等價交換
1. 뿌린대로 거둔다.
뿌린대로 거둔다는 말이 있다. 어쩌면 세상의 가장 평범한 이치이자, 변하지 않을 명제이기도 한 이 말은 보통 악행을 저지른 악당이 최후의 순간 그 악행 덕분에 죗값을 치르게 될때 관용적으로 쓰이는 말이다. 어쩌면 세상사를 가장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말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작용이 있을 때 그 반작용이 있는 것은 물리법칙이고, 그것은 오롯히 인간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원인이 없는 결과는 원인을 찾아보지 않아서 그렇게 보일뿐, 모든 행동과 결과는 원인과 이유가 있는 법.
2. 가치를 매긴다는 것.
사람은 어떤 물리적 행동을 할 때는 자기 행동의 가치를 그다지 따지지 않는다. 어딘가를 가기 위해 걸어 가거나,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할 때 가치의 측정보다는 현재의 자신의 상황과 처지를 우선 고려하게 된다. 걸어서 10분이 걸리는 거리를 가기 위해서 어느 날은 택시를 부르기도 하고, 어쩔때는 걸어서 가기도 하며, 직접 운전을 한다거나 자전거를 탄다거나 여러 방법을 사용하는 그 이유는 대부분 경제적 가치, 효율 보다는 내가 처한 상황에 기인한 바가 크다. 피곤하다거나, 날씨가 많이 덥다거나 춥다거나 다리가 아프다거나, 날씨가 너무 좋다거나 하는 요소들이 결정을 할 때 더 큰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상대방 또는 다수 상대방에게 하는 어떤 "작용"에 대해서 가치를 매기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 행동을 경제적인 방법이건, 혹은 자신 스스로의 시간적 방식이건 그 가치를 측정해서 어떤 작용을 줌에 있어 스스로의 만족을 얻는다. 스스로의 만족을 얻는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인 반작용을 원하기도 한다.
3. 관계에서 등가가 존재할 수 있을까
언젠가 어떤 친구를 사귀었을 때, 나는 그 친구에게 사실 잘 해주지 못했다. 잘 해줄 수 있는 주관적인 처지와 형편도 어려웠지만 객관적인 상황도 좋지 못했다. 그래도 나름대로는 할 수 있는 만큼, 내가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을 활용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친구는 나에게 늘 이렇게 말했었다.
"내가 해준 만큼 나한테 해주면 좋겠어. 내가 그 이상을 바라는 것도 아니잖아"
어쩌면 그런 말을 들을 때 measuring 하기 전에 스스로 자괴감에 휩싸였을 수도 있다. 그래서 미안했고,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을 동원했어야 했다. 근사한 카페테리아에서 꽃 다발 선물을 안겨주며 로맨틱한 식사를 하지 못하더라도 반나절을 돌아다녀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재료를 준비해서 저녁을 해주곤 했다. 어쩌면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이 "등가"를 고민했던 스스로의 만족이었으리라.
그렇지만 그것이 등가가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친구는 그 정도로 채워지지 못했고, 나도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요구들에 지쳐갔기 때문이었다. 과연 인간관계에서 어떻게 등가를 매길 수 있을까. 공신력있는 제3의 기관? 혹은 Tool이 있지 않는 한 관계에서 등가를 구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어떤 행동의 이면에 일방의 어떤 처지와 조건들이 모두 노출되지 않기 때문이고 그러하기에 주관적인 입장에서 자기에게 후하고 상대에게 박한 경우가 생겨날 수 밖에 없을터니까.
4. 타인 행동의 가치를 측정한다면?
측정할 수 없는 가치를 측정하는 법을 나도 모른다. 측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사람의 속내를 완전 들여다 보지 못한다면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떤 이에게는 백만원 짜리 한 끼 식사가 대수롭지 않은 일일 수 있지만, 누군가는 백만원이 한두달의 생명줄이 될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본다는 것은 그 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아무리 서로 흉금을 털어놓는 친한 사이라 할지라도 알 수 없는 내밀한 비밀이 있기 마련이고 특히나 사람은 자신의 궁색함을 드러내는 것을 꺼려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타인의 행동의 가치를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면, 무가치하게 바라봐야 하는가? 나의 행동들이 의미있고 가치있다고 여긴다면 반대로 다른 사람의 작은 행동들도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관계에서 예의와 존중이라는, 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언어를 사용한다.
5. 예의와 존중은 호의가 아니다.
좋은 사람이라면 예의와 존중심, 배려심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보통 그런것이 없는 사람을 보통은 무례하고 이기적이라고 한다.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인간은 누구나 타인에게서 대접받고 싶어하고 관심을 얻고 싶어한다. 마치 무대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듯이, 청중의 갈채를 받듯이. 그렇지만 박수를 치지 않는 사람은 박수를 받을 자격이 있을까? 최근에 겪어 본 사람중에 뭐랄까 당황스러운 사람이 있었다. 긍정을 강요하고 자기의 기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짜증부터 내는 사람이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종교적, 사상적 가치를 따지는게 아니고 일상생활에서 시각이 다르면 입장이 다를 수 있는 문제들임에도 그런 태도였다. 충분히 토의하고 경청하면 이해할 수 있는 것들도 지위와 나이를 가지고 찍어 누르는 것만 하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흔한 꼰대라고 생각했다. 그냥 저런 방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더 겪어 보면서 느끼는 것은 예의와 존중이 없는 사람이란 결론이었다. 면박과 꼬투리가 대화의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어쩌면 저렇게 한치의 어긋남이 없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존재를 뭉게려고 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 생활을 하다보면 여러가지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았건 사람이 하는 일은 실수가 있을 수 있고 그런 실수로 인해서 불의의 손해를 보는 일도 생긴다. 그런데 그런 문제를 대할 때 마치 그 실수를 당하는 사람은 너그러이 모든 경우를 대비해서 회사를 존중해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편, 회사가 너그럽게 혹은 마땅히 그런 부분도 고려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회사의 단 한푼의 손실도 용납하지 않는 태도를 보면서(물론 그렇다고 늘 회사의 이익만 좇는 사람도 아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고민스러웠다.
6. 그 예의와 존중은 등가교환이 될 것이다.
뿌린대로 거두리라. 가치를 측정하기 어려운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뿌린대로 거둔다는 어쩌면 평범한 등가교환의 원칙은 시간과 세월을 겹겹히 거쳐가면서 누구나 수긍하는 진리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예의와 존중을 상대방에게 드러내는 것은 특히 그것이 의도치 않게 또는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돌아올 수도 있다. 그것은 반대로 예의와 존중없이 살아온 사람에게는 반대로 그런 당황스러운 순간이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돌아올 것이다. 마치 그렇게 되기를 기도하진 않겠지만, 오늘은 인생의 진리를 한번 더 믿어볼 요량이다.
뿌린대로 거두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