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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Aug 29. 2024

영화 이야기 <로미오와 줄리엣>

로미오와 줄리엣이 연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만 로미오에게 줄리엣 이전에 여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도 그랬다. 이 영화에서 해질녘 쇠락한 극장 위로 로미오가 처음 등장할 때 그를 수심에 가득 찬 표정을 짓게 만든 여자는 줄리엣이 아니라 로잘라인이라는 여자다. 로미오는 로잘라인을 보고 한 눈에 반해 불구대천의 원수인 캐퓰릿 가의 무도회에 갔다가 줄리엣을 만난다. 그러니까 줄리엣에게는 로미오가 첫사랑일지 몰라도 로미오에게 줄리엣은 두 번째 사랑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셰익스피어는 왜 로미오에게 첫 번째 여자를 만들어 둔 것일까.


우선 떠오르는 생각은 사랑이 흔히 예찬하는 것처럼 위대한 감정이 아니라 사실은 외모에 의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조건 반사 같은 작용이라는 것이다. 로미오가 줄리엣을 사랑하게 된 것도 그녀의 고결한 영혼에 매료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외모 때문이었다. 외모가 얼마나 인간의 마음을 쉽게 흔들어 놓는지를 설명해 주는 사례는 많다. 일전에 한 TV 프로그램에서 정재승 박사가 말하기를 사랑에 빠진 여학생에게 남자친구 사진과 잘생긴 연예인 사진을 각각 보여주고 뇌의 반응을 비교해 본 적이 있는데 잘생긴 연예인 사진을 보았을 때 뇌의 반응이 훨씬 활발하게 일어났다는 것이다. 영화 <원더>에서도 못생긴 외모는 ‘장애’로 취급된다. 그렇다면 반대로 아름다운 외모는 ‘재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재능.


그런데 이 말대로라면 이야기의 후반부를 설명하기가 어렵다. 티볼트를 죽인 죄로 추방된 로미오는 줄리엣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베로나로 돌아오는데 발각되는 순간 사형이므로 로미오는 죽은 줄리엣을 보기 위해 목숨을 건거나 마찬가지다. 만약 사랑이 단지 외모에 의한 조건 반사에 불과하다면 이미 로잘라인에서 줄리엣으로 한 번 사랑이 변한 경험이 있는 로미오가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베로나로 돌아올 이유가 있었을까. 게다가 시신이 된 줄리엣을 발견한 로미오는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는 대신 그녀의 곁에서 죽는 것을 선택한다. 만약 사랑이 외모에 의해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가벼운 감정이라면 로미오의 죽음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래서 나는 두 가지 명제를 놓고 새로운 문장을 완성해 보려고 한다. 첫째. 사랑은 변한다. 로미오가 줄리엣을 보고 로잘라인을 잊어버렸던 것처럼 사랑은 한 사람에게 한 번만 허락된 마음의 순결 같은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이유로 하다 못해 외모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감정이다. 허준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에서 상우가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물었던 것은 사랑이 변하지 않는 감정이어서가 아니라 너의 사랑은 변했어도 나의 사랑은 아직 변하지 않았다는 말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랑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면 상우는 헤어지자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은 원래 변한다. 그래서 봄날은 아직 가지 않았어도 언젠가는 간다.


둘째. 사랑은 목숨보다 중요한 감정이다. 이 영화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은 둘 다 자결하는데 그 이유는 서로가 없는 세상을 도저히 혼자 살아갈 수 없으리라는 절망감과 사랑 없는 세상에서 오직 생존만을 위해 살아가는 삶이 무가치하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삶이 생존보다 높은 가치를 갖기 위해서는 단순히 살아있는 것 외에 살아있음을 느끼게 만드는 가치가 필요하다. 우리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가장 극적인 순간은 다름 아닌 죽음과 대면하는 순간이다. 로미오는 돌아가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죽은 줄리엣을 보기 위해 베로나로 돌아왔고 줄리엣은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하기 위해 극약을 마신다. 사랑은 인간을 죽음으로 몰고 가서 생존 너머의 삶을 보여주는 극한의 경험이다.


‘사랑은 변한다’와 ‘사랑은 목숨보다 중요한 감정이다’라는 두 개의 문장은 순접으로 읽을 수 없고 역접으로만 읽을 수 있다. ‘사랑은 변한다 그래서 사랑은 목숨보다 중요한 감정이다’라고는 말할 수 없어도 ‘사랑은 변한다 그러나 사랑은 목숨보다 중요한 감정이다’라고는 말할 수 있다. 어째서 그런가. 이 통제할 수 없고 예측할 수도 없는 ‘변화’라는 것에 맞서 사랑을 지켜내는 것이야말로 생존을 삶으로 바꾸는 인간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로미오가 베로나로 돌아온 이유 그리고 줄리엣 곁에서 죽음을 선택한 이유는 다름 아닌 그녀의 상실 후에 혼자 남은 자신의 ‘변화’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로미오는 단순히 사랑하는 여자를 잃었다는 상실감 때문만이 아니라 로잘라인의 경우에서 이미 겪었던 ‘변화’를 다시 겪지 않기 위해, 지금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목숨으로 그 대가를 치른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로미오와 줄리엣>에 로잘라인을 넣은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로미오는 그녀를 통해서 사랑이라는 감정이 고유한 운명이거나 자신의 뜻대로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사랑은 원래 변하고 그게 자연스럽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로미오로 하여금 “아침 이슬에 눈물을 뿌리”게 만들었던 로잘라인은 줄리엣을 만난 순간 사랑의 지위를 잃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은 신의 뜻이지만 그 사랑을 지켜내는 것은 인간의 의지다. 정확하게 말하면 신의 뜻과 인간의 의지가 결합되었을 때 비로소 그것은 온전한 사랑이 된다. 신의 뜻에 휘둘리기만 하는 인간은 계속해서 사랑을 잃을 것이고 신이 개입할 틈을 주지 않는 인간은 평생 누군가를 사랑할 기회를 갖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지만 삶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2022년에 시작한 영화 이야기는 오늘로 100회를 맞았다. 처음 영화 이야기를 쓰기로 했을 때 정해놓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비평처럼 쓸 것인지 에세이처럼 쓸 것인지 발행 주기는 어떻게 할 것인지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은 채 무엇이 어떻게 되든 일단 백 편만 써보자고 생각했다. 지금 당장 뭘 정하지 않아도 그때쯤이면 저절로 뭔가가 정해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전히 나는 아무것도 정해놓은 게 없다. 어쩌면 목표도 방향도 정해놓지 않고 출발한 시점에서 나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빙 둘러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 건지도 모른다.


신이 누군가에게 사랑을 시작하게 하듯 내게는 글쓰기를 시키셨다고 생각해보자. 신이 누군가에게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하듯이 내게도 언젠가는 글쓰기가 아닌 다른 일을 시키실 날이 올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사람이 사랑을 잃는 것과 같이 끊임없이 시키는 일만 하면서 살다보면 삶을 잃어버린다. 그러니 글쓰기는 신이 시킨 일이지만 동시에 신과 싸우는 일이다. 언젠가 신이 다른 일을 시키려고 할 때 글쓰기가 아니면 안 됩니다 라고 말하려면 쓰고 또 쓰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누구나 신이 준 무기로 신과 싸운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사람일 것이고 누군가에는 글일 것이다. 그래서 글쓰기는 내게 생존 너머의 삶을 지켜내는 훈련이자 내가 노예가 아니라는 증빙이다. 정해진 건은 아무것도 없고 늘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지금은 그걸로 충분하다.



2024년 8월 27일부터 2024년 8월 28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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