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중 스타로드가 말했듯이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면면들은 소위 ‘루저’들이다. 온갖 초능력이 판치는 우주에서 아무 능력도 없는 보통 인간과 유색인종남녀, 실험체 동물과 휴머노이드 식물까지. 이들은 얼핏봐도 어벤져스의 주류에 해당하는 캡틴 아메리카나 아이언맨이 보여준 ‘히어로’들과는 거리가 멀다. 전투능력을 제외하더라도 캡틴 아메리카가 대의를 위해 싸우는 것과 달리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인물들은 하나 같이 사적인 이유로 싸운다. 스타로드와 로켓은 돈을 위해 싸우고 가모라와 드랙스는 개인적 원한을 갚기 위해 싸운다. 말하자면 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그 이름이 무색하게 사익을 추구하는 유랑집단이다.
그러나 인피니티 스톤을 장착하고 타노스마저 무시한 로난을 막아 잔다르를 지켜내는 것은 다름 아닌 이 비주류 유랑집단이다. 여기서 우리가 루저들의 반란 혹은 비주류의 신화를 목격하는 일은 자연스럽다. 짐작컨대 이 영화의 기획 의도 역시 캡틴 아메리카나 아이언맨 같은 주류만이 아니라 일견 무능력하고 불필요해 보이는 비주류 역시 사회적 효용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았을까. 확실히 초능력이 아니라 보통 인간의 능력으로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 적을 무찌르는 모습은 통쾌하다. 이 역전의 쾌감은 주류의 입에서 “내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줘”라는 대사가 나올 때 극대화된다.
비주류가 주류와 싸워 승리하는 언더독의 맏형으로는 다윗이 있다. 다윗과 골리앗의 그 다윗이다. 일개 양치기였던 다윗은 블레셋의 장군인 골리앗을 돌팔매로 쓰러뜨림으로써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중에는 왕의 자리에 오른다. 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도 유사한 측면이 있다. 인피니티 스톤을 장착한 로난이 골리앗이라면 양치기를 무시하던 이스라엘은 잔다르와 같다. 그러나 같기만 한 것은 아니다. 다윗과 골리앗이 비주류가 새로운 주류로 등극하는 이야기인 것과 다르게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서 팀 가이언즈 오브 갤럭시는 잔다르를 구원한 후 곧바로 다시 비주류의 위치로 돌아간다.
영화의 엔딩에서 스타로드는 “착한 일”과 “나쁜 일” 둘 다 해보자고 외치며 날아간다. 착한 일이 주류로의 편입이라면 나쁜 일은 비주류의 정체성을 고수하는 일이다. 요컨대 스타로드의 마지막 말은 주류의 임무를 수행하되 비주류의 정체성을 포기하지는 말자는 뜻으로 읽힌다. 이 결말은 주류로의 편입 혹은 비주류의 전복을 성공으로 예찬하는 기존 이야기와 선을 긋는다. 아마도 그것은 이 영화가 성공에 대한 예찬이 아니라 다양성을 예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주류가 주류로 편입하는데 성공하는 비주류의 성공신화는 주인공에게는 성공신화일 수 있어도 사회 전체로 보면 차이의 소멸이자 주류의 신격화를 뜻한다. 주류를 구원하고 훌쩍 떠나는 비주류 유랑집단은 비주류의 효용성을 입증하면서도 정체성을 격하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미심쩍은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소위 루저라 불리는 소수자 혹은 변방인들이 다수자 혹은 중심을 구원하면서도 자기 정체성을 고수하는 이야기는 분명 다양성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소수자들을 위무한다. 그런데 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정말 비주류인가. 내가 미심쩍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이 지점이다. 이들은 얼핏 각자의 이유로 사익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결국 이들이 목숨을 거는 것은 사익이 아니라 대의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정말 강조하는 것은 그들이 가진 정체성이 아니라 바로 주류의 이념 아닐까? 실제로 팀 가이언즈 오브 갤럭시 내에서 유대 관계가 형성되는 원리를 살펴보면 대부분 주류가 예찬하는 감정들이다.
스타로드와 로켓은 돈만 되면 남의 행성이야 어떻게 되듯 아랑곳하지 않는 인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스타로드가 오브를 포기하는 이유는 가모라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로켓은 술에 취해 자기가 이렇게 만들어지고 싶어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고 울부짖는데 이것은 비주류 정체성을 가진 자의 울분으로 자기 정체성에 대한 환멸을 담고 있다. 드랙스가 로난을 죽이려고 하는 이유는 그가 자기 가족을 죽였기 때문이며 가모라가 로난을 배신한 이유도 로난의 뒤에 있는 타노스가 자기 가족을 죽였기 때문이다. 요컨대 두 사람이 싸우는 이유는 윤리적이다.
그러니까 아무 능력도 없는 보통 인간과 유색인종남녀 그리고 동물 실험체와 휴머노이드 식물 등 외관상 소수자의 소수자처럼 보이는 이들은 실제로 주류가 주장하는 이념(사랑, 윤리)을 공유하며 그 이념의 원리로 작동한다. 돈에 혈안이 된 것 치고 오브는 금방 포기하는 반면 잔다르를 위해 싸울 때는 마치 목숨이 두 개라도 되는 것처럼 싸운다. 사실상 로난과의 마지막 전투 장면에 이르면 이 비주류 유랑집단은 더 이상 유랑집단이 아니라 주류를 이끄는 리더의 자리에 서 있다. 잔다르의 사령관은 자기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보라고 말하면서 이들과의 차이를 주장하지만 사실상 그 말을 할 즈음에 잔다르 수비대와 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사이의 차이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팀 가디언즈 갤럭시는 비주류 유랑집단의 외형을 갖추고 있을 뿐 사실상 그들은 주류의 가치관을 내재화한 인물들로서 유랑집단이 아니라 주류의 2중대에 가까워 보인다.
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게 비주류의 정체성이란 내재화된 성격이라기보다 오히려 옷에 가깝다. 마지막에 그들이 착용하는 단체복은 비주류의 영혼에 일시적으로 걸친 주류의 복장이 아니라 거꾸로 비로소 비주류의 껍질을 탈피한 본질에 가까워 보인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발견하는 것은 다양성에 대한 예찬이 아니라 다양성의 마케팅이다. 나는 근래에 디즈니가 <알라딘>에서 자스민을 능동적인 여성으로 바꾸거나 <인어공주>에서 흑인 에리엘을 기용하는 등 파격에 가까운 행보를 넓히는 것이 정치적 올바름처럼 보이지 않고 새로운 시장에 대한 공략처럼 보인다. 실제로 <알라딘>은 한국에서만 천만 관객이 넘었고 전 세계적으로는 10억불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 <인어공주>는 흥행에 실패했고 책임자가 사임했는데 여기서 책임자가 사임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만약 이 영화가 정치적 올바름을 위해 흑인 배우를 고용했다면 흥행이 실패했다고 해서 책임자가 왜 사임해야 했겠는가.
같은 이유로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역시 자칭 루저를 주인공으로 세운 것은 다양성에 대한 예찬이 아니라 그것이 이미 숱한 주류 주인공을 사용한 마블의 새로운 마케팅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다양성이라는 키워드를 마케팅으로 사용한 자체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아바타>의 경우 원주민과 제국주의의 이분법적 대립구조를 형성해서 다양성의 가치를 옹호하고 있지만 그게 불편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러나 누가 봐도 주류의 방식을 따르고 있으면서 다양성의 옷을 입고 스스로를 가리켜 ‘루저’라고 말하는 것은 눈속임에 가깝다. 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네이밍 역시 소수자의 가치를 대변하는 이름이 아니라 소수자가 지향해야 할 가치를 선전하는 프로파간다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은 주류로의 편입을 거부하고 소수자의 정체성을 지키는 이야기가 아니라 주류로 편입하는 새로운 방식에 대한 이야기다.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24년 8월 31일부터 2024년 9월 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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