내가 옆에서 도와주려고 해도 할 게 없다.

나보다 더 믿음직스러운 만능 저울님이 계시기에.


앞서 말했듯 오이지 담그는데 물은 들어가지 않는다.

설탕, 식초, 소금이 전부다.

아, 물론 저울은 필수다...ㅡㅡㅋ


오이 1개당 소금 30g, 설탕 30g, 식초 18ml


그렇게 김장 봉투에 식초, 소금, 설탕을 넣고

쒜킥쒜킥~

그늘진 베란다에 2~3일 정도 지나면

오이에서 나온 물이 흥건하게 고인다.

그럼 밀폐통에 넣고 냉장고로 고고씽~~~

이렇게 만들어둔 오이지는 1년이 지나도 그 맛이 변하지 않으니 신기방기~

오이지무침도 좋지만, 더운 여름철엔 물에 빠진 오이지 냉국이 최고!

쏭쏭 썰어서 물과 퐁당~빠트려서 먹으면 없던 입맛도 돌아온다.

매실액을 한 숟가락 넣어주면 단짠단짠 하고 몸에 좋은 한 끼 밥상이 된다.

올해도 반찬 걱정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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