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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실 Oct 22. 2024

엄마, 부디 자유로우시길...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아침 6시.

잠결에 전화기를 집어드니 동생이었다. 순간 잠이 확 달아나며 전화기를 켜는 손이 떨렸다.

"누나, 이 시간에 전화했으면 무슨 일인지 알겠죠. 카톡 보세요. 우린 여기 와 있어요"

카톡을 열어보니 장례식장 주소가 나와있었다.

벌떡 일어나긴 했지만 뭘 해야 될지를 몰랐다. 남편에게 알려야지. 떠오르는 생각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멀리서 포클레인 소리가 들렸다. 허둥지둥 밖으로 나와 산길을 내달렸다. 아차, 이 길이 아니지. 다시 반대쪽으로 방향을 틀어 달렸다. 강쥐가 흙투성이 발로 마구 뛰어올랐지만  쫓을 정신도 없었다.

포클레인 운전 중에는 소음 때문에 전화벨도 말소리도 들리지 않기에 가까이 가는 수밖에 없다. 숨이 차고 쓰러질 것만 같았다.

남편이 달려오는 나를 발견하고 시동을 껐다. 무릎이 팍 꺾이며 풀썩 주저앉았다.


"엄마, 엄마 돌아가셨대요..."

저런, 금방 내려갈게. 그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다시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와 캐리어를 꺼냈다. 뭘 넣어야 하지... 머릿속이 하얀 백지장 같았다. 그래, 핸드폰 충전기 가져가야지. 어디 있지? 핸드폰 충전기. 충전기 충전기... 서랍을 다 열어봐도 없다. 왜 없지 왜 없어. 갈팡질팡하다 문득, 그렇지. 예비충전기는 아예 캐리어에 넣어두기로 했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충전기는 있고 그 다음엔 뭘 챙겨야 하지. 아무 생각이 안 나고 가슴만 벌렁거렸다.

그때 밖에서 남편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빨리 나와. 지붕에 비닐은 씌우고 가야지. 비가 올 텐데.


농막을 짓다가 지붕에서 물이 새는 바람에 일단 비닐을 덮어두었었다. 전 날 잠시 비가 그치고 해가 쨍쨍해  모두 걷고 말리고 있던 중이었다. 그걸 다시 덮고 가야 며칠 집 비운 사이 아무 탈이 없을 테지.

비닐을 다시 덮는 것도 예삿일이 아니다. 합판을 다시 깔고 비닐을 이중으로 덮고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돌이며 무거운 것들로 촘촘히 눌러줘야 한다.

일을 하면서 비로소 마음이 차츰 가라앉는 걸 느꼈다. 더 이상 가슴이 벌렁거리지도 손이 떨리지도 않았다. 아무 일 없는 것처럼 그렇게 비닐을 다 씌우고 내려와 차분히 짐을 쌌다. 남자 검정 양복도 장례식장에서 빌려주나. 전화로 물어 볼만큼 마음이 잠잠해졌다.


엄마가 요양병원에 가신지 어느덧 2년. 그리고 음식물을 코로 주입한 지는 6개월이 되었다. 그 6개월 동안은 언제 이런 소식이 전해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엄마는 전혀 누굴 알아보시지도 못했고 말씀도 못 하셨다. 그저 눈만 깜빡이고 목숨만 부지하고 있을 뿐.  그런 엄마를 보는 게 너무 괴로워  면회조차 자주 가질 못했다.

동생은 그동안 내게 할 말이 있어도 전화로 하지 않고 카톡을 보냈다. 동생 전화가 얼마나 나를 놀라게 하는지 너무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결국 동생이 전화를 하고 만 것이다.


눈의 피로감 때문에 남편은 휴게소마다 들러 쉬어 가야만 했다. 채근하진 않았다. 빨리 가야겠다는 마음과, 이미 상황 종료 된 시점이라 장례식장에 들어서야 하는 그 순간이 너무 두려워 시간을 늦추고만 싶은 마음이 엉켜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장례식장은 썰렁했다. 엄마는 영정사진 속에서 살포시 미소 짓고 계셨다. 그 사진은 엄마가  영정사진으로 쓰려고 우리 몰래 찍어 둔 사진이란 걸 나는 알고 있다. 사진 속의 엄마는 참 젊고 고우셨다.

이제 엄마는, 그토록 사랑하고 그리워하던 남편과 아들 곁으로 훨훨 잘 날아가셨을까. 모든 사람이 부러워할 만큼 행복하게 사셨고 또 이 세상 누구보다도 큰 아픔을 겪으셨던 우리 엄마.

생때같은 귀한 맏아들을 사고로 잃고 세상 끈을 놓으실까 염려스러웠는데 채 마음을 추스르지도 못했을 3년 후에 아버지마저 돌아가셨으니 엄마가 겪었을 고통이 얼마였을지 곁에서 지켜봤으면서도 감히 짐작을 못할 정도다.

아들을 잃고 사랑과 존경으로 의지했던 남편마저 떠났어도 남은 자식 둘을 돌보며 지금까지 살아주신 것이 새삼 감사하다. 늘 병약하셔서 바람 앞의 등불처럼 불안했지만 여태껏 잘 버텨주셔서 이 나이 될 때까지 엄마가 계셨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하다.

엄마 사진을 들여다보며 나직이 속삭였다.


" 엄마, 이제 아버지, 동생 만나셨나요? 그곳에서는 부디 몸도 마음도 아프지 말고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지내셔요. 엄마 딸로 태어나 정말 행복했습니다."


찾아오는 문상객은 많지는 않았지만 꼭 올 사람들은 먼 곳에서도 다 찾아왔다. 몇십 년을 못 봤던 친척들과 사촌 동생들도 다 만났다.

서로 얼굴을 안 보고 지낸다던 큰삼촌과 작은 삼촌 가족들도 장례식장에서 극적으로 만나  모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손을 잡고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엄마가 마련한 화해의 장이었다고나 할까.

모두 너무 변해 있었다. 다들 연로하셔서 각자 당신들의 앞날을 상상하는 시간인 듯도 했다.



다시 집으로 내려왔다. 모든 일들이 그저 꿈을 꾼 듯 아련하기만 하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다만, 매일 아침 엄마의 안녕을 비는 기도가 이젠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시길 비는 기도로 바뀐 것뿐이다.

이제 나는, 가슴 한편을 짓누르던 엄마에 대한 걱정에서, 전화벨만 울려도 놀라고 엄마를 보내드려야 한다는 상상만으로도 괴로웠던 그런 시간에서 벗어나는 것일까.

벗어난다는 건 어쩜 허전함을 동반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슴 졸임에서는 벗어날지 몰라도 엄마의 빈자리가 주는 허전함은 메꿀 수가 없을 테니까.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그저, 엄마가 고통에서 해방되어 한없이 자유로우시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


엄마, 사랑해요. 편히 가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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