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맹은 파일럿이 될 수 없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에 절규하는 드웨인을 위로한 것은 일곱 살짜리 올리브였다. 나는 이 장면이 퍽 마음에 들었는데 정확히 말하면 올리브가 드웨인을 위로한 게 아니라 드웨인이 올리브를 보고 스스로 일어섰기 때문이다. 드웨인이 올리브를 보고 절망에서 빠져나온 이유는 명확하다. 이들은 지금 올리브의 리틀 미스 선샤인 대회를 위해 캘리포니아로 가는 길이었고 여기서 자기가 움직이지 않으면 올리브의 대회 참가가 무산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드웨인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올리브를 위해서 일어섰다. 내가 여기서 떠올린 것은 이 세상에 약자는 왜 필요한가 라는 질문에 대한 한 가지 대답이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와 상관없이 세상에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약자는 바로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이 가족 중에서 누가 가장 약자인가를 묻는다면 대답은 분명하다. 일곱 살짜리 올리브는 아직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없고 온 가족이 총출동한 이번 여행 역시 올리브 혼자서는 대회에 참가할 수 없기 때문에 시작됐다. 그렇다면 다른 가족 구성원들은 약자가 아닐까? 아빠인 리처드는 작가가 되려다 실패하는 바람에 파산했고 삼촌프랭크는 자살을 시도한 동성애자이며 오빠 드웨인은 니체에 빠진 은둔형 외톨이다. 올리브와 가장 친한 할아버지조차 마약 중독이다. 말하자면 이 가족들은 세간에서 말하는 루저들의 집합이다. 나이가 어리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리틀 미스 선샤인의 출전권을 손에 쥔 올리브야말로 오히려 이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승자가 될 가능성을 갖고 있다.
제각기 상황은 다르지만 이 루저들의 공통점은 바로 자신을 인생의 실패자로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 리처드는 세상이 승자와 패자로 구분되어 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아직 작가가 되지 못한 자신에 대한 통렬한 자기 인식이며 프랭크가 자살을 시도한 것 역시 라이벌에게 뒤쳐지고 연인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패배 의식 때문이다. 드웨인이 무려 9개월 동안 침묵의 맹세를 지키면서 공군사관학교에 가려고 했던 이유도 그것만이 승자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이들은 단지 자기 자신을 인생의 실패자로만 여기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빈 손이지만 소매에는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히든 카드를 숨겨놓고 있었다. 그러나 이 히든 카드는 올리브를 위해 캘리포니아로 가는 이번 여정에서 모두 들통나고 찢겨진다. 리처드는 출판업자로부터 계약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고 드웨인은 자신이 색맹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승리자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은 무참히 깨어지고 만 것이다.
막내 올리브가 리틀 미스 선샤인으로 뽑힐지도 모르는 이 고무적인 여행이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불행한 일들과 조우한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리처드의 표현을 빌린다면 성공을 위해서 겪게 마련인 불가피한 고난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올리브가 리틀 미스 선샤인으로 선발되는 게 얼마나 큰 성공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이 이 여행 속에서 마주친 불행은 더 이상 불행할 수 없을 정도로 불행하다. 집안은 파산했고 차는 고장났으며 할아버지가 죽었고 은둔형 외톨이인 아들의 유일한 꿈은 깨졌다. 모르긴 몰라도 출발 전에 이러한 불행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 가족은 아마 출발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마치 이 이야기가 작은 성공을 위해 너무나 큰 희생을 치르는 비극적인 이야기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말한다면 이것은 희극이다. 비극이 자신의 모든 것을 파괴당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을 지켜내는 이야기라면 희극은 자신의 모든 것을 파괴당하면서 지켜낸 것이 사실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속한 것은 명백히 후자이다. 파산과 죽음이라는 고비를 넘어 마침내 도착한 리틀 미스 선샤인 대회는 2차 성징도 일어나지 않은 미취학 아동에게 비키니를 입히고 화장을 시키는 기이하기 짝이 없는 대회였다. 리처드가 지금까지 모든 고통을 감내하고 이곳까지 달려온 것은 단순히 이 대회가 딸의 소망이어서가 아니라 모든 것을 잃어버린 가족들이 부활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그가 그곳에서 본 것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어른들을 흉내내기 급급한 아이들과 그런 아이들을 이용해 자신들의 뒤틀린 욕망을 합리화하는 어른들의 추악한 세계였다.
성공이나 승리라는 말은 판정이 아니라 주문이다. 이 주문을 외우면 저 멀리 유토피아가 나타나지만 바로 주변은 디스토피아로 변한다. 이 디스토피아의 이름은 개인이다.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꿈꿀 때 우리는 공동체라는 현실에서 추방된다. 리처드 가족들이 캘리포니아로 가는 여정에서 절망에 빠졌던 이유는 바로 그들이 꿈꾼 성공이 모두 각자의 성공이었기 때문이다. 리처드는 자신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를 원했고 프랭크도 자신이 프루스트 학파의 1인자가 되길 원했으며 드웨인 역시 홀로 공군사관학교로 떠나고 싶어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성공을 꿈꾸면서 스스로를 혼자로 만들어갔던 것이다.
각자의 유토피아를 꿈꿨던 가족이 해체되지 않고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올리브와 웨건 덕분이다. 가족 중에서 가장 어리고 약한 올리브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리고 폐차 직전의 웨건을 달리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혼자에서 하나가 되었다. 세상이 동경하는 건 강자지만 필요로 하는 건 약자이다. 약자가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는 혼자라는 지옥에 빠지지 않고 함께 사는 현실에 속해 있을 수 있다. 영화 이야기 <소년시절의 너>에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말 중 하나는 쓸모없다는 말이라고 한 적이 있다. 약자는 우리를 어떤 경우에도 쓸모없게 만들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강자이며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약자이다. 이 모순된 정체성에서 나오는 역동성이야말로 때론 폐차 직전의 웨건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우리 자신을 멈추지 않고 달리게 하는 동력이다.
2024년 9월 12일부터 2024년 9월 13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