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를 일본에서 꼽으라면 무라카미 하루키이고, 중국에서 꼽으라면 위화이다.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건 바로 잃어버린 것을 찾으러 떠나는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경우 <태엽 감는 새>가 그랬고, 위화 작가의 경우 <원청>이 그랬다. 신형철 평론가는 첫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에서 단 하나를 지키기 위해 나머지를 모두 포기하는 자들에게 매료되었다고 말했고 나 역시 그런 캐릭터를 좋아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나는 잃어버린 것의 정당한 권리를 자각한 주인공이 그것을 찾기 위해 험난한 여정을 시작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가지고 있을 때는 그게 자기 것인지 그리고 그게 자기 것인 게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돈을 주고 물건을 교환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소유권의 의미를 꽤 명확하게 정해두고 있다. 내가 돈을 지불했다면 그 물건은 내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내가 가진 것들을 살펴보면 그게 다 내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물론 훔친 것은 없고 대부분 사거나 좋은 사람들에게 받은 것이다. 법적으로 따지자면 당연히 내 것이 맞고 설령 내가 깜박하고 존재 자체를 잊고 있던 것이라고 해도 우리집에 있고 예전에 구매한 내역이 있다면 그것도 내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게 꼭 그 전부가 내 것처럼 느껴지지가 않는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어떤 것은 없어져도 손해를 보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것 같다. 어떤 것은 누가 가져가도 한참 뒤에나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것 같고 어쩌면 영원히 모를지도 모른다. 나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과 마찬가지로 소유권은 거래의 결과라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내 것이라는 건 어쩌면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좀 더 과격하게 말하자면 진짜 내 것이란 내가 돈을 지불한 적이 없고 누가 나에게 준 것도 없으며 심지어 지금 다른 사람의 소유라고 해도 분명히 내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작가들의 작품을 들어볼까. 위화 작가의 <원청>에서 린샹푸는 부모님이 물려주신 재산과 자기가 모은 재산 그리고 이제까지 살아오면 만든 모든 생활을 포기하고 샤오메이를 찾아 떠난다. 샤오메이는 재산의 거의 절반을 훔쳐갔고 그녀를 찾는다고 해서 그 돈을 다시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금전적인 면에서는 어디 있는지도 모를 여자를 찾기 위해 어딘지도 모를 목적지를 향해 떠나는 여정을 해야 하니 손해가 막심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린샹푸는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 단 하나 샤오메이를 찾기 위해 떠난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자신의 아내이기도 하고 딸의 엄마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내가 생각했을 때 린샹푸가 샤오메이를 찾아 떠나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린샹푸가 살아가고 싶은 삶이 바로 그녀에게 있기 때문이다.
<태엽 감는 새>의 주인공도 마찬가지다. 부인은 재력가의 외동딸이고 심지어 자기 몰래 숱하게 외도를 했다는 증거까지 찾았다. 게다가 처가는 물론이고 본인마저(실제로 만난 것은 아니지만) 자기를 찾지 말라고 하는데 이 주인공은 아내를 찾아 떠난다. 이 책의 주인공이 아내를 찾아 떠나는 이유는 이렇다. 그는 어느 날 당연히 자신의 삶의 일부라고 생각했던 것을 느닷없이 강탈당했다. 물론 아내는 주인공과 개별적인 사람이고 합의만 하면 얼마든지 이혼하고 제 갈 길 갈 수 있다. 그러나 아내가 사라진 방식은 합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것이다. 심지어 그게 아내의 의지인지도 확신할 수 없다. 주인공 입장에서 본다면 누군가 자기 삶에 마음대로 들어와서 자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함부로 들고 나가버린 셈이다.
<원청>과 <태엽 감는 새>는 서로 완전히 다른 이야기지만 무언가 삶을 난도질해서 자기에게 중요한 것을 가져가 버렸고 그래서 그 중요한 것, 말하자면 내 것을 찾기 위해 어떤 고난도 감수한다는 점은 똑같다. 자기 아내가 사라졌는데 찾지 않을 남자가 어디 있겠느냐만은 금전을 훔친데다 남편이 나 하나인지조차 의심되는 여자와 외도를 저지르고 잠수를 탄 여자를 찾기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은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아내를 찾기 위해 모험을 감수하는 것은 한 마디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내 삶의 권리를 지켜내기 위해서.
얼마 전 <엑스맨 : 최후의 대결>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매그니토의 능력이 발현된 것은 나치 수용소에서 나치 군인들에 의해 부모와 생이별당하는 순간이었다. <엑스맨>의 세계관대로 ‘능력’이 ‘돌연변이 유전자’에 의한 것이라면 결국 돌연변이가 나타났다는 건 돌연변이가 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는 뜻이다. 금속을 조종하지 않고서는 금속으로 부를 이루고 금속으로 사람을 죽이는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것처럼. 말하자면 돌연변이는 특수한 개인이 아니라 세계의 변화를 알려주는 징후다. 같은 방식으로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만약 무언가가 내 삶에서 사라졌는데 그 이후로 내 삶이 전혀 달라진 것을 느낀다면 바로 사라진 것 안에 중요한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라고.
오늘 본 <모뉴먼츠 맨 : 세기의 작전>은 2차 대전 말기 나치가 유럽의 예술품을 강탈해가자 그것을 찾으러 입대하는 남자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군인이 아니라 각자 큐레이터거나 교수이거나 수집가들이다. 군에 입대하지 않아도 되었었는데 굳이 위험한 전선으로 뛰어든 것은 나치가 빼앗고 있는 유럽의 예술품이 곧 유럽의 문화이자 역사이며 유럽을 만들어 온 사람들의 삶이 집약된 물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유럽의 삶이 집약된 예술품이 대체 나와 무슨 상관인가. 예를 들어서 나 같은 경우라면 모나리자가 내일 파괴된다는 얘기를 들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노트르담의 성당은 나중에 한 번쯤 보고 싶었지만 그게 불에 타서 소실됐다는 얘기도 한참 뒤에야 알았다. 중요한 건 물건의 가치가 아니라 그게 내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이다.
예술품을 되찾기 위해 전쟁으로 뛰어든 모뉴먼츠 맨들에게 나치가 가져간 예술품은 단지 중요한 문화 자산이기 때문이라서가 아니다. 바로 그들이 예술품을 만지고 그 가치를 매기며 보존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미술관 큐레이터인데 모나리자가 불타든 말든 아무 관심이 없다면 나는 큐레이터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니라 단순한 직장인이라는 뜻이다. 큐레이터가 아니더라도 보수가 좋거나 집에서 가깝다면 얼마든지 다른 직업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모뉴먼츠 맨들이 목숨을 걸고 예술품 회수에 나선 것은 바로 그들이 하고 있는 일들이 자신의 삶과 분리하거나 대체할 수 없는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은 표면적으로 예술품을 구하러 간 것이지만 실제로는 나치에 의해 강탈된 자신의 삶 혹은 삶의 가치라고 믿는 것을 구하러 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목숨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자들과 싸운다. 누군가에게는 가족이나 이웃의 목숨이 가장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가족이나 이웃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자들과 싸운다. 누군가에는 국가가 가장 중요할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예술품이, 누군가에게는 또 무언가가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잃어버리는 순간 삶의 의미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되찾아야 할 게 있는 사람은 삶의 의미를 찾아냈다는 뜻이다.
이 영화는 다시 보고 싶은 영화가 아니지만 그래도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있었다. 겉으로는 친독파처럼 행세했지만 실제로는 레지스탕스를 지원했던 클레어가 제임스를 저녁식사에 초대하는 장면이다. 테이블 위에 이미 모든 자료를 꺼내 놓은 걸로 봐서 그녀는 제임스에게 나치가 예술품을 어디로 가져 갔는지 알려주기로 마음먹었을 것이다. 그런데 자료를 받은 다음이 중요하다. 클레어는 파리에 온 좋은 남편들은 늘 밤거리를 헤맨다며 마침 코냑이 남은 게 있다고 말한다. 누가봐도 노골적인 유혹인데 이 의미는 단순히 성애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녀는 제임스에게 자료를 주면서 이것이 자신의 삶이라고 말했다. 요컨대 예술품 관리자로서, 인간으로서의 삶이 집약된 모든 자료를 주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여자로서의 자신뿐 아닌가. 그녀는 여분을 남겨놓기 싫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임스는 정중하게 그녀의 유혹을 거절하고 단지 그녀가 준 넥타이만을 매고 돌아간다. 나는 그 이유를 이렇게 생각하는데 클레어에게 성적 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혹시 그렇게 생각하는 분이 계신다면 <토르 : 라그나로크>를 볼 것을 권한다) 제임스의 임무가 ‘회수’이기 때문이다. 클레어는 어차피 소련에 빼앗길 예술품을 미국에 주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제임스에게 자료를 준 게 아니며, 제임스 역시 예술품을 미국으로 싣고 가기 위해 자료를 찾은 게 아니다. 그의 목적은 잃어버린 예술품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 놓는 것. 말하자면 그는 삶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다시 삶을 되찾아주기 위해서 클레어로부터 자료를 받은 것이다. 그러니 언젠가 예술품이 회수되었을 때를 위해 클레어에게는 자기 자신이 없어서는 안 된다. 제임스는 그녀의 전부를 받기 싫었던 게 아니라 그녀가 잃어버린 삶을 되찾아 주고 싶었던 것이다. 자기 삶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은 타인의 삶이 소중한지도 안다.
2024년 8월 25일부터 2024년 8월 25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