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좋은 말을 들으면 기분이 들뜨고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느낌이라면 조금이라도 안 좋은 소리를 듣거나 불쾌한 일이 있으면 하루종일 그 생각이 떠나질 않고 몸은 점점 더 가라앉았다. 생각에 사로잡혀 또다른 생각을 낳고, 결국 내가 왜 그렇게 해서 그런 소리를 들었을까 내지는 왜 그때 나는 이런 처신을 하지 못했나 하는 이불킥을 유발하는 후회로 하루를 마감하는 일이 잦았다. 이런 걸 해소하려고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보니 사람에 대한 원망이나 저주 가득한 데스노트가 되어 있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의 무례함에 못견디게 괴로와서 견딜 수가 없었다. 너무 괘씸한 나머지 어떻게 하면 가능한 한 날카롭게 날이 선 말로 상대방을 공격할지, 마음을 난도질 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몇번을 일기에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그렇게 분노감을 키웠다. 결국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오만이 잔뜩 담긴 총알로 장전해 카톡이라는 방아쇠를 당겼고, 그 포탄이 터진 후 더 큰 후폭풍에 시달려야 했다. 분노한 감정은 분노를 표출한다고 해소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우리는 날마다 일과 사람에서 가정과 사회에서 수많은 감정과 마주한다. 감정과 내가 동일시되고 뒤범벅이 되니 올바른 판단이 되질 않고, 걷잡을 수 없었다. 그 때부터 나를 객관화해서 제 3자 입장에서 나를 바라보는 연습을 시작했다. 어떤 연구에서 밝혀진 이론이었다. 내 행동에 대해 자책을 하거나 나는 왜 그랬을까가 아니고, 셀프 디스턴싱을 통해 나 자신의 존재를 좀더 객관적으로 분리하는 연습을 했다. ‘수정아, 너는 지금 후회하는 구나, 누군가가 이렇게 평가해서 속상하구나. 수정인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구나’. 이러한 행위는 즉각적으로 편도체를 안정화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밝혀졌다. 나를 지키는 건 내 중심으로 생각하고, 사고하고, 외부의 자극에 계속 시선을 두는게 아니라 오히려 외부에서 내면의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데 있었다.
또 하나는 화, 두려움, 분노, 걱정, 염려 등과 감정은 분리시켜서 의인화했다. 이런 방법은 최근 재미있게 본 [인사이드 아웃]가 도움이 됐다. 내면의 평온함을 깨는 상황이나 문제는 항상 도래하는데, 그 때마다 온갖 희노애락의 감정도 같이 배달이 된다. 이런 다양한 '감정이'들이 내 안에 존재하는데, 그것들과 나를 일치시키지 않았다. 즉 '나는 두려워하는 사람, 나는 화를 잘 내는 사람, 나는 염려하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지금 불안이가 나타났구나, 하지만 불안이가 제멋대로 휘젓게 두지는 않을거야’며, 감정을 의인화해서 거리감을 확보했다. 그렇게 감정을 제 3자 객관화로 놀이하듯 대하는 습관은 조금씩 내게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타인의 생각까지 내가 관여하거나 내가 조정할 수는 없다. 결국 그건 내 몫이 아닌거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을 아무리 곱씹고 회고한다해도 얻을 수 있는 건 없다. 내가 최선이었다면 그것으로 족한거다. 매순간 나는 선택권이 있다. ‘아 그때 왜 그랬지? ‘자책하고 낙담하고 후회하는 선택을 할지, 아니면 ‘그때 나는 최선이었고, 그사람도 그럴 수 있어’라고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선택을 할지 말이다.
평범한 다수의 사람들이 하루의 대부분을 쓸데없는 감정과 싸우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 감정처리법을 별도로 배운적이 없기에, 자기개발서에 나와있는 동기부여 명언들로 스스로 버텨보거나, 그도 안되면 선배, 동료 등과 안주거리로 삼아 위로를 얻어 보려한다. 모 드라마에서 본 대사가 생각난다. ‘잘난 건 타고나야 되지만 잘 사는건 너 할 나름인 거’라고, 가슴에 콕 박혔었다. 감정에 휘둘려서, 그릇된 판단을 하고, 누군가에게 상처까지 남기는 것은 건강한 삶이 아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감정 하나하나를 객관화해서 바라보는 연습을 하다보니 예전처럼 불편한 감정에 이성적 판단이 뒤죽박죽 반죽덩어리가 되어 내팽개쳐버리는 일은 흔하지 않게 되었다. 좋은 습관을 목적으로 시작한 일기가 중간에 잠시 변질되었었는데, 다행히 이제 데쓰노트는 희노애락오오욕이 가득 출연한 애정의 감정노트가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