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희가 노래하고 정석이 신디 사이저를 연주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성우가 처음으로 웃고 있었다고 해도 나는 이 영화가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성우가 맨 처음에 있던 곳은 서울이었다. 서울에서 더 이상 자리를 구할 수 없게 되자 고향인 수안보로 내려온 게 이 영화의 시작이다. 그런데 이제 성우가 연주하고 있는 곳은 여수다. 서울에서 수안보로 그리고 수안보에서 여수로. 중심에서 점점 밀려나와 마침내 땅끝에 도달한 것이다. 서울에서 자리가 사라지고 수안보에서도 자리가 사라졌는데 여수라고 해서 자리가 영원할 리는 없다. 유행은 지진과 비슷해서 진원지에서 진동이 멈춰도 저 멀리까지 날아간 여진은 당분간 지속된다. 여수는 말하자면 여진이다. 머지않아 멎을 것이다. 그러면 더 이상 성우가 연주할 무대는 없다. 지금 성우가 누리고 있는 행복은 이른바 시한부인 셈이다.
그러나 해피엔딩이 아니라고 해서 그게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인생에서 해피엔딩이라는 건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일단은 본인이 이렇게 살아가면 좋겠다고 상상한 삶을 그대로 살다 죽는 게 해피엔딩일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자기가 상상한 삶을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본인이 생각하는 좋은 삶의 모습도 나이에 따라 상황에 따라 시시각각 바뀐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 것이다.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삶을 그대로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라고.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모두 절망과 무력함에 빠져서 살아가는 건 아니다. 해피엔딩이 아니라도 사람은 나름대로 있는 힘껏 살아간다. 요컨대 중요한 건 끝이 아니라는 얘기다.
성인이 된 이후 성우는 웃지 않는다. 그럴만 하다. 송골매를 꿈꾸며 <세상만사>를 부르던 소년은 온데간데없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일용직에 그마저도 자리를 잡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게 어른이 된 성우의 현주소다. 기타를 손에서 놓은 건 아니지만 그 기타를 연주할 수 있는 곳은 지하의 클럽이거나 장례식장 또는 지역 아가씨 선발대회 같은 곳뿐이다.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삶을 살기로 정했을 때 소년 성우가 열망했던 것은 주인공으로 사는 삶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른이 된 성우에게 허락된 것은 주인공의 뒤에서 배경 음악을 만들어내는 자리이고 그마저도 구하기가 쉽지 않다. 꿈이었던 기타는 생계를 위한 기술이 됐다.
희망이 있어서 기타를 놓지 않는 게 아니다. 희망이 있다면 기태가 그랬던 것처럼 기획사에 데모 테이프를 돌리거나 아니면 가요제에 참가하기라도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할 줄 아는 게 이것뿐이어서 먹고 살 수 있는 다른 방안이 없어서 떠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강수가 그랬듯이 운전을 하는 방법도 있고 단지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밤무대에 서는 것보다 나은 양질의 일자리를 아예 구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취한 손님과 접대부 사이에서 옷을 벗고 기타를 치는 수모를 감수하면서까지 성우가 기타를 놓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이것 외에 다른 삶의 방식을 상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기타로 성공하겠다는 게 아니다. 기타와 무관한 삶을 산다는 게 성우로서는 한 마디도 할 줄 모르는 외국으로 이민을 가는 것과 다름없다는 말이다.
그곳에는 그곳 나름대로의 삶이 있겠지만 삶이라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게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말을 어쩌다 들을 때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그 말이 마치 살기 싫었으면 죽었으면 되지 않느냐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심보선 시인은 <슬픔이 없는 십오 초>에서 이렇게 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말마따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은 여기로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 여기로 오겠다고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삶에는 선택할 수 있는 순간도 있다. 그러나 선택한 것들로만 삶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삶에는 선택할 수 있는 순간만큼이나 선택할 수 없는 순간들이 있고 삶은 그러한 줄기들이 한데 모이는 바다와 같다. 개중에는 댐에서 내보낸 물줄기도 있지만 어디서 출발했는지 알 수 없는 물줄기도 있는 것이다.
기타를 치겠다고 결정한 것은 성우였을 테지만 사실 그조차도 분명하지 않다. 성우가 기타를 치기로 결정한 것은 축제 무대에서 연주를 할 때 느꼈던 희열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친구들과 함께 우리만의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기타는 첫사랑을 만나게 해준 동기이기도 했고 첫사랑의 실패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기도 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뭔가에 열중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던 계기이기도 하고 쓸쓸함과 낭만 그리고 처연함과 기대 같은 복잡한 감정들을 바깥으로 흘려보내는 감정의 창구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기타는 성우가 선택한 삶이었다기보다 성우와 기타가 함께 지금까지의 삶을 만들어 온 것이다. 성우가 견디기 힘든 모욕을 견디면서까지 기타를 놓지 않는 이유는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성우는 음악을 포기하지 못한 게 아니라 삶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함께 했던 동료들은 하나둘씩 떠나가고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친했던 친구들이 반목하는 우울의 연속에도 이 영화가 온기를 잃지 않는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첫사랑은 사라졌지만 옛사랑이 돌아오고 수안보에서 일자리는 없어졌지만 여수에서 새로운 자리가 생겨나듯이 삶은 한 곳의 문을 닫으면 다른 곳의 문이 열린다. 어쩌면 그 문은 생각보다 별로 열고 싶지 않은 문일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곳으로 들어가도 끝이 아니라 또 다른 문이 열린다는 사실이다.
첫머리에서 말했듯 수안보에서 멎은 여진은 곧 여수에서도 먿게 될 것이다. 그러면 아마도 성우는 일자리를 잃을 것이고 강수처럼 운전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성우도 그 사실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우가 웃을 수 있는 이유는 이것은 전혀 기대했던 삶이 아니었지만 이 삶이 완전히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소년 성우가 그렸던 삶은 아마도 빛나는 조명 아래에서 기타를 치고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살아가는 삶이었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꿈꾸었던 삶과 다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다르지도 않다. 그 이유는 꿈은 평면적이지만 삶은 입체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각도에 따라 삶은 꿈과 아주 달라지기도 하고 아주 비슷해지기도 한다. 다만 어디에 서서 바라볼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우리에게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다.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우리에게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고 말한다. 좋은 영화다.
2024년 10월 9일부터 2024년 10월 13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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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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