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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Mar 10. 2024

영화 이야기 <드라이브 마이 카>

아라카와 히로무 작가의 <강철의 연금술사>에는 등가교환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만화 속 연금술사들은 손 끝에서 무엇이든 뽑아내는 마법사처럼 보이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경우는 없다. 모든 것은 교환이다. 원하는 걸 갖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내줘야만 한다. 그런데 말도 마찬가지다. 모든 말은 발화發話되기 위해 태어난다. 입 밖으로 사라지는 것이 말의 소명이므로 마음에는 말의 자리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차마 할 수 없는 말을 삼켜야만 할 때 마음은 자신의 일각을 침몰시키고 그 자리를 말에게 내준다. 하지 못한 말이 앉은 자리는 마음이 부서진 자리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드라이브 마이 카>는 말을 품느라 마음이 부서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카후쿠는 국제 연극제가 연기된 날 집으로 돌아왔다가 아내의 외도를 목격하지만 추궁하거나 분노하지 않고 모른 체 덮어둔다. 이유는 나중에 밝혀지는데, 그게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미사키가 운전하는 차 안에서 바로 그날 아내와 함께 있었던 다카츠키에게 카후쿠는 아내의 외도는 일상적인 것이었고 그러므로 너는 아내에게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말을 넌지시 전달한다. 카후쿠에 의하면 그에게 아내 오토와의 관계는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정서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그는 외도 사실을 밝히지 않으므로써 그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좋은 관계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좋은 관계란 서로를 개방시켜주는 관계이다. 좋은 관계란 무엇보다도 답답한 기분이 들지 않아야 한다. 눈치를 보거나 주눅이 들어 있다면 좋은 관계가 아니다. 좋은 관계라는 것은 우리 안에 억눌려 있었거나 막혀 있었던 부분을 개방함으로써 몸 안에 기분 좋은 자신감이 차오르게 하는 것을 말한다. 만약 우리가 누군가를 강렬히 원한다면 그건 그 사람이 나로 하여금 더 나은 나를 상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에서 멜빈은 말한다. “당신은 내가 조금 더 좋은 남자가 되고 싶게 만들었소.” 내가 지금보다 더 나은 무엇이 되고 싶다는 희망 그리고 반드시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야말로 좋은 관계의 증거이다.


카후쿠는 아내와의 관계가 만족스러웠기 때문에 그 관계를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 아내의 외도를 묵인했다고 말하지만, 아내의 외도를 알아챈 순간 이미 그 관계는 부서진 것이다. 게다가 그것이 일회성이 아니라 반복되는 상황이라면 부서진 관계의 파편이 폐부를 찌른다. 카후쿠에게는 마음이 부서지고 자리를 내준 말들이 많았을 것이다. 스스로가 열리고 있는지 아니면 닫히고 있는지는 아무리 둔한 사람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다. 연극을 하는 카후쿠는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빠르게 자각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를 무너뜨리고 봉쇄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 이유를 죽은 아이에게서 찾는다.


카후쿠의 말에 의하면 아내인 오토는 원래 배우였다. 그녀가 각본가가 된 것은 아이의 죽음으로 배우를 그만두고 나서 한참 후의 일이다. 오토는 어느 날 성관계를 하다가 감각이 절정에 올랐을 때 자기도 모르게 이야기를 말하기 시작했고 나중에 그것을 써서 각본가로 데뷔했다. 글을 쓰다가 막혔을 때 그녀는 성관계를 통해 다음 이야기로 나아간다. 그러니까 카후쿠가 아내의 외도를 묵인한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자신에 대한 배신이 아니라 단지 글을 쓰기 위한 일종의 의식이라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아내는 아이의 죽음 이후 실의에 빠져 직업을 그만두었다. 다시 일을 하기 시작한 것은 극본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이고 자신 혹은 타인과의 성관계는 그 작업의 일종이다. 그러나 당연한 말이지만 글을 쓰기 위해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한다는 사실을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카후쿠가 그것을 감내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그 모든 것의 시작에는 아이의 죽음이 있고, 아이의 죽음에는 자신의 책임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자식이 죽으면 부모는 가슴에 묻는다. 영화 초반부에도 나오듯이 “누구도 그 아이를 대신할 수 없”었고 그래서 부부의 “행복한 시간은 멈”추었다.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아이의 제사를 잊지 않고 지내 왔다는 사실은 그들이 아이를 잊지 않은 것만 아니라 아이의 ‘죽음’ 또한 잊지 못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아내가 배우를 그만두고 자신이 방송 활동을 접은 것은 말하자면 그 ‘죽음’의 일부이다. 그런 면에서 아내가 극본가로서 다시 활동을 시작하는 것은 카후쿠에게 ‘삶’의 징조로 보였을 것이다. 다른 남자와의 성관계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지만 그것이 이제껏 죽어 있던 아내의 ‘부활’의 통과의례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말하자면 카후쿠가 아내 오토의 외도를 묵인한 것은 아이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며, 아이의 죽음 속으로 함께 침잠한 아내를 삶으로 건져올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바른 동기가 반드시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는 것은 아니다. 참아낼 수 없는 것을 참아낼 때 삶은 부서진다. 카후쿠는 아내의 삶을 건져올리는 대가로 자신의 삶을 파괴했다. 왜 바냐 역을 맡지 않느냐는 다카츠키의 말에 카후쿠의 대답은 “체호프를 입에 올리면 나 자신이 끌려 나”온다는 것이었고 그는 그게 “두렵”다고 말한다. 이미 스스로도 알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내부에는 하지 못한 말들이 너무나도 많고 그로 인해 마음은 부서질대로 부서진 뒤라는 것을. 체호프를 말하다가 그 파편 중 날카로운 것이 올라오기라도 하는 순간 이제까지 그가 간신히 유지해 왔던 삶의 모양은 산산이 부서질 것이다. 카호쿠가 차에서 죽은 아내의 목소리로 녹음한 바냐 아저씨 대본을 계속 틀어두는 것은 단지 대본을 이해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그는 아내를 위해 삶의 모양을 기형적으로 뒤틀었다. 역설적이지만 이제 아내 없이는 그 모양을 유지되지 않는다.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는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고 생각했던 남자가 회한에 사로잡혀 스스로의 삶을 부정하는 이야기다. 그는 스스로의 말에 의하면 토스토예프스키 같은 문학가가 될 수도 있었지만 여동생의 남편인 교수를 위해 낮은 고정급을 받는 영지 관리인을 자처했다. 그러나 교수는 영지를 팔고 이주할 계획을 세우고 자신의 삶을 부정당했다고 생각한 바냐는 후회와 절망에 사로잡혀 교수에게 총을 발사한다. 카후쿠가 이 역을 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아마도 자신이 바냐와 닮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가 삶을 살아갈 때 자신은 다른 누군가를 위해 삶을 참아내야만 했다는 점에서.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삶을 희생해야 한다면 아마도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납득할 수 없는 것은 희생이 아니라 희생의 몰이해이다. 바냐가 견디지 못하는 것은 희생 그 자체가 아니라 교수는 물론 주변의 누구도 자신의 희생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카후쿠도 마찬가지다. 아이도 아내도 세상을 떠난 지금 누가 자신의 (희)생을 알아줄 수 있을까. 바냐를 틀어놓는 카후쿠의 마음은 세상에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극 속의 바냐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만약 그렇다면 구원은 의외로 높은 것이 아니라 낮은 곳에 있을 수도 있다. 영화 속에서 카후쿠가 처음으로 공연한 희곡은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이다. 극에 출연하는 두 사람은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린다. 그들이 기다림의 시간을 견뎌낼 수 있는 것은 오지 않는 고도 때문이 아니라 함께 시간을 견뎌주는 서로의 존재 덕분이다. 카후쿠가 바냐에게서 위안을 얻는 것도 ‘같은 처지의 인물’이기 때문이고 바냐가 최후의 순간 위로받는 것도 자신을 떠나지 않고 함께 있어주는 소냐 덕분이었다. 요컨대 구원은 나와 다른 존재에 의해 주어지는 게 아니라 나와 닮은 존재로부터 온다. 사람은 사람의 거울이다. 카후쿠가 아내의 외도를 목격한 것은 현관 앞에 세워진 거울에 비친 장면에서였다. 거울은 아내의 외도를 비추고 그런 아내의 모습은 비참한 자신의 모습을 비춘다. 반대로 나와 같은 상처를 입고 걸어가는 자는 아직 끝나지 않은 생의 모습을 비춘다. 바로 미사키이다.


미사키는 홀어머니와 단 둘이 지내다 산사태로 어머니가 죽자 히로시마로 왔다. 그녀의 뺨에 난 상처는 무너진 집에서 빠져나올 때 생겼다. 그런데 카후쿠와 함께 고향으로 가는 길에 미사키는 자신이 엄마를 죽였노라고 고백한다. 그날 무너진 집에 엄마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카후쿠는 아내를 죽였다고 말하고 미사키는 엄마를 죽였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들이 상대의 죽음에 아무 책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살인자’로 규정하는 것은 그들이 상대에게 가진 ‘증오’에 기인한다. 카후쿠는 매번 아내가 다른 남자와 뒹구는 것을 묵인해야 했고 미사키는 엄마가 매일 같이 자신을 학대하는 것을 견뎌야만 했다. 미워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내가 죽였어, 라는 말에는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던 마음이 반영되어 있다. 세상에서 그들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할 권리를 가진 사람은 나뿐이다. 그러므로 만약 그들이 살해당했다면 그 살인의 주체는 나여야 한다.


그러나 증오만이 아니다. 내가 죽였어, 라는 말의 표면이 상대에 대한 증오라면 그 이면에 있는 것은 죄책감이다. 나는 너를 증오하였으므로 나는 너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 그러나 이 죄책감이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연민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대신 미워할 때 느끼는 것은 바로 스스로가 ‘사랑할 수 없는 자’라는 의식이다. 살인자라는 것은 ‘구원받을 수 없는 자’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 것이다. 카후쿠의 아내와 미사키의 엄마는 두 사람과 화해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화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 화해 불가능성이 의미하는 것은 곧 구원의 상실이다. 카후쿠의 대본 테이프와 미사키의 뺨에 난 상처가 말하는 것은 두 사람이 그 날로부터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너의 죽음으로 나는 갇혀버린 것이다. 증오와 자기 연민의 감옥 속에.


카후쿠와 미사키가 갇힌 이 감옥은 다른 말로 하면 ‘나아갈 길 없는 여로’이다. 그러나 이 길없음은 어느 날 상대의 죽음으로 느닷없이 발생한 게 아니다. 길은 오래 전부터 끊어져 있었다. 카후쿠는 자신의 연극을 연출할 때 등장인물이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도록 해왔다. 이것은 대화를 하고 있어도 서로가 알아들을 수 없는 존재라는 인식에 기반한 연출이다. 마찬가지로 미사키는 엄마가 자신을 학대한 다음 날 또 다른 인격인 ‘사키’로 변모하는 것을 보았다. 아마도 사키는 엄마의 죄의식이 만들어낸 인격일 것이므로 결국 엄마는 과오를 수정하는 대신 숨기를 택한 것이다. 카후쿠의 연출과 사키가 말하는 것은 결국 인간은 끝내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절망의 표지이다. 말하자면 카후쿠와 미사키는 같은 고통을 짊어지고 있었다. 다카츠키의 말을 빌리자면 “아무리 이해하는 사람도,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타인의 마음을 그대로 보는 것은 무리”라는 것을 두 사람은 아주 오랫동안 느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구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죽기 전에 아내 오토가 카후쿠에게 해준 이야기는 이렇다. 한 소년을 짝사랑하는 소녀가 있다. 소녀는 매일 소년의 집으로 몰래 들어가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그의 물건을 가져온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는 자신이 전생에 칠성장어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소년의 침대 위에서 알몸이 된 채 자위를 한다. 그 순간 아래층에서 누군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이 이야기는 진실이란 얼마나 전달되기 어려운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바냐 아저씨>의 대사처럼 진실은 그 자체로는 별로 무서운 것이 아니지만 그것을 모를 때 진실은 무서운 것이 된다. 소녀가 소년의 집에 들어간 것은 그만큼 소년을 좋아했기 때문이고, 알몸으로 자위를 한 것은 전생에 대한 기억 때문이지만 집에 들어온 소년의 가족은 물론 세상 어느 누구도 소녀의 진심을 알아줄 리 없다. 그러니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발소리를 들으며 소녀가 그대로 있는 것은 결국 진실의 전달 불가능성에 대한 체념이다. 그들은 자신의 집에 전라의 소녀가 있다는 사실에 경악할 것이고 소년은 소녀를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끝난 줄 알았던 이야기는 다카츠키를 통해 계속된다. 그날 계단을 올라온 것은 소년의 가족이 아니라 빈집털이범이었고, 그는 전라의 소녀를 보자 겁탈을 시도한다. 소녀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다 빈집털이범을 죽이고 피투성이가 된 방을 내버려둔 채 샤워를 하고 집을 나온다. 다음 날 소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수할 것을 생각하지만 소년에게서는 이렇다 할 변화를 찾을 수 없다. 학교도 나왔고 평소 생활과 모든 것이 그대로다. 소녀는 소년의 집으로 가본다.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어 있고 화분 밑에 있던 열쇠가 사라졌다. 이 집은 어제 있었던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은폐해버린 것이다. 소녀는 갑자기 세계가 낯설고 불안하게 느껴진다. 소녀는 감시카메라 앞에 서서 입모양으로 알아볼 수 있게 또박또박 말한다. “내가 죽였어.”


원래대로라면 소녀는 오늘 몰락할 예정이었다. 소년을 좋아했다는 진심은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고 남의 집에 들어가 자위를 한 파렴치한에 사람을 죽인 살인자가 오늘 소녀를 기다리고 있던 운명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은폐되어 버렸고 사라졌다. 그렇다면 소녀는 구원받은 것일까. 가택침입의 죄도 살인죄도 모두 면제받았으니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구원받은 것이라면 왜 소녀는 갑자기 세상이 불안하고 낯설게 느껴지는가. 이유는 명백하다. 죄는 사하여진 게 아니라 숨겨진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는 것이라고 해도 소녀에게는 진실이 있었다. 집에 몰래 들어간 것은 소년을 좋아했기 때문이고 사람을 죽인 것은 그가 자신을 겁탈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죄가 사라지면서 진실도 함께 사라져버렸다. 모든 사람이 돌을 던져도 소녀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정당성을 느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진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이 사라진 지금 그녀는 자신이 했던 행동에게서 아무런 정당성도 발견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아니 여기에 진실이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오토가 쓴 이 이야기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려도 진실은 침전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실인가. 고통이 진실이다. 바로 우리가 결코 타인에게서 이해받을 수 없는 진실을 가지고 있다는 고통.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구원의 가능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타인의 진실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타인에게 이해받을 수 없는 진실이 있다는 고통은 안다. 왜냐하면 나 역시 그렇기 때문에. 말하자면 우리는 진실로써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고통으로써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다.


무너진 미사키의 집 앞에서 카후쿠와 미사키가 그간 마음을 무너뜨린 ‘하지 못한 말’을 쏟아내는 것도 두 사람이 같은 고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공감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두 사람은 각각 아내와 엄마가 자신의 고통을 이해해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나의 고통을 안다면 그렇게 행동할 수는 없었을 거라는 생각에.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같은 고통을 지닌다. 타인으로부터 이해받을 수 없을 거라는 고통. 카후쿠의 눈물은 고통을 견디는 것은 오직 이편만이라고 생각했던 자가 뒤늦게 흘리는 회한의 눈물이다.


다카츠키의 구속으로 히로시마 연극제에 카후쿠는 바냐 역으로 무대에 오른다. 배우들은 모두 각자의 모국어를 쓰고 덕분에 관객은 자막이 없으면 내용을 이해할 수 없다. 서로 다른 언어로 대사를 하게 한 것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우리가 서로 의미를 통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서로 알 수 없는 말로 떠들고 있을 뿐이라는 부조리극의 형식적 실험으로 읽힌다. 그러나 이 말은 반대로도 읽히는데 그것은 바로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해도 우리는 그 의미를 공유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서로 다른 말을 사용하는데도 연극이 진행될 수 있는 것은 말은 알아듣지 못해도 의미는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말은 진실이고 의미는 고통이다. 진실은 이해할 수 없어도 고통은 이해할 수 있다. 일본어로 말하는 바냐와 수어로 말하는 소냐가 관객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은 대본을 알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삶을 잃고 남겨졌다는 고통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연극을 본 미사키가 강아지와 함께 여행을 떠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서로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면 굳이 말을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그럴 수만 있다면 비록 막다른 길이 예정되어 있더라도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운전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끝없이 열린 길이 아니라 막다른 곳까지 갈 수 있는 용기이므로.



2024년 3월 6일부터 2024년 3월 10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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