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의 제목에서 방점이 찍힌 단어는 동물원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리다.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흔한 동물원이 아니라 동물원을 살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특수한 사정이기 때문이다. 벤자민은 달에 옥토끼가 산다고 믿는 일곱 살짜리의 동심을 지켜주기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여기에는 그보다는 좀 더 복잡한 사정이 있다. 일단 이 가족은 현 시점에서 각자의 생활 터전을 잃었다. 벤자민은 실직했고 딜런은 퇴학당했으며 밤마다 시끄럽게 파티를 여는 옆집 때문에 로지는 집에서 잠들지 못한다. 말하자면 이 가족에게는 가야할 곳도 돌아올 곳도 없다. 꼭 동물원이 아니었더라도 그들은 살아갈 곳을 찾아 떠나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동물원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이 어떻게 해서 각자의 생활 터전을 잃었는지 봐야한다. 우선 벤자민은 모험을 소재로 글을 쓰는 작가이다. 글감을 얻기 위해서라면 전쟁터도 태풍의 한가운데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는 출판사 대표에게 화산을 소재로 한 기획을 제안했으나 대표는 온라인 칼럼을 쓰라고 거꾸로 제안한다. 위험한 기획보다는 안정적으로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자리를 주겠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벤자민은 동정은 질색이라며 자리를 사퇴하고 나온다.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모험을 소재로 글을 쓰는 작가에게 모험은 단순히 글의 재료가 아니라 삶의 재료였을 테니까. 책상에 앉아서 가만히 월급이나 받아가라는 말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 대한 모욕처럼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 벤자민이 대표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단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불과 얼마 전 벤자민은 병으로 아내를 잃었다. 아내에 대한 벤자민의 그리움은 예전에 아내와 함께 갔던 식당만 봐도 발길을 돌리는데서 여실히 알 수 있다. 아내와의 추억이 있는 장소는 아내의 부재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벤자민에게는 낭만의 장소가 아니라 고통의 산실이다. 벤자민이 화산을 소재로 한 기획을 제안했던 것도 그런 면에서 본다면 모험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내와의 추억으로 가득 찬 이 도시를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단순히 모험을 위해서였다면 이 기획에 아이들을 포함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벤자민이 아이들과 함께 화산으로 가는 기획을 제안한 것은 아내의 부재를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 이 도시를 떠나기 위해서였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온라인 칼럼을 쓰라는 대표의 제안은 영원히 이 도시를 떠날 수 없다는 족쇄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딜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딜런이 학교에서 퇴학을 당한 것은 절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절도의 원인은 엄마의 죽음 이후 느낀 상실감에 기인한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딜런의 세상은 그로테스크한 화풍으로 표현된다. 퇴학당하는 날 교장이 벤자민에게 보여준 딜런의 그림은 입이 찢어지고 목이 잘린 인간의 모습이었다. 이것이 상실감의 표현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벤자민은 딜런에게 네가 퇴학당한 것은 그림이 이상해서가 아니라 돈을 훔쳤기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도 알고 있다. 아들이 돈을 훔친 이유는 바로 이상한 그림을 그리도록 만든 아들의 상처받은 영혼 때문이라는 것을.
말하자면 벤자민의 가족이 원래 살던 곳을 떠나는 것은 직장이나 학교를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가족을 잃었기 때문이다. 동물원으로 이사를 가는 날 벤자민의 눈에 비친 아내의 환영은 그리움의 표시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그의 시계가 멈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가는 곳마다 아내의 흔적으로 가득 찬 동네는 시간이 흐르고 있어도 미래로 가지 않는다. 그로테스크한 그림을 그리며 자폐적인 양상을 보이는 딜런의 모습도 일종의 유아적인 퇴행으로 보인다. 멈춰버린 시계를 돌리기 위해서 벤자민은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물어야 한다. 벤자민은 왜 동물원으로 갔을까. 폐쇄되어 더 이상 손님을 받지 않는 동물원은 이른바 시간이 멈춰버린 곳 아닌가. 시계를 돌리기 위해서 그는 왜 거꾸로 시간이 멈춘 곳으로 가야만 했을까.
인적이 없고 가장 가까운 마트도 15km나 떨어진 동물원은 단순히 동물원이 아니라 원래 세계와 단절된 이세계에 가깝다. 특히 그곳이 폐쇄된 곳이며 밤마다 야생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곳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애완동물을 기르는 문화가 발달하면서 사람들이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과 함께 지내는 일은 흔해졌지만 다소 예외적인 경우가 있다고 해도 그 동물이 공작이나 호랑이 혹은 사자라면 얘기가 다르다. 야생 동물이 가지고 있는 특징 중 하나는 무시간성이다. 잘 꾸민 애완동물과 달리 야생의 동물은 고래로부터 지금까지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다. 우리는 눈앞의 호랑이가 21세기의 호랑이인지 아니면 기원 전의 호랑이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벤자민이 이사한 동물원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그 정체성을 확인하기 어려운 진공지대에 가깝다.
이 진공지대를 문명과 대비해서 자연이라고 부르자. 벤자민의 가족은 가족을 잃은 슬픔을 치유하기 위해 문명에서 자연으로 나왔다. 이 점은 이 영화에서 아주 흥미로운 부분인데 왜냐하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가족 상실의 슬픔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문명의 일환이라고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벤자민과 딜런이 느끼고 있는 슬픔은 문화적인 것이다. 어쩌면 알베르 까뮈가 <이방인>에서 엄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주인공을 소개한 이유도 바로 이 문화적인 것의 인위성을 지적하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만 똑같이 가족을 잃은 슬픔이 자연적인 게 아니라 문명의 일부라는 것을 보여주면서도 <이방인>과 다르게 이 영화에서 자연은 일종의 힐링 공간으로 제시된다. 사람을 해칠 수 있는 육식 동물이 즐비한 와중에 울타리는 터무니없이 낮으며 심지어 300kg가 넘는 그리즐리 베어는 맨몸으로 대치하는 와중에도 조금도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가족을 잃은 슬픔으로 갈등이 생긴 두 부자가 화해하는 것은 바로 이 동물원이라는 공간 안에서다.
영화 속에서 벤자민 가족은 동물원을 개장하고 관람객을 받음으로써 원래 동물원이 가지고 있던 이세계성을 제거하고 문명의 일부로 돌려보낸다. 이 환원의 과정에 벤자민 가족이 포함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이 영화를 세 부분으로 나누면 [상처받은 문명으로부터의 도피] → [이세계적 자연 속에서 힐링] → [갈등의 봉합 후 문명으로의 복귀]로 구분된다. 요컨대 벤자민 가족은 도시에서 받은 상처를 자연에서 치유하고 다시 도시로 복귀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 경로는 벤자민이 원래 하던 모험을 소재로 한 글쓰기와 다르지 않다. 벤자민이 문명의 바깥으로 여겨지는 자연 현상 혹은 위험을 방문하고 그것을 글쓰기라는 방식으로 문명에 귀속시키는 것처럼 동물원으로의 이사 역시 나중에는 동물원을 개장하고 관람객을 입장시킴으로써 동물원이 원래 가지고 있던 자연성을 제거하고 문명으로 귀속시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영화는 엄마를 잃은 가족이 상처를 봉합하고 재결합하는 이야기인 동시에 문명이 자연을 어떻게 힐링 공간으로 ‘사용’하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애초에 동물원이란 문명이 만든 자연의 전람회 아닌가. 병으로 죽어가는 호랑이 스파는 벤자민의 아내에 대한 미련을 상징하지만 그 미련은 안락사라는 비자연적 방법을 사용해 소멸된다는 점에서 벤자민이 동물원에서 얻은 ‘힐링’이 자연이 아닌 문명의 소산이라는 사실을 반증하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가족이라는 개념부터가 이미 문명적인 것이다. 올더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보여준 것처럼 문명에서 태어난 자에게 순수한 자연이란 힐링이 아니라 위협이다. 문명에서 태어난 슬픔은 문명의 방식으로만 치료할 수 있는 것이다.
2024년 9월 10일부터 2024년 9월 10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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