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시 Sep 27. 2024

영화 이야기 <인사이드 아웃 2>

라일리의 원래 자아를 찾기 위해 기억의 저편으로 가자고 말하는 기쁨이에게 까칠이는 묻는다. “계획이 있어?” 이때 기쁨의 대답이 내겐 인상적이었다. “당연히 있지. 계획 없는 감정도 있어?”


이 대답은 불안이와 비교 당하는 것에 대한 불쾌감 그리고 확신 없는 미래에 대한 허세가 반씩 섞인 말이지만 의외로 핵심을 찌른다. 계획은 이성이 세운다. 감정이 계획이 있다는 건 감정이 이성의 산물이라는 뜻이다. 다른 맥락이지만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마사 너스바움 교수는 <혐오와 수치심>에서 “감정은 평가를 수반한다”고 썼다. 우리가 특정 행동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그 행동이 불러올 결과를 예상한 반응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아기는 우유를 엎질러 카펫을 망쳐도 당황하지 않지만 청소년은 당황하고 놀란다. 아기는 이 일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알 수 없지만 청소년은 엄마가 돌아왔을 때 혼내리라는 걸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쁨이를 포함한 원조 감정 오남매가 컨트롤 타워에서 쫓겨난 이유는 그들이 형성한 자아가 불안이가 만들고자 하는 자아와 전혀 다른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아의 성격은 달라도 자아를 형성하기 위해 하는 행동은 똑같다. 둘은 필요한 기억만을 자아의 뿌리로 삼고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기억은 망각 속으로 던진다. 요컨대 기억을 선별해서 자아를 설계하고 있는 것이다. 감정이 설계하는 자아라고 하니 언뜻 낯설게 느껴지지만 사실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다. 영화 속 컨트롤 타워는 커다란 스크린과 수많은 버튼이 달린 제어판 그리고 어디서 솟아오르는지도 모를 온갖 첨단장치로 만들어져 있다. 이성이 없다면 애초에 사용이 불가능한 장비들이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한다. <인사이드 아웃>이 보여주는 것은 감정이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가 아니라 감정과 이성의 분리가 불가능하다는 전언 아닐까.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아홉 가지 감정들은 모두 자신만의 캐릭터를 가지고 있지만 그와 별개로 하나 같이 이성적으로 행동한다. 생각하고 예측해서 판단하고 움직인다. 기쁨이라고 슬프지 않은 것도 아니고 슬픔이라고 기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라일리의 사고와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감정들이지만 이 감정들은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감정들이다. 그래서 잠정적으로 이런 결론을 내린다. <인사이드 아웃>이 관객에게 제공하는 세계는 감정의 세계가 아니라 감정과 이성의 구분이 불가능한 세계이다.


이성의 영역과 감정의 영역이 분리되지 않고 혼재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선별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고 술과 담배를 끊고 건강한 음식을 먹으면 생활이 개선될 거라고. 이것은 이성적인 판단이다. 그런데 이 이성적인 판단, 합리적인 계획을 충동적이고 비합리적인 감정이 곧잘 가로막는다. 헬스장에 가야 하는데 도저히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가 않다. 어제 사둔 샐러드를 먹어야 하는데 눈은 자꾸만 배달 음식을 향한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한다. 무엇이 옳은지는 우리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이 불필요한 감정들만 마음대로 제어할 수 없을 뿐이다. 감정을 통제할 수만 있다면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텐데. 이렇게 감정은 이성의 긍정적인 도파민 역할을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개 억누르고 통제해야 할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이성과 감정의 영역을 분리할 수 없다면 이렇게 된다. 규칙적으로 운동하자는 생각이 올바른 이성적 판단인 것도 아니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통제해야 할 감정의 산물인 것도 아니다. 둘 다 동시에 할 수는 없겠지만 운동을 선택한다고 해서 꼭 올바른 일을 한 것은 아니고 누워서 쉰다고 해서 나쁜 일을 한 것도 아니다. 물론 운동하자고 다짐을 했는데 계속 눕기만 한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그건 개인의 참을성을 길러야 하는 문제이지 눕고 싶다는 마음 자체가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규칙적으로 운동하고자 하는 생각이나 자리에 눕고 싶다는 마음이나 모두 이성과 감정이 총체적으로 논의해서 도출한 결과이다. 우리는 단지 우리의 필요에 의해 알맞은 것을 그때그때 선택하면 된다.


이 영화에서 기쁨이가 컨트롤 타워에서 추방되어 기억의 저편으로 가는 이유나 불안이가 패닉에 빠져 제어판이 엉망이 되는 이유는 한 가지다. 라일리가 살면서 자연스럽게 생성되는 기억을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구분해서 일부는 모으고 일부는 버렸기 때문이다. 그 결과 기쁨이가 만든 자아는 유년의 행복한 기억에 갇혀 퇴행하는 유아기적 면모를 보이고 불안이가 만든 자아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강박증과 신경증에 사로잡힌다. 기쁨이와 불안이가 라일리가 아닐 거라고 생각해서 버렸던 부분이 사실은 모두 라일리였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쁨이가 애써 찾아온 과거의 자아를 버리고 기억의 저편에서 몰려온 온갖 기억들로 혼재된 자아를 받아들인다는 점은 자연스럽다.(너무 이른 나이에 자아의 통합을 이룬다는 사실은 부자연스럽지만) 우리는 애초에 우리가 아닌 것을 우리 안에 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네가 어디를 가든 그곳은 너의 일부가 될 것이다. 이 말이 아름다운 이유는 너의 일부가 될 그 어디가 특별한 어딘가가 아니라 모든 곳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자아를 위해 좋은 기억은 모으고 나쁜 기억은 버리는 이 편집증적 행위는 이성과 감정을 구분해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이성은 숭배하고 사람을 나태하고 충동적으로 만드는 감정은 통제의 대상으로 보았던 과거의 인식을 그대로 재현한다.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감정이란 결국 이 편집증에 대한 처방이다. 감정이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가가 아니라 감정과 이성을 분류하는 무의한 일임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이 영화의 제목이 인사이드 아웃인 이유가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안과 밖은 서로 대립하지만 안팎은 전체이기 때문이다.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감정,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으로 만들어지는 자아, 싸움과 화해 역시 그렇다. 한 쪽을 선택하는 순간 삶은 쉬워지는 대신 납작해진다. 그렇게 되면 이 평면의 삶을 입체적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아마도 긴 여행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그 여정은 비웃음의 골짜기를 건너기도 하고 잊고 싶은 기억의 산사태에 파묻히기도 하는 썩 유쾌하지 않은 경험의 연속이겠지만 그나마 위안을 주는 것은 우리가 겪은 것이 무엇이든 그 모든 것은 우리의 일부가 될 거라는 사실이다. 분명한 것은 이런 것이다. 우리 안에 마주하고 싶지 않은 우리와 대면할수록 우리는 우리를 더 많이 이해하게 된다. 기쁨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불안은 우리에 대해 더 많이 알기 위해 필요하다.



2024년 9월 25일부터 2024년 9월 27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쓰다

작가의 이전글 영화 이야기 <미스 리틀 선샤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