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에서 가장 안쓰러운 건 잘못된 신념을 가졌다가 수장당하고 마는 스트라이커가 아니라 그의 아들인 제이슨이다. 사실 잘못된 신념만을 가지고 따진다면 매그니토도 못지 않다. 스트라이커가 모든 돌연변이를 죽이려고 했다면 매그니토는 모든 인간을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스트라이커가 비참하게 죽는 반면 매그니토는 유유자적하게 추종자까지 새로 만들어서 떠난다. 요컨대 생을 결정하는 것은 신념이 아니다. 스트라이커와 매그니토의 생사를 가른 결정적인 차이가 뭐였을까. 얼핏 보기에 스트라이커는 보통 사람이지만 매그니토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초능력만이 능력이 아니라 재력, 군사력, 정치력도 인간이 가진 능력이다.
스트라이커는 돌연변이를 수족으로 부릴 수 있을 만한 강한 지배력을 가지고 있었다. 매그니토마저 모든 걸 털어놓게 만든 그 목덜미에 떨어뜨리는 약은 단지 의학 기술력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그걸 생산할 수 있는 자본과 고도로 발달된 과학 그리고 정치와 권력을 함께 포괄하는 것이다. 그러니 능력이 없어서 스트라이커가 졌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스트라이커의 패인은 신념이나 능력의 부족이 아니라 경험의 부족이다. 매그니토는 2차 대전 당시 수용소에 끌려갔던 인물인데다 돌연변이 능력이 생기고 나서는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아왔다. 요컨대 그는 패배와 죽음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보며 지시하기만 할 뿐 한 번도 패자로서 살아본 적이 없는 스트라이커는 죽음 속에서도 활로를 찾는 법을 몰랐다.
<엑스맨>이라는 시리즈를 관통하는 것은 전편에서도 언급했다시피 패자의 삶이다. 날씨를 조종하고 눈에서 광선이 나가며 늙지도 않고 다치지도 않는 불사의 능력은 사람들에게 경탄과 존경을 끌어내는 대신 멸시와 혐오의 시선을 받는다. 만약 우리가 초능력을 갖고 싶어 한다면 그건 궁극적으로는 타인의 사랑 속에서 살아가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만약 내가 가진 능력이 나를 사람들로부터 소외시키게 된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에 가깝다. 눈부신 외모와 화려한 액션 속에 숨겨져 있지만 자비에 일당이나 매그니토 일당은 늘 사람들을 피해다니고 숨어야 하며 때론 공격받고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자유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최근에 들었던 말 중에 사람들의 욕망을 가장 적나라하게 반영하는 말이 있었다. 바로 영앤리치(Young And Rich)다. 젊음과 부를 원하는 이면에는 노화와 가난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런데 이것은 정말 노화와 가난 그 자체에 대한 두려움일까. 어쩌면 우리가 가진 진짜 두려움은 인생을 의미로 채우지 못한 채 노화와 가난 속에 살아가야 한다는 말하자면 삶의 공허감에 대한 두려움은 아닐까. 우리가 존경하고 닮고 싶어하는 무수한 사람 중에는 늙은 사람도 가난한 사람도 많다. 노화와 가난은 상대적이다. 누구보다 늙었거나 누구보다 가난하다는 말이 아니라 삶이라는 그릇이 텅 비어 있을 때 두려워진다. 그릇이 의미로 차 있는 정도에 따라 두려움의 정도는 달라진다.
나는 <엑스맨> 시리즈에서 울버린이라는 캐릭터가 꽤나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그의 초능력이 바로 이 의미와 공허의 상관관계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울버린의 뼈는 아다만티움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 아다만티움은 다이아몬드보다 높은 경도와 가치를 가진 금속이다. 뼈 대신 금속으로 만들어진 인간이라는 것은 기계화에 대한 욕망, 즉 영생을 상징하고 다이아몬드보다 비싸다는 것은 자본력, 즉 부를 상징한다. 요컨대 전신의 뼈가 아다만티움으로 이루어진 울버린은 그 자체로 영생과 부를 상징하는 캐릭터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를 상처 입히는 것도 바로 그 아다만티움이라는 점이다.
전편에서 로그에게 말했듯이 얼핏 무기처럼 보이는 울버린의 클로는 정확하게 말하면 살갗을 뚫고 나오는 뼈다. 적어도 울버린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나올 때마다 한 번도 아프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적들과 싸우기 위해 클로를 사용해야 할 때마다 울버린을 가장 먼저 상처 입히는 것은 적이 아니라 바로 아다만티움이라는 얘기다. 게다가 울버린이 평범한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자신의 과거를 찾아 끝없는 싸움의 여정을 계속 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자신의 몸이 아다만티움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다만티움이 영생과 부를 상징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끝없는 싸움과 상처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말하자면 울버린의 고통스러운 여정은 자신의 몸이 의미가 아닌 아다만티움으로 채워졌기 때문인 것이다. 반대로 그가 자비에의 학교로 들어가 타인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것은 아다만티움으로 채워진 몸 안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편에서 울버린은 온몸이 아다만티움으로 채워져 있고 불사의 능력까지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뼘도 안 되는 투기장 속에서 끝없이 스스로를 상처 입히며 살아가고 있었다. 죽지도 않고 다치지도 않으니까 몸에 끝없이 상처를 내면서 살아있음을 확인해야 했던 것이다. 꼭 무통 환자가 통증을 느끼기 위해 일부러 상처를 내는 것처럼. 그러나 지금 그는 죽을 위기에 처해 있으면서도 다른 돌연변이들, 특히 자기보다 어린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싸운다. 요컨대 삶을 느끼는 방식을 자학에서 희생으로 바꾼 것이다.
<엑스맨>의 세계관에서 사람들이 돌연변이를 혐오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의 존재로 말미암아 보통의 사람들이 덜 진화된 인류가 되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맥락에서 말하면 선택받지 못한 존재가 되는 셈이다. 돌연변이가 괴물이 아니라 신인류가 되는 순간 괴물이 되는 쪽은 원래의 인간이다. 그러나 실제로 돌연변이가 인류 다음의 진화 단계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히려 이 세계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낯선 타자가 등장했을 때 그를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대신 대립관계를 형성하는 배타적인 세계의 모습이다. 요컨대 <엑스맨>에서 진정한 엑스맨은 초능력을 사용하는 돌연변이가 아니라 스트라이커와 매그니토가 둘 다 가지고 있는 타자에 대한 부정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울버린부터 시작해서 사람들을 구하려고 목숨을 버리는 진의 모습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진정한 초능력이란 바로 낯선 타인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진은 초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끝내 죽고 말았다. 울버린은 어떤 적과도 싸울 수 있는 클로와 재생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적이 사라지지 않는다. 누구로든 변할 수 있는 미스틱은 진짜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며 상대의 능력을 훔칠 수 있는 로그는 그 누구와도 접촉할 수 없다. 그렇다면 능력은 능력이 아니라 장애이다. 게다가 이 능력은 단지 초능력에만 한정되는 게 아니다. 스트라이커는 자신이 가진 능력들, 재력과 과학력 그리고 권력을 이용해서 자기 아들을 폐인으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초능력이든 현실 사회의 능력이든 타인을 위한 희생이 아닌 스스로의 욕망을 위해 사용될 때 그것은 능력이 아닌 장애가 되는 것이라고.
그러나 똑같이 자신의 욕망을 위해 상대를 제거하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트라이커는 죽고 매그니토는 살아남은 것을 보면 가해자의 욕망은 부정해도 피해자의 욕망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라고 브라이언 싱어 감독은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 번도 당하고 산 적이 없는 자의 횡포에는 분노해도 끝없이 당하고만 살았던 인간의 복수에는 연민을 느끼게 마련이니까. 돌연변이를 증오하는 모든 인간을 죽이고자 하는 매그니토의 신념은 자기와 다른 인간을 가두고 살해하던 수용소에서의 삶이 만들어낸 것이다. 나는 공존을 목표로 자비에의 신념에 동의하지만 매그니토의 신념에는 정의는 없어도 정당성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본다면 자비에와 매그니토의 관계란 곧 정의와 정당성의 관계이기도 하다. 과연 최후의 전쟁에서 이 관계가 어떻게 정립될 것인지 궁금해진다.
2024년 8월 18일부터 2024년 8월 20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