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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도치의 홀로서기

by 린ㅡ


백 번 씹었을까. 천 번은 씹었을까. 먹을 것이 목구멍으로 잘 넘어가지 않았다. 한 달 되었을까. 일 년이 넘었으려나. 잠들지 못하는 밤이 낮의 시간마저 점령하기 시작했다.


먹는 일과 자는 일, 그 소소한 일을 소홀히 하다 보면 감춰두었던 뾰족한 예민함이 매섭게 날카로워진다. 나는 그것이 무섭다. 사납게 날이 선 고슴도치가 되어버린 자신을 본인만 알아차리지 못하는 일.


정히 닦은 거울로도 비춰볼 수가 없고, 서리해진 마음의 문턱 덕분에 음식을 뒤로 넘기거나 꿈나라로 건너가는 일은 더욱 어려워지며, 매 순간 주변에 해를 끼치지 않도록 더욱 날을 세워 마음을 놓지 못하는 일.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무던해지려 애써보지만, 뭉툭해지는 일은 날카로워지는 일보다 훨씬 어렵다. 소란스레 부서지고 나서야, 겨우 미련스레 무질어진다. 부서지다 당신에게 상처를 내고, 내게도 상흔을 남긴다. 상처를 주는 일은 받는 일보다 훨씬 아팠다.




산란하게 부서졌다. 며칠 전 그리고 어젯밤에도. 결국 그리고 참혹하게.


기대어왔던 것들이 와장창 무너져버렸다. 왜 부서지고 말았을까만 생각하며 예쁘고 단단한 것들을 그러모았다. 틈을 메우고 도로 쌓아 올려보았지만, 다시 무너졌다. 이제 는 이어 붙일 수 없음을 깨달았다.



단단한 버팀기둥에 오래도록 기대어 지냈다. 과연 몰랐다. 혼자 감당해야 하는 생이라는 것을 되뇌면서도 모르게 한 곳에 기대고 지냈던 모양이다. 내 안에 남아있는 것이 없다는 이유로 뻔뻔스레 기대 살았겠지. 언젠가 나는 독하고 독립적인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약하고 약한 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처음엔 곁에 있던 버팀기둥에 손만 대다, 조금 힘든 날에는 머리를 기댔고, 속을 다 잃어버리고 나서는 서있기가 어렵다는 핑계로 당신에게 올곧이 기대었다. 몸을 기대어 훌훌해진 마음엔 훈훈한 기대가 일었겠지.



기대온 곳이 무너지고 나서야 깨달았다. 오래도록 기대어 온 삶, 평온했던 날들, 거두어졌던 나의 불편한 마음들이 당신 덕분이었다는 것을. 내가 감당하지 못한 마음들을 그에게 떠넘겨버린 것은 아닌지. 그러다 그에게 불편하고 아슬아슬한 것들이 쌓여 결국 무너져버린 것은 아닌지. 바스러져 버린 것들은 모두 나의 파편이었고, 변해버린 그의 모습은 내 탓이었다.


기댄 사람은 기대어진 자의 고통을 알 수 없다. 간간이 가늠할 뿐, 결코 당신과 같은 무게로 헤아리지 못한다. 어쩌면 예민하게 날이 선 나는 알았던지도 모르겠다. 알면서도 모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지. 나는 이기적인 우울자이니까.


기대는 일과 기대하는 마음은 위험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은 부서지는 일도, 사라지는 일도 쉬웠다.


부지런히 반복되는 내 마음도치의 가시 공격에 결국 당신이 포효했고, 나의 마음가시들은 날을 눕혔다. 기대었던 시간이 길었던 탓인가, 지나치게 기대온 탓인가. 버팀기둥은 낡고 그것에 기대었던 것마저 곯아, 작은 포효에도 금이 가고 부서졌다.




화나 분노 따위에는 사과나 용서라는 묘약이 있지만, 실망에는 그런 것이 없다. 이전으로 돌릴 수가 없는 추락의 상태. 오랫동안 좋이 쌓아 올린 마음은 높은 곳에서 추락한 탓에 본래의 형태를 찾아볼 수 없었고, 흩어진 조각들조차 잡히지 않았다.


오랫동안 한 곳에만 기대 마음을 모아두는 일은 이토록 위험했다. 높이 일었던 기대는 깊이를 모르고 잠식했다. 갈 곳을 잃었고, 옮겨둘 곳 없는 마음은 버리기로 했다.


나는 다를 거라고, 당신은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가 공평한 세상살이에 예외를 두는 일이 이렇게나 위험하다고. 앞으로는 공명하고도 올바르게, 감히 기댈 수 없도록 멀어지고, 쌓아 올릴 수 없도록 까마득히 낮은 곳에서 시작하기로.



멀어지는 일이 결국 가까워지는 일이라면 기꺼이 멀어지고 싶다. 아무도, 아무것도 없는 나의 곁을 소원하며, 이제는 홀가분히 가면을 벗고 싶다. 꿈만한 그곳에서 안의 축축한 것들을 모두 내어 바삭하게 말려 버리고, 낡고 곯은 것들도 눈치 없이 꺼내 비우면 잃어 버린 듯 잊어 버릴 수 있을까.


방심하고 망각하며, 사라지듯 살아가고 싶다.

증발하고 멀어지며, 소멸하듯 사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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