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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Apr 07. 2024

영화 이야기 <쿵푸 팬더 2>

뻔한 이야기를 뻔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설득력이다. 설득력은 화술에 있지 않다. 익숙한 것에서 새로운 것을 찾아낼 때 뻔한 이야기는 낯설어지고, 낯선 이야기는 매력적으로 변한다. 전편에 이어 <쿵푸 팬더 2>의 이야기도 기본 명제는 동일하다. 운명은 주어지지 않고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것. 이 뻔한 카피라이트가 설득력을 발휘한 이유는 개척이라는 단어를 새로운 맥락에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편은 개척이라는 말이 ‘거부’와 동의어가 아님을 밝히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수용’하는 것 또한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타이렁은 용의 전사가 아닌 삶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포 역시 용의 전사로서의 삶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포가 주변의 애정과 믿음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마음으로 용의 전사가 되는 반면 타이렁은 끝내 용의 전사가 아닌 자신을 상상할 수 없어서 패배한다.


타이렁이 가지고 있던 의지와 집념 그리고 무술가로서의 자질이 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는 점을 볼 때 삶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개인의 능력치가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이다. 물론 개인의 능력은 필요하다. 시푸가 믿음을 주기 시작한 이래 포는 누구보다 열심히 훈련하고 연습했다.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뱃살의 사용법도 익혔다. 그러나 이 변화는 우그웨이의 조언과 시푸의 믿음 그리고 주위를 지켜주는 친구들과 언제든지 돌아올 곳이 되어주는 가족에 기인한 것이다. 타이렁은 강했지만 혼자였다. 반대로 포는 약했지만 주위의 사람들로 인해 강해질 수 있었다.


이 말을 바꿔서 말하면 우리가 주어진 삶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타인과의 관계가 필요하다는 말이 된다. 타이렁의 패인은 의지와 실력의 부족이 아니라 스스로를 고립시킨 데 있었다. 시푸와의 결전에서 타이렁은 말한다. “내 모든 걸 바쳐서 자랑스럽게 해주고 싶었어!” 이 말은 용의 전사가 되고자 했던 의지와 고된 훈련을 참아내는 인내심이 꼭 자기 자신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스승이자 아버지인 시푸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타이렁이 강해질 수 있었던 원동력은 시푸, 즉 스승이자 가족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돌아온 타이렁은 시푸에게 칼을 겨눔으로써 강해질 수 있었던 동력을 스스로 끊어버린다. 타이렁은 능력의 부족으로 진 것이 아니라 혼자가 되었기 때문에 진 것이다.


같은 말을 <쿵푸 팬더 2>에서도 할 수 있다. 셴은 폭죽으로 부흥한 공멘성의 후계자였지만 폭발하는 불꽃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축제가 아니라 전쟁이었다. 그는 공멘성의 발달한 화약 기술을 이용해 무기를 제작하고 정복을 통해 번영을 이루려고 시도한다. 공멘성의 성주는 자식의 성향이 비뚤어진 방향으로 나아가자 예언가를 불러 미래를 점치게 하고 예언가는 지금 같은 일을 반복하면 언젠가 흑과 백의 전사에게 파멸한다는 예언을 내놓는다. 그러자 셴은 흑과 백의 전사, 즉 팬더가 사는 마을을 습격해 어린아이까지 모조리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더 이상 자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성주는 셴을 성에서 추방하고 셴은 언젠가 돌아와 복수할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전편과 마찬가지로 속편에서도 주인공과 악역은 이란성 쌍둥이다. 포와 셴은 둘 다 부모로부터 버려졌다. 물론 포는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라는 점에서 셴과 다르지만 혈연공동체로부터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소외되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차이점은 친부모가 누군지 아는 셴은 부모로부터 떨어져 나와 혼자서 성장한 반면 친부모를 모르는 포는 양부인 거위에게 거둬져 가족 안에서 자랐다는 점이다. 이 의사 부자관계는 용의 전사가 된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시푸와 사제관계를 맺으면서 오히려 확장된다.


포는 셴의 부하들과 싸우던 와중에 갑주에 새겨진 공작 문양을 보고 불현듯 망각된 과거를 기억해낸다. 이때부터 포의 고민이 시작되는데 이 고민은 그의 말에 따르면 “나는 누구인가”하는 것이다. 친부모의 존재가 자아 정체성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당연하지만 이것이 2011년에 개봉한 애니메이션의 핵심 명제라는 사실은 다소 새삼스럽다. 왜냐하면 이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 극장에서 영화를 본 관람객들의 대부분은 본인의 자아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은 자신이지 부모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제 자연스러운 마음의 일부로 생각하는 이 ‘개인적 자아’는 신체장기처럼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도시의 형성 이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존을 위한 혈연공동체 속에서 살았고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내가 누구인지보다 나는 어디 소속인가가 더 중요했다. 예컨대 신분제와 종모법을 시행했던 조선시대에 아버지는 내가 살아갈 방향이었고 어머니는 나의 한계였다. 어느 누구도 그 방향과 한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개인적 자아의 발견은 도시가 발달하면서 생존을 위해 혈연공동체보다 개인의 능력 혹은 생존 집단을 선택할 수 있는 개인의 자유가 중시되기 시작한 이후에 이루어졌다. 요컨대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문화적 환경에서만 생성되는 인간과 사회의 합작품이다.


합작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처럼 한 사람의 자아란 그를 둘러싼 관계의 산물이다. 이 영화가 2011년에 개인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면서 부모와 가족을 소환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것은 중세의 정체성으로 회귀하자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지나치게 자아를 개인의 산물로 여기는 세태에 대한 지적이다. 부모로부터 쫓겨나 홀로 성장한 셴은 본인의 자아 정체성에 어떤 혼란도 느끼지 않는 반면 항상 가족과 함께 했던 포가 친부모의 기억의 심한 혼란을 느끼는 이유는 누가 자신의 진짜 부모이며 자신은 누구의 아들인가 하는 정체성의 오류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포의 자아가 홀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모와 친구 그리고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것임을 알려준다.


인간의 자아란 이를테면 원석에 가깝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대상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우리의 자아는 깨지고 다듬어지면서 하나의 조각을 빚어나간다. 개인적 자아의 고유성이란 바로 그 조각의 형태이지 원석 그 자체를 말하는 게 아니다. 따라서 양부 밑에서 자란 포가 또 다른 부모의 존재를 깨달았을 때 양부와 친부 그리고 자신과의 관계 형성에 혼란을 느끼는 것은 이 자아의 조각을 더 섬세하게 다듬는 작업이기도 한 셈이다. 그러나 셴의 경우로 말하자면 그에게는 가족도 형제도 친구도 없었고 가진 것이라곤 오직 부하와 원석 그 자체로서의 자아뿐이었다. 요컨대 그의 자아는 다듬어지지 않은 초기의 형태, 이른바 유아의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춤추는 별을 잉태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면에 혼돈을 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에 따르면 혼돈이 없는 내면에는 어둠뿐이다. 영화 속에서 공멘성은 폭죽으로 부흥한 나라로 그려지는데 이때 폭죽이 의미하는 것은 공업과 상업의 발달이다. 폭죽의 재료가 화약과 금속이라는 점에서 화학공업 수준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고, 폭죽은 축제에 사용하는 사치품이라는 점에서 소비 시장이 활성화되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공멘성이 공업의 발전으로 실력을 키우고 상업으로 주변의 다른 나라들과 교류를 맺으며 번영했다는 사실은 관계라는 혼돈 속에서 성장했다는 것을 뜻한다. 폭죽의 불꽃은 다름 아닌 그 혼돈이 잉태한 춤추는 별이다.


그러나 셴은 무기를 앞세운 정복전쟁으로 번영을 꾀했다. 정복은 수직관계를 확산시키는 것으로 자아를 팽창시킬뿐 깨거나 다듬지 못한다. 셴의 유아적 자아는 다른 자아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이기를 주장하지만 그 방법은 고유성이 아닌 우월성으로 나타난다. 다른 사람과의 차이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위에 올라서지 못하면 스스로의 존재를 납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지배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혼돈은 질서를 요구하지만 어둠은 끝이 없다. 또한 지배를 통한 자기 확인은 역설적으로 지배할 대상에 의해서만 유지된다. 어린아이가 끝없이 부모를 찾으면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듯 셴은 끝없이 지배할 대상을 찾으면서 불안정한 자기 자신을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셴은 타인과의 관계를 거부하고 순수한 자기 자신이라는 환상에 빠져 있는 반사회적 인물이다. 반사회적 인물이 성립되기 위해서 사회가 필요하듯 셴은 불안한 자기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지배할 타인의 존재를 갈망한다. 반대로 부모가 없음에도 가족과 친구를 만들면서 자아를 형성해 온 포는 친부모의 기억이라는 혼란 속에서도 “나는 포”라는 자기 정체성 확립에 성공한다. 이러한 역설이 가능한 이유는 원래 자아란 관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전투는 두 인물의 상반된 자아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데 일엽편주 위에 서 있는 포가 물이라면 화포를 쏘아대는 셴은 불이다. 물은 수많은 물방울이 모여 강을 이루고 바다로 나아가지만 불은 자기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주변의 모든 것을 태우다 태울 것이 사라지면 소멸한다.


운명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거라는 명제는 전편에 이어 속편에서도 유효하다. 전편이 개척이 거부가 아니라 수용이라 말한다면 속편은 운명이 혼자만의 방이 아니라 모두가 드나드는 거리라고 말한다. 점쟁이의 말처럼 우리의 생이 시작이 평탄하지 않아도 그것이 최종이 아닌 이유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사이에 스스로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거위가 고아 팬더를 아들로 삼았듯, 시푸가 스스로도 믿지 못하는 팬더를 믿고 가르쳤듯 나의 변화는 너의 변화를 불러오고 그렇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전보다 나은 곳이 되어간다. 포의 말처럼 상처는 아문다. 흉터는 오래 가겠지만 타인에게 애정과 믿음을 주고 또 스스로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혼돈이라고 믿었던 그 흉터는 언젠가 춤추는 별이 떨어진 유성의 자리가 되어 있을 것이다.



2024년 4월 6일부터 204년 4월 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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