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 샤오 베이의 얼굴을 대질시키고서 웨이 라이를 죽인 게 누구냐고 묻는 정 형사의 질문에 끝까지 자신이 죽이지 않았다고 항변하는 첸니엔을 보며 내가 느낀 것은 표독함이 아니라 아득함이었다. 첸니엔은 샤오 베이를 배신한 게 아니다. 만약 그게 배신처럼 보였다면 그 배신이야말로 유일한 구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웨이 라이를 죽인 게 자기라고 고백하면 샤오 베이는 감옥에 들어가진 않겠지만 다시 진창 같은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샤오 베이가 죄를 뒤집어쓰고 몇 년만 참으면 베이징 대학에 간 자신이 그를 구원해 줄 수 있다. 자백은 샤오 베이를 구하는 일이 아니라 서로를 함께 수렁으로 빠뜨리는 일이라고 첸니엔은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온도 차가 있다. 첸니엔이 샤오 베이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것은 그것은 서로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만 샤오 베이가 죄를 뒤집어 쓴 이유는 언젠가 찾아올 구원을 기대해서가 아니다. 일전에 샤오 베이는 첸니엔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어느 날 엄마가 고기 만두를 사왔는데 그때 자기네 형편으로 고기 만두는 구하기 힘든 음식이라 자기는 얼른 만두를 입에 넣었다고. 그런데 그때 엄마가 자신의 뺨을 때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 때문에 남자 친구와 헤어졌어.” 그리고 얼마 뒤 엄마는 샤오 베이를 떠났다. 샤오 베이가 그때 느낀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도움이 되기는커녕 짐이 되었을 때의 고독과 무력함이었을 것이다.
세상을 지키는 사람이 되겠다는 첸니엔에게 샤오 베이는 이렇게 말했다. “넌 세상을 지켜. 난 너를 지킬게.” 너를 지키는 일이 세상을 지키는 일이라면 너는 나의 세상이다. 나는 이 말을 사랑 외에 다른 것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러니 샤오 베이가 첸니엔을 대신해서 죄를 뒤집어 쓴 것은 구원을 기대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보내주기 위함이다. 네가 올라가고 싶은 곳으로 내가 끌어올려 줄 수 없다면 차라리 받쳐주겠다는 것이 샤오 베이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 우리는 스스로의 무용함을 느낀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말 중 하나는 쓸모 없다는 말이다. 고기 만두를 사온 날 엄마가 샤오 베이에게 했던 말이 그 말이었다. 그러니 샤오 베이에게 진정한 구원은 진창의 삶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유용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 영화가 표면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입신과 출세를 의미하고 나아가서는 인생을 결정하는 기준으로까지 작용하는 뒤틀린 사회 구조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좋은 대학에 간다고 해서 인생이 그것만으로 결정되지는 않는다. 대학이 인생에 미치는 영향이 생각보다 크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인생이란 어떤 한 가지 사건이나 선택으로 고정되어 버리는 단순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첸니엔이 베이징 대학을 가면 빚쟁이에게 쫓기는 엄마도, 살인 누명을 뒤집어 쓴 샤오 베이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현대 중국 사회가 얼마나 입시에 허황된 환상을 투영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영화는 후 샤오디에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후 샤오디에가 자살한 이유는 물론 웨이 라이 일당의 괴롭힘 때문이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런 의문은 남는다. 왜 후 샤오디에는 도망치지 못했을까. 영화에서 설명하듯 첸니엔과 후 샤오디에가 속한 반은 재수생 반이다. 정규 교육과정을 모두 마쳤기 때문에 입시를 보기 위해서 학교에 굳이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나오는 것은 경제적인 이유나 혹은 다른 이유로 학교에서 입시를 준비하는 것이 원하는 대학을 가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괴롭힘을 피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는 순간 원하는 대학으로 향하는 지름길에서 벗어난다. 후 샤오디에는 그것이 죽음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바깥에 죽음이 있다면 살아남기 위해서는 고통스러워도 안에서 견디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퇴교가 아닌 죽음을 선택하는 것도 자연스러워진다. 왜냐하면 어차피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또 다른 삶이 아니라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 영화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과열된 입시 제도지만 실제로는 죽음에 포위당한 아이들의 모습이다. 첸니엔도 다르지 않다. 그녀는 앞에는 입시 뒤에는 가난 그리고 옆에는 학교 폭력으로 오갈 데가 없었다. 가난과 폭력이 뒷문과 옆문을 막았기 때문에 그녀가 활로를 찾을 수 있는 곳은 입시라는 앞문뿐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로 첸니엔은 모르는 남자가 폭행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입술을 허락할 만큼 선한 마음을 가진 소녀에서 자신이 저지른 죄를 연인에게 뒤집어 씌우는 냉혈인으로 타락한다. 친구의 죽음을 슬퍼해서 사체를 옷으로 가려주었던 그녀가 연인을 사형대로 내모는 비정한 인간이 되고 만 것이다.
이 영화의 악역은 명확하다. 후 샤오디에를 죽음으로 내몰고 첸니엔을 자극하여 스스로를 죽음에 빠뜨림으로써 첸니엔을 살인자로 만드는 라이 웨이는 의심할 바 없는 선명한 악이다. 라이 웨이는 타인을 괴롭힘으로써 삶의 양분을 얻는다. 이 말은 다르게 말하면 타인을 재료로 삼아 자기 삶을 만들어 나간다는 말도 된다. 그런데 이러한 삶의 태도는 샤오 베이를 희생하여 베이징 대학에 들어가려는 첸니엔의 모습과 과연 얼마나 다른가. 첸니엔이 샤오 베이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것은 물론 최종적으로 그를 구원하기 위함이지만 그러한 목적과 별개로 자신의 삶을 진창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샤오 베이의 희생을 이용하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악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첸니엔이 베이징 대학에 들어가서 얻고자 했던 삶의 모습은 아마도 라이 웨이가 갖고 있던 가정 환경과 같을 것이다. 말하자면 첸니엔은 라이 웨이를 부정하는 한편 동경했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이 동경하는 것을 닮아간다. 어쩌면 첸니엔은 라이 웨이가 가진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환경을 동경하다가 타인을 재료로 삼아 삶을 만들어 나가는 태도까지 은연 중에 닮아간 것은 아닐까.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입시라는 제도 자체가 이미 숱한 타인을 제물로 삼아 소수의 생존자를 걸러내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합격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떨어뜨려야 한다. 비록 점수로 순위를 매겨 직접 손에 피를 묻히지는 않는 형태이긴 하지만 내가 원하는 곳에 가기 위해서는 상대보다 높은 점수를 받아 상대를 떨어뜨려야 한다는 점에서 입시는 기본적으로 약육강식의 제도이다. 따라서 입시를 삶의 유일한 활로로 여기고 입시 공부를 하면서 그 구조를 내면화하는 아이들이 타인의 삶을 재료로 삼는 삶의 방식을 무의식적으로 익히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그러나 만약 이 영화가 진정으로 지적하는 것이 이러한 잘못된 사회 구조라면 그 해결책으로 사랑을 제시하는 것은 이상해 보인다. 첸니엔이 입시를 위해 연인을 배신하는 이유는 입시만이 가난과 폭력이라는 죽음의 포위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출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문제는 입시 이전에 가난과 폭력이다. 그런데 이 가난과 폭력은 제도의 차원에서 수정되어야 할 문제이지 사랑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만약 정말로 사랑이 가난과 폭력으로부터 개인을 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믿는다면 그건 낭만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를 개선하는 역할을 정치가 포기하고 개인에게 떠넘긴다는 얘기 밖에 되지 않는다. 이 영화가 빼어난 장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지점은 바로 여기이다. 문제는 사회 구조에서 발생했는데 해결책은 개인에게서 찾는 방식은 역설적으로 문제는 제도가 아니라 개인이라는 기이한 결론을 불러온다.
이 영화에서 타락한 첸니엔을 다시 돌려놓는 것은 공안, 즉 제도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입시라는 제도는 부정하면서 정치라는 제도는 옹호하는 모순된 태도를 취한다. 이것이 모순인 이유는 학생들이 입시라는 좁은 관문 속으로 몸을 밀어넣는 이유는 가난과 폭력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인데 가난과 폭력을 개선하는 것은 바로 정치라는 제도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가난과 폭력을 개선하지 못하는 정치는 비판하지 않고 그 출구로 제시된 입시만을 비판하는 것은 머리는 비판하지 않고 꼬리만 비판하는 형국과 같다. 그렇게 되면 문제는 결국 입시가 아니라 입시에 목숨을 거는 수많은 아이들을 향하게 된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 가장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은 첸니엔인데 공안이 책임을 묻는 사람 역시 첸니엔이다. 이것은 입시라는 제도를 향해 돌진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정부의 책임은 비판하지 않고 입시를 향해 달려가는 아이를 비판하는 이중적인 잣대이다.
나는 사랑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지만 사회제도가 원인이 되어 일어난 문제를 사랑으로 해결하라는 것은 구원이 아니라 회피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샤오 베이를 구원하기 위해 면전에서 죄를 부정한 첸니엔의 모습은 그것이 표독스러운 배신이 아니라 지독한 사랑이라는 점에서 안타까웠으나 그 사랑을 이용해 죄를 자백시키는 공안의 모습은 정의를 내세워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무책임한 정치의 표본처럼 보여 허탈했다. 영화 <산사나무 아래> 이후 눈물로 관객을 설득하는 주동우 배우의 연기는 일품이다. 그러나 <산사나무 아래> 이후 그녀의 그 설득력 있는 연기는 줄곧 자신의 캐릭터를 학대함으로써 배후에 있는 제도의 문제를 가린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정치색을 띠고 있다. 언젠가 그녀가 고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영화에 출연하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영화 <소년시절의 너>는 제목 그대로 소년시절이 아니라면 경험하기 어려운 순수한 사랑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소년시절을 말하는 사람은 이미 소년이 아니다. 우리가 듣고 있는 것은 어른의 이야기이며 그 이야기는 얼마간 순수하지 않다.
2024년 9월 7일부터 2024년 9월 9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