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악’을 찾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악은 의외로 쉽게 발견된다. 오락을 위해 사슴을 죽이는 사냥꾼들이 그렇고 보조금을 타기 위해 마을의 생태계는 아랑곳없이 글램핑장을 세우려는 연예기획사가 그렇다. 살기 위해서라면 몰라도 단지 흥분과 희열을 위해 생명을 죽이는 일이나 식수로 사용하는 물이 오염된다는 걸 알면서도 돈을 벌기 위해 계획을 강행하는 일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희생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악이다. 이들에 비하면 야생 동물과 공존하고 물과 나무를 보호하려는 마을 사람들은 생태계를 지키는 것을 넘어 야생 동물의 수만큼이나 희박해진 인간성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처럼 보인다. 이 영화에서 윤리의 추는 기울어져 있다.
이 저울이 균형을 회복하는 것은 영화가 끝나기 바로 직전이다. 아이가 사슴과 대치하고 있는 것을 본 연예기획사 직원 타카하시가 아이를 구하기 위해 달려나가자 갑자기 타쿠미는 그를 목졸라 살해한다. 이 느닷없이 사건은 지금까지 이해할 수 있는 장면들만 보아온 관객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사슴과 대치하고 있는 아이는 다름 아닌 타쿠미의 아이였다. 위험에 빠진 자기 자식을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을 납득할 만한 이유도 없이 살해하는 타쿠미의 모습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이 영화가 마지막 장면에 마술적 리얼리즘을 사용한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불러 일으킨다. 이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인가 아니면 일종의 영화적 장치인가. 여기에는 여러 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 장면으로 인해 지금까지 줄곧 선과 악의 불균형을 지켜오던 저울이 바닥으로 내동챙이 쳐졌다는 것이다. 윤리의 균형은 악이라고 생각했던 것의 사연이나 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의 이중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선과 악을 재고 있던 상식 자체를 무너뜨림으로써 맞춰진다.
타쿠미는 왜 타카하시를 살해했을까. 이해하기 어렵지만 일단은 이렇게 밖에 설명할 수 없다. 날카로운 뿔을 가진 사슴보다 아이를 구하기 위해 달려가는 타카하시가 아이에게 더 위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위험은 앞으로 달려나가는 타카하시의 ‘행동’이 아니라 타카하시라는 인간의 ‘존재’ 자체이다. 만약 달려나가는 일이 사슴을 자극해서 아이를 공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면 굳이 목을 졸라 살해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덮쳐서 누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타쿠미가 타카하시의 목을 조른 건 여기서 그 누구보다 아이에게 위험한 대상이 사슴이 아니라 타카하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타카하시가 앞으로 뛰쳐나간 건 사슴이 아이를 공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타카하시는 아이를 구하기 위해 사슴으로부터 공격당할 위험을 무릅썼다.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 아이를 구해주려는 사람을 죽인 인간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짐승이다. 그렇다. 타쿠미는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타쿠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다. 짐승은 인간이 자기 새끼를 향해 달려갈 때 그것이 호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등산객들에게 금기처럼 내려오는 사항 중 하나는 짐승의 새끼가 보이면 그 즉시 몸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새끼가 있다면 주변에는 반드시 어미가 있기 마련이고 어미의 눈에 새끼를 향해 다가가는 인간은 제거해야 할 위협이므로 무조건 공격하기 때문이다. ‘짐승’ 타쿠미에게 ‘인간’ 타카하시는 바로 그런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글램핌장의 관리인직을 제안하기 위해 타카하시와 마유즈미가 타쿠미를 찾았을 때 차 안에서 마유즈미는 문득 물었다. “사슴이 사람을 해치나요?” 타쿠미는 아니라고 말한다. 총에 맞아서 도망칠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면 야생 사슴은 겁이 많아서 사람을 보면 도망간다는 것이다. 마유즈미는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면 울타리를 치지 말고 돌아다니게 놔두면 되지 않느냐고 묻는다. 사슴을 관광자원으로 쓰자는 말이다. 그러나 타쿠미는 야생 사슴의 몸에는 병균이 있기 때문에 사람과 접촉시켜서는 안 된다고 일축한다. 그때 타카하시가 말한다. 사람을 보고 도망간다면 글램핌장을 세우면 어차피 근처에는 오지도 않을 거라고. 그 말에 타쿠미는 말한다. “그럼 사슴은 어디로 가지?”
이 대화에서 야생 사슴은 의심의 여지없이 마을 주민이다. 연예기획사 직원들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지만 타쿠미는 야생 사슴을 마을 주민에, 글램핌장을 외부인에 대입시켜 마을의 입장을 전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겁이 많고 순하므로 외부인을 공격하지 않는다. 다만 외부인이 접촉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안 그래도 여기에는 사냥터가 있다. 글램핑장까지 생기면 더 많은 외부인이 몰려오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사냥꾼이나 캠핑족 정도겠지만 자본이 돌기 시작하면 가게와 편의시설, 각종 렌탈업이 생기고 나중에는 비슷한 종류의 글램핑장 혹은 숙박업소가 우후죽순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그렇게 외부인의 유입이 시작되면 하천을 식수로 쓰고 나무를 땔감으로 때는 마을의 주민들은 살 수가 없다. 너희가 들어오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타쿠미는 묻고 있는 것이다.
찬성도 반대도 아니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분명한 반대다. 정화조로 인한 식수 오염의 위험성이나 관리인 부재에 따른 산불의 위험성은 위치를 바꾸거나 인원을 늘린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마을 사람들이 주민설명회에서 문제삼고 있는 것은 물이나 불이 아니라 유입되는 순간 마을의 생태계를 바꾸게 될 외부인의 존재 그 자체이다. 스스로 말하다시피 마을 사람들도 처음에는 마을을 세우기 위해 산을 개발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글램핑장을 세우러 온 인간보다는 ‘사슴’에 가깝다. 이들에게 글램핑장을 세우겠다고 찾아온 연예기획사 직원들은 그 동안 바깥에서만 들리던 총소리가 발포한 총알처럼 보였을 것이다. 마을 회장이 타쿠미와 이야기하라고 한 것도 그가 특별한 직업을 가지지 않은 ‘마을인’이기 때문이다. 우동 가게를 하는 사람은 마을이 없어져도 다른 곳에 가서 우동 가게를 할 수 있지만 마을인이 직업인 사람은 마을이 사라지면 갈 곳을 잃게 된다. 농지개척 3세대로 원래는 산을 개발한 인간이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사슴에 가까운 타쿠미는 삶의 터전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연예기획사 직원들을 잘 물리쳐줄 거라고 마을 회장은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마을에 정착해 글램핑장의 관리인으로 지원하겠다는 타카하시는 타쿠미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까. 타카하시는 그의 표현대로라면 “닳아버린 마음”이 장작을 패면서 “10년만에 처음으로 기쁨을 느”꼈다. 자기는 남을 테니 마유즈미에게 먼저 돌아가라고 하는 모습은 그가 자신의 소속을 어디로 정했는지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다. 하나를 찾기 위해 해가 지는 산 속으로 들어가는 타쿠미를 따라가는 모습에서는 스스로를 마을의 일원이라고 여기는 소속감마저 보인다. 주민설명회 때 보였던 사무적이고 건조한 태도는 사라지고 낮은 자세로 마을의 일원이 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타카하시의 모습이 타쿠미의 태도를 분명하게 하지 못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연예기획사가 이 사업에서 손을 떼도록 하는 임무를 맡았으면서도 타카하시에 대한 타쿠미의 태도는 의외로 온건적이다. 장작 패는 법을 가르쳐주거나 담배를 나눠 피우기도 하고 우동 가게에 데려가 식사를 대접하기도 한다. 외지에서 온 손님이니 식사를 대접하는 것 자체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타쿠미가 연예기획사 지원을 데리고 오자 우동 가게 주인은 그에게 틀린 거스름돈을 지적했다. 이 말은 외부인과 온 이상 너 역시 외부인이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쿠미는 연예기획사 직원들과 같이 물을 길으러 나간다. 나중에 하나를 찾으러 나갈 때는 따라나서는 타카하시를 만류하지도 않았다.
이런 면면을 보면 타쿠미는 타카하시가 위험한 인물은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는 왜 하나가 사슴과 대치하고 있는 결정적인 순간에 생각을 바꾼 것일까. 타쿠미와 타카하시가 마침내 하나를 찾았을 때 하나는 두 마리의 사슴과 대치 중이었다. 총에 맞아 피를 흘리는 암컷과 그 암컷을 지키고 있는 수컷. 그 자신이 말했듯이 사슴은 인간을 보면 겁을 먹고 달아난다. 그러지 못한 이유는 총에 맞아서 달릴 수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달아나지 못하는 사슴은 인간을 공격할 수도 있다. 그러니 총에 맞은 사슴을 향해 하나가 다가갈 때 타쿠미는 당연히 하나를 붙잡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는 대신 하나를 구하기 위해 달려가는 타카하시의 목을 졸라 살해했다.
사슴은 인간을 공격하지 않는다. 만약 공격한다면 그건 사슴이 아닌 다른 무엇이다. 사슴이 인간을 공격하는 이유가 총을 맞아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라면 사슴을 사슴이 아닌 존재로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다. 타쿠미의 눈에는 마을의 일원이 되어서라도 글램핑장을 세우려는 타카하시가 사슴에게 총을 쏜 사냥꾼의 모습과 겹쳐 보였던 것은 아닐까. 인간을 공격한다고 해도 사슴은 그리 위험하지 않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서 자란 타쿠미는 그걸 잘 알았을 것이다. 사슴이 하나를 공격해도 하나는 하나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총을 맞은 사슴은 사슴이 아닌 무엇이 된다. 타쿠미에게 글램핑장은 총이고 총에 맞은 사슴은 곧 자신이다. 타카하시가 있는 한 글램핑장은 세워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기는 자기가 아닌 무언가로 변하게 된다. 총에 맞아 피를 흘리는 사슴은 바로 그것을 암시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타쿠미는 타카하시를 살해한 것이다. 자기가 아닌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
긴급피난이라는 법이 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급박한 위난을 피하기 위해서 부득이 남에게 손해를 입히는 행위라고 나온다. 영화 속에서 대립항을 이루는 연예기획사와 마을은 어떻게 보면 이 긴급피난 상황에 있다. 보조금을 받기 위해 원래 하던 사업도 아닌 글램핑장을 세운다는 것은 그만큼 회사의 재정 상태가 좋지 않다는 뜻이다. 회의 장면만 봐도 한 뼘짜리 사무실에 직원은 두 사람이 전부다. 보조금을 받지 못하면 직원 월급을 줄 수 없을 정도의 상황이라면 글램핑장 사업은 회사 입장에서 긴급피난인 셈이다. 자기 자신이 아닌 괴물로 변하지 않기 위해서 타카하시를 죽인 타쿠미의 행동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긴급피난이다. 긴급피난은 죄가 아니기 때문에 이 영화에는 제목 그대로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가 던지는 물음이 섬뜩해진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데 상처입은 자들 죽어가는 사람들은 계속 생겨난다. 이것은 무엇인가.
수미상관으로 끝나는 이 영화의 엔딩은 오프닝과 마찬가지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걷는 누군가의 시선으로 마무리된다. 타쿠미가 하늘을 보면서 걸을 리 없으므로 아마도 이 시선은 하나의 시선일 것이다. 아이의 눈은 현실을 마주하는 대신 현실보다 높은 곳을 올려다본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것은 찬란한 일출이나 장엄한 석양이 아닌 거미줄처럼 빽빽한 나뭇가지로 뒤덮인 하늘이다. 밤에는 달마저 가려버리는 이 나뭇가지들은 모두 나무가 생존하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뻗은 결과물이다. 살기 위해 하는 일이 하늘을 가린다. 살아남기 위해 저지른 일은 악이 아니지만 악이 아닌 일들로 점철된 하늘은 무섭다. 이 영화 속에서 어른과 아이의 차이가 있다면 이것이다. 어른은 하늘을 쳐다보며 걷지 않는다. 그곳에 살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뻗은 가지가 하늘을 가리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2024년 9월 29일부터 2024년 10월 1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