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7월 27일. 전쟁의 끝을 알리는 방송이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왔을 때 애록고지의 참호에 있던 북한군 정윤과 국군 은표는 미친듯이 웃기 시작한다. 웃는 이유는 간단한데 그들 외에 아무도 살아남은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정윤마저 부상으로 죽어가는 중이다. 싸울 사람이 모두 죽어서 아무도 싸울 수 없게 되었을 때 더 이상 싸우지 말라는 방송이 나오는 아이러니는 말 그대로 아이러니라서 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다. 정전이 전쟁을 끝낸 게 아니다. 죽음이 끝낸 것이다. 정전 협정이 정치의 일이라면 삶과 죽음은 사람의 일인데 정치가 전쟁을 끝내기 전에 사람이 죽음으로 전쟁을 끝냈다는 것은 정치가 죽음보다 무능력하다는 말이다. 정치는 인간을 살려내지 못했다. 영화 <고지전>은 사람을 바르게 다스린다는 정치政治의 허울을 폭로하는 영화다.
전쟁이 한창인 어느 날 방첩대 중위 은표는 애록고지를 두고 적과 대치 중인 악어중대로 전출된다. 표면적으로는 말실수를 한 것에 대한 처벌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북한군과 내통하는 자가 있다는 소문의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과연 내통하는 자는 있었다. 바로 악어중대 전원이다. 애록고지를 빼앗고 뺏기는 일이 수십 번에 걸쳐 반복되면서 북한군과 국군 모두 참호 속에 술이나 담배, 고향에 부치는 편지 등을 넣어두고 서로 교환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령 고향이 남한인 북한군이 고지를 점령했을 때 고향에 부치는 편지와 술을 넣어두면 다음에 국군이 고지를 점령했을 때 그 편지를 고향에 부쳐주는 식이다. 내통이라면 내통이지만 이적 행위는 아니다. 고지를 뺏고 뺏기는 전투 속에서 그들은 정말로 서로를 죽이기 때문이다. 내가 오늘 죽인 적은 바로 어제 참호 속에 술과 편지를 넣어둔 병사일 수도 있다. 엄마가 보고 싶다고 쓴 그 병사 말이다.
술과 담배, 편지와 사진 등을 통해 북한군과 국군이 교환하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싸우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다. 만약 정치가 성공했다면 이런 일은 애초에 일어날 수가 없다. 북한군에게 국군은 괴뢰군으로만 보일 것이고 국군에게 북한군은 빨갱이 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건을 교환한다는 것은 그들이 서로 괴뢰군과 빨갱이이기 이전에 가족을 그리워하고 술과 담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이 영화에서는 기이하게 일그러진 풍경이 만들어진다. 먼 곳에서 정전 협정을 하고 있는 지도자들은 서로를 괴뢰군과 빨갱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눈앞에서 서로를 죽이는 병사들은 상대가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정전 협상 중인 지도자들은 괴뢰군과 빨갱이가 얼마나 죽든 무관심하지만 자기가 죽이고 있는 게 사람이라는 걸 아는 병사들은 죄의식과 공포 속에서 점차 인간성을 상실해간다. “사람을 너무 많이 죽여서 지옥에 가야 할 우리가 아직 살아 있는 이유는 여기가 지옥이기 때문”이라는 수혁의 말은 이 참혹한 풍경에 대한 슬픈 지적이다.
수혁은 두 명의 중대장을 죽이면서 2년만에 이등병에서 중대장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두 명의 중대장이 모두 병사들에게 옥쇄를 강요했기 때문이다. 압도적인 우세의 중공군이 몰려오자 수혁은 탈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중대장은 “군인은 죽으라면 죽는 거”라며 사수할 것을 명령한다. 탈출하지 않으면 죽고 죽으면 고지를 빼앗기는 게 당연한데도 탈출 대신 죽음을 명령하는 중대장의 모습은 소위 말하는 충직한 군인의 모습에 가깝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그의 모습이 공포와 불안에 덜덜 떨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자기가 내린 결정이 아니라 실은 위에서 내린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타인의 생각을 자신의 생각으로 전유하는 것은 반드시 그 생각이 옳다고 믿어서만은 아니다. 틀린 생각이라고 판단했을 때도 사람은 마치 그것을 자신의 생각인양 받아들인다. 그 생각을 받아들임으로써 발생하는 해악보다 그 생각의 주체를 거부함으로써 생기는 해악이 더 클 경우가 그렇다. 중대장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고지를 사수함으로써 죽는 것보다 고지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어기는 게 더 두렵다는 말이다. 물론 이것은 이상한 생각이다. 아무렴 명령을 어기는 게 죽는 것보다 두려울 수 있을까.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인데. 그러나 이 이상한 일은 실제로 영화 속에서 벌어진 일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에세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 비슷한 예가 하나 있었다. 지각한 학생이 교문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다가 그만 문에 끼어 학생이 죽어버린 일이다. 지각과 죽음 중에 어느 쪽이 무거운가는 굳이 재보지 않아도 명확하다. 그러나 학생의 지각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직업의식 혹은 윤리관이 상식적인 경중을 뒤엎고 학생을 죽인 것이다.
중대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여러 가지 정체성이 공존한다. 중대장을 예로 든다면 그는 남자이고 성인이면서 누군가의 아들이자 남편, 아버지다. 군인이라는 직업은 말하자면 이런 정체성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사람 내부에 있는 이 다양한 정체성은 공존하는 동시에 길항한다. 남자로서 해야 할 일은 군인으로서 해야 하는 일과 부딪힐 수 있고, 남편으로서 해야 하는 일은 아들로서 해야 하는 일과 부딪힐 수 있다. 이러한 충돌은 당연히 고통스럽다. 그러나 고통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와중에도 결코 균형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균형을 잃고 특정 정체성이 나머지 정체성 위에 왕으로 군림하는 순간 사람은 이상해진다. 학생을 문에 끼어 죽게 만들었던 선생이 그렇고 영화 속 중대장이 그렇다. 군인이라는 정체성이 나머지 정체성을 지배하는 순간 목숨도 빼앗기고 고지도 빼앗긴다는 걸 알면서도 타인이 “죽으라면 죽는”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중대장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중대장이라고 중공군으로부터 고지를 지켜낼 수 있다고 믿어서 버티는 게 아니다. 위에서 사수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탈출하지 못하는 것이다. 중대장을 위에서 시키면 거부하지 못하고 복종하는 군인으로 만든 것은 전쟁이다. 영화 초반부에 잠깐 나오지만 전선이 아닌 서울에서도 군인의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으며 거리는 온통 전쟁 관련 플랜카드가 나부낀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사람들은 전쟁이 아닌 일상을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전쟁은 세상을 보는 눈을 명쾌하게 만든다. 세상에는 적군과 아군이라는 두 종류의 사람 밖에 없고 내가 따라할 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상사이며 몸에 깃들어야 하는 것은 윤리가 아니라 군기이다. 전쟁이 일상이 된 나라에서 사람들은 모두 군인이 된다. 상명하복식 위계질서가 사회질서가 되고 질서를 어긴 자는 적으로 간주된다. 중대장이 특별히 이상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정신의 균형을 무너뜨린 것이다.
정신의 균형이 무너진 사람을 보여줌으로써 이 영화가 지적하는 것은 정치의 허울이다.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을 사회악으로 여기는 자유주의국가의 사람은 죽으라는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고 죽어가고 만민평등을 기조로 삼는 사회주의국가의 사람은 위에서 협상하는 사람과 아래에서 죽어가는 사람으로 나뉜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라는 기치를 내걸고 실제로 하는 일은 땅따먹기에 불과한 이 ‘윗선’의 모습은 위로 갈수록 더 많이 보이는 게 아니라 사람이 보이지 않게 되는 수직적 질서의 모순을 지적하고 있다. 수혁이 중대장을 살해하는 것은 이러한 모순에 대한 반발이다. 악어중대를 보면 가장 계급이 높은 사람은 가장 나이가 어린 신일영이다. 원래 모두를 형이라고 불렀던 그가 대위가 되어 존대를 받는 이 계급제도는 위계질서가 핵심 윤리인 수직적 사회의 표본이다. 그러나 정작 신일영은 공포와 슬픔을 견디기 위해 약물 중독이 되어간다는 점에서 그 사회는 정신의 균형이 무너진,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내부로부터 곪아가고 있는 사회라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애록고지의 참호 속에서 죽어가는 정윤에게 은표는 묻는다. “싸우는 이유가 뭔데?” 지금으로부터 2년 전 의정부 전투에서 포로가 된 은표와 수혁에게 정윤은 말했던 것이다. 너희들이 자꾸 지는 이유, 도망가기 바쁜 이유는 왜 싸우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정윤은 은표에게 말한다. “내래 분명히 알고 있었어. 근데 오래돼서 잊어버렸어.” 나도 정윤이 이유를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의정부 전투가 끝나고 은표와 수혁을 풀어주면서 정윤은 말했다. “전쟁이 끝나면 이 조국에 정말로 필요한 건 너희들이야.” 말하자면 그는 국가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그에게 이 전쟁은 미국의 괴뢰정권 속에 억압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과업, 즉 사람을 얻기 위한 싸움이었다. 그러나 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무의미한 소모전 속에 그 ‘사람’들이 끊임없이 죽어가면서 이제는 이 전쟁이 대체 무엇을 위해 시작한 전쟁이었는지 그는 잊어버리게 된 것이다.
고지를 빼앗기 위해 싸우는 고지전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싸움이다. 승자는 올라가고 패자는 내려간다. 그러나 계속되는 전투로 서로가 끝없이 올라가고 내려가는 일을 반복할 때 어느 쪽이 위이고 어느 쪽이 아래인지는 알 수 없게 되는 대신 고지는 수많은 시신들로 뒤덮인 죽음의 땅이 되고 만다. 아마도 이것은 상명하복과 위계질서로 이루어진 수직적 사회에 대한 비유일 것이다. 이 사회는 구성원들에게 끝없이 위로 올라가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손에 피를 묻히고 때론 약물에 중독되어 가면서 올라간 그곳에는 올라오지 못해 죽은 자들의 시신만 즐비하고 남은 것은 죄의식과 고통만 남은 자기 자신뿐이다. 우리가 처음 위로 올라가는 싸움을 시작한 것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였다. 고지를 점령하고 나면 싸움이 끝날 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러나 위와 아래가 존재하는 한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영화 <고지전>은 이 싸움에 대한 인상 깊은 단상이다.
2024년 10월 20일부터 2024년 10월 22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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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고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