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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ㅡ Nov 10. 2023

당신의 하루는 어떤 모양인가요,

- 루틴의 욕심 -


도망치듯 사직을 하고 보니, 스스로를 잃고 살았던 사람에게 하루는 존재하지 않았다. 의미를 잃었다. 재깍재소리 내는 시간흐름은 생경했으며, 현실로 돌아오라고 두드리알람소리처럼 느껴졌다. 


새벽에 일어나 자정이 되도록 하루종일 의식을 곤두세워야 했던 오랜 직장인의 습관은 사라질 기미가 없었다. 매일 꼿꼿한 의식으로 아무리 '하고 싶은 일'을 떠올려보아도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열심히, 집의 한 구석에서 웅크리고 지냈. 가만있는 일조차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더라. 


리듬을 잃은 시간들, 이곳에서조차 헤매는 내가 싫었다.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했으니, 차선으로 '놓쳤던 일'이라도 떠올려보아야 했. 


일을 하는 동안 정녕 해야 했으나 그럴 수 없 가장 아쉬웠던 , 더는 놓쳐서는 안  일.


내겐 그것이 '육아'였다.




거창한 육아가 아니었다. 그런 것은 어떻게 하는 건지 방법도 모르는 터였고. 그저 사직으로 비워낸 마음 안에  시절만이 소유한 말랑말랑한 아이들의 모양새와 단번에 알아듣기 힘든 그들만의 몽글몽글한 문장들을 담아내고 싶었다. 그것이 사직 후 어렵게 찾아낸 '놓쳤던 일'의 전부였다.


마음정허한 공간보다 그들의 마음속 빈 공간들을 사랑의 감각들로 진득하게 채워주 싶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괜찮을, 살갗이 닿을 정도의 가까운 물리적인 거리, 그 안에서 서로의 눈빛과 온기를 나누는 일, 고작 그것이 내게 '육아'의 전부였다. 거창하지 못한 그것마저도 핫도그 안의 소시지처럼 우울에 휘감겨 있던 나에겐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들의 단어와 문장 끝을 맘에 담아두었다가 초밥의 모양처럼 사랑을 듬뿍 얹어 그들에게 고스란히 내어주면, 아무것아닌 말들 특별한 말이 되고 아무것도 아닌 일이 보통일이 아닌 것들이 되었다.


지금도 그렇게 그 어느 때보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격렬하게 나누고 있다.


우리가 함께 시간을 빚어내는 일. 여전히 이것 내가 처음 욕심내었던 '육아'의 전부이다.




그렇게 차선으로 시작했던 '놓쳤던 일'을 해나가다 보니 해치우는 만큼 공간이 생겼고, 그곳에서 최선책이었던 '하고 싶은 일' 솔솔 피어올랐다. 지나고 보니 준비하지 못한 사직 후의 삶, 그것조차 굳이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이제 그 '하고 싶은 일'을 당장 시작하면 될일, 그것이 내겐 '그림'이었다. 



남편이 생일선물로 안고 온 컬러링북과 색연필이 시작이었다. 아꼈다가 피곤하지 않은 날로 골라 아이들 재우고 한 시간 정도, 그야말로 황홀하게 만끽했다. 어린 몽상가로 돌아가 마주한 적 없던 극한의 자유로움을 탐닉했다.


시간은 차즘 두 시간이 되고, 두 시간은 곧장 네 시간이 되었다. 결국엔 그 시간들이 흐물흐물한 모양새로 하루의 틈새를 모두 메워가며 나의 종일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림'의 영역이 '육아'의 영역을 넘어서고 만 것이다. 


밥 짓는 일을, 새벽에 아이들을 깨우는 일을, 안아주는 일을 잊는 때가 잦아졌다. 그럴 때엔 아이들이 함께 거들며 기다려주었고, 곤히 자고 있는 나를 두고 번뜩 일어나 학교로 달려가는 날도 있었으며, 내 무릎 위에 앉아 깊게 오래도록  안아주기도 했다.


부모가 하는 줄로만 알았던 육아가 이제 과연 그렇지만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존재들이 크지만 크지 못한 존재의 틈을 알아채고 고스란히 채워주었다. 


'육아'로도 빠듯한 하루에 '그림'까지 더해버린 이 욕심쟁이 때문에.




육아와 그림으로 달아나듯 지냈지만, 도망 나온 우울사직자가 단번에 평온을 찾기는 어려웠다. 매일 고요모습으로 '육아'와 '그림'을 적절히 섞어가며 무사안화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테지만, 마음속 격렬한 우울과 같은 감정들은 통제하기 어려웠다. 수많은 아름다운 것들로도 쉬이 달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욕심내어 더한 일이 '글쓰기'였다. 


그저 통제하기 어려운 나의 감정들을 직시하고 이곳에 덜어내기 위해 시작했던 일, 그렇게 내 안을 파고들며 나를 알아가니 어느 정도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었고, 그것이 역으로 내 안의 근원을 알 수 없는 좋지 못한 생각들을 통제가능하도 도와주었다.


쓰는 일의 치유력을 경험하고 서는 더욱 정성을 다하고 싶었다. 그것은 한껏 가들막했던 하루에 극한의 어려움을 하나 더하는 일이었고, 그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결국에는 자는 일과 먹는 일들을 줄이게 되더라.


'육아'와 '그림'만으로도 빠듯한 하루에 '글쓰기'까지 더해버린 이 욕심쟁이 때문에.





'육아', '그림' 그리고 '글쓰기', 이 세 가지를 간이 맞도록 버무리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참으로 욕심나는 일이고. 한평생 미약하고 고요했던 내가 이렇게나 욕심을 부렸던 적이 있었던가. 결코 없다.


글자로 옮겨놓고 보니 정갈한 글자의 형태처 별일 없이 안온 보이지만, 현실은 과연 다르다.

'지금 내가 이걸 해 되나.', '이럴 여유가 있나.' 온갖 생각들이 까막까막하게 일어 머릿속을 돌아다닌다. 잠재된 우울도 마음에서 쫓아버리지 못했으니, 못난 행색으로 가까스로 버텨내는 날이 수도 없다.


하지만 이제는 그 불안과 우울의 리듬에도 비밀히 적응해나가고 있다. '이럴 때가 왔구나.' 하며 그 발단의 영역을 잠시 접어둔다. 육아로 힘든 때면 육아에서 조금 떨어져 그림과 글에 가까워져 보고, 글 쓰는 일에 나동그라졌을 때는 이곳과 조금 떨어져 그림과 육아에 매진해 본다.


멀어지는 일조차 흔쾌히 마음이 드는 이유는 그것들을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깊게 사랑하기 때문이다.



루틴, 그것이 나의 시간에 리듬을 만드일이라면 수시 바뀌는 매일의 리듬을 나조차 알 수가 없다. 그저 루틴을 가진 사람은 단단하다는 사실밖에는. 그러니 하나라도 놓치면 한순간에 다시 예전처럼 부서질까  단단함에 더욱 욕심을 내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단단한 것들은 삐죽빼죽 못난 모양새로 형태를 잃어버리쉬운 법.


단단함보다 진득하게 엉겨 나를 지켜내고 싶다. 혹여 소외되고 눈물에 뭉근하게 절여지더라도 바삐 형태를 바꾸어가며 나 잃지 않도록 내 안에 긍정적이고 나만의 향기로운 영역들을 만들어가고 싶다.



년이 지날 즈음, 

나의 하루들은 과연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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