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는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때론 이 얼어붙은 바다를 시원하게 미끄러지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상상력의 바다를 단단하게 얼리는데 가장 효율적인 방법 중 하나는 이분법이다. 편을 나누는 순간 내면의 도끼는 틈새로 사라진다. 그런 면에서 영화 <범죄도시>는 경제적인 영화다. 장첸이라는 선명한 악을 데려다 놓음으로써 관객들이 고민하지 않고 즐길 수 있게 만들었다. 장첸이 얼마나 나쁜 인간인지에 대해서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의외의 인물이 걸린다. 장첸이 악이라고 치자. 그렇다면 마석도는 선인가?
마석도는 주변 사람들이 부르는 것처럼 형사보다는 ‘형님’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는 경찰임에도 불구하고 법보다 주먹이 먼저다. 관할지역의 조직폭력배들로부터 향응과 정보를 받는 등 유착관계를 맺고 있으며 경찰서에 잡아온 피의자를 고문하기도 한다. 독사와 장이수를 화해시키고 황사장을 제지할 때 그의 모습은 그가 때리고 취조하는 무법자들과 쉽게 유리되지 않는다. 경찰과 조직폭력배를 치안과 우범이라는 준거로 분류할 때 그 기준이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사법이다. 하지만 마석도가 날리는 주먹은 법률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 범죄도시라는 영화의 제목은 극중 악의 저편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악을 제압하는 이편의 성격도 반영하고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때리고 빼앗는다는 점에서 장첸과 마석도는 유사하다. 그렇다면 두 인물을 구분하는 것은 무엇을 위해 때리고 빼앗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장첸의 경우는 선명하다. 그는 돈을 위해 때리고 빼앗는다. 가리봉동에 처음 나타난 이유도 사채를 받기 위해서였고 다른 조직과의 알력이나 살인 청부 역시 모두 돈을 갖기 위해 벌인 짓들이다. 말하자면 장첸은 단순히 잔인한 범죄자가 아니라 배금주의의 화신이다. 오히려 그가 벌이는 잔인무도한 짓은 돈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배금주의의 산물이다.
반면에 마석도는 흐릿하다. 마석도가 지키려고 하는 대상은 장첸에 의해 돈을 갈취당해 생존권을 위협받는 시장 상인들이다. 그렇다면 장첸이 배금주의의 화신인 것과 같이 마석도는 인본주의의 수호자라고 해야 이 대결구도는 성립된다. 분명히 그런 면이 있기는 하다. 현장 업무 중에 부상을 당한 막내를 인력부족에도 불구하고 사무직으로 전출시키는 모습이나 부모 없이 가게에서 일하는 아이를 대하는 따뜻한 시선 그리고 무엇보다 조직폭력배에게는 주먹부터 나가지만 약자들은 보호하는 태도가 그렇다. 적어도 시장 상인들이라는 약자에 한해 마석도가 인본주의의 수호자라는 말은 타당해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 지점이다. 시장 상인. 즉 마석도가 지키는 ‘인간’이란 한정적이다.
조직폭력배들을 대할 때 마석도는 말보다 주먹부터 나간다. 독사와 장이수를 화해시킬 때도 그가 사용한 것은 무력이었다. 공항에서 벌어지는 장첸과의 최종전을 보면 화장실 안에 피의자가 고립되어 있고 바깥에는 무장 경찰 수십 명이 대기하고 있는 와중에 마석도는 굳이 일대일 대결을 벌여 장첸을 응징한다. 특히 수갑에 묶여 저항불능 상태가 된 장첸이 중국어로 욕을 할 때 최후의 일격을 날리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인간’을 대하는 태도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석도를 인본주의의 수호자라고 불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시민에게 기생해 피를 빨아먹으며 생존하는 조직폭력배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일까.
이 대답을 쉽게 할 수 없는 이유는 이렇다. 장첸은 의심의 여지없는 배금주의의 화신이지만 마석도는 인본주의의 수호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마석도를 인본주의의 수호자로 상정하게 되면 조직폭력배는 인간이냐 아니냐 하는 아포리아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어디까지가 인간의 범위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마석도로 하여금 인본주의의 수호자처럼 보이게 만드는가 하는 것이다. 관할 지역 조직폭력배들과 유착관계를 맺고 있는 마석도는 좋게 보아도 정많은 과격 경찰 정도이지 인본주의의 수호자라고는 할 수 없다. 만약 그렇게 보인다면 그건 자신 때문이 아니라 상대 때문이다.
피투성이가 된 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자에게 장첸의 부하는 말한다. “우리 형님이 가장 싫어하는 게 같은 동포라는 말이다.” 말하자면 장첸에는 동질성이라는 게 없다. 그가 동질성을 느끼는 것은 돈이지 인간이 아니다. 끝까지 충성한 위성락이 배신했다고 생각해 죽이려던 찰나에 생각을 바꾼 것은 위성락이 주머니에 꺼낸 상품(마약) 때문이었다. 이 배금주의의 화신이 돈을 벌기 위해 하는 행동들은 모두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일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 속에서 배금주의는 인간을 원료로 삼아 돈을 창출하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인간을 위해 돈이 필요한 것이지 돈을 위해 인간이 필요한 게 아니라는 인본주의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바로 이 점으로 인해 장첸의 상대역인 마석도는 인본주의의 수호자처럼 보이게 된다.
요컨대 영화 속에서 선과 악을 정하는 것은 선이 아니라 악이라는 말이다. 조직폭력배를 향해 다짜고짜 주먹을 휘두르는 마석도의 주먹이 불편하지 않은 것은 그 주먹이 타격하는 상대가 소위 ‘맞을 만한 놈’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룸살롱에서 접대를 받거나 경찰서에서 피의자를 고문해도 괜찮은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말하자면 이 범죄도시에서 선은 무엇이 옳은가에 의해 정해지는 게 아니라 악의 농도에 의해 정해진다. 장첸이라는 새카만 악이 있으면 장이수나 황사장 같은 회색은 일면 착해보이는 구석도 있고 마석도처럼 얼룩이 좀 튄 정도는 아예 하얀 색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선을 정하는 것이 올바름이 아니라 악이라는 말은 이 영화를 관통하는 윤리관에 기인한다. 그 윤리관이란 바로 ‘악에게는 악을 저질러도 된다’는 관념이다. 독사나 장이수 같은 조직폭력배는 상인들에 기생해서 살아가는 악이므로 몇 대 쥐어박아도 되고, 온갖 악행을 저지른 위성락이 변호사를 불러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뻔뻔스러우니까 전기충격기로 지져도 된다. 끝판왕인 장첸은 말할 것도 없다. 공항 화장실에서 장첸의 몸을 부수는 마석도의 주먹은 폭력이 아니라 정당한 응징이자 형벌, 나아가서는 윤리의 실현이다.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행동을 저지른 자들을 저항 불능이 될 때까지 두드려 주고 싶은 욕망은 친숙한 것이다. 신문 사회 면에 매일 업데이트되는 끔찍한 범죄 기사의 댓글에는 사형이나 고문에 관한 말들이 항상 적힌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저지른 자들, 즉 인간의 자격을 상실한 자들에 대한 자연스러운 분노이고 사실 이 영화의 가장 큰 목적은 바로 그 분노를 해소하는 것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과연 저 분노는 악을 저지른 자들에 대한 분노이기만 할까. 어쩌면 그것은 인간의 자격을 상실한 자들을 여전히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보호하는 공공 윤리에 대한 분노는 아닐까.
다시 말해 이 영화가 해소해 주고 있는 것은 단지 악을 응징하는 것만이 아니라 악을 제대로 응징하지 못하는 공적 윤리에 대한 분노일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마석도가 행하는 모든 일은 경찰이라는 이름 하에 수행되고 있지만 실제로 이 영화에서 경찰의 역할은 미미하다. 경찰력이 본격적으로 투입되는 건 영화의 후반부이고 그마저도 이미 잡았던 위성락을 다시 잡는데 그친다. 장첸을 검거하는 것도 마석도가 다 잡아놓은 장첸을 수거해가거나 부서진 화장실의 손해배상을 떠안는 이른바 사후처리반의 역할을 넘지 못한다.
반대로 장첸의 세력을 괴멸시키고 검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마석도 휘하의 사단이다. 이들은 동거동락하는 형사도 있지만 장이수나 황사장 같은 조직폭력배도 섞여 있다. 마석도는 경찰이지만 이들 사이에서는 형님으로 불리며, 경찰은 사건을 넘기라고만 요구할뿐 인력도 경비도 지원해주지 않는다. 관할 지역 조직폭력배의 돈을 경비로 사용하면서 그들과 연대하는 마석도 사단은 그런 면에서 경찰이 아니라 일종의 사조직처럼 보인다. 요컨대 장첸 일당을 검거하는 것은 경찰이나 국가 같은 공적 기관이 아니라 강력한 무력을 가진 한 개인의 사조직인 것이다.
도심 한복판에서 조선족 폭력배가 칼을 휘두르고 있어도 공적 기관은 속수무책이다. 반대로 칼을 들고 있든 수십 명이 덤벼들든 끄떡없는 마석도의 무력은 경찰력의 상징이 아니라 개인의 힘이다.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고 관할 지역 조직폭력배와 연대하는 마석도의 모습은 무능한 공권력에 대비되는 유능한 개인의 능력으로 묘사된다. 범법에 가까운 마석도의 행위가 불편하지 않은 것은 선명한 악의 존재와 더불어 그것이 경찰이 아닌 개인의 행위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악에게는 악을 저질러도 된다는 영화 속 윤리관과 이 개인성은 서로 개별적인 것이 아니다.
어떤 악을 저질렀든 즉결처분하지 않고 재판을 받게 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최상위 공권력인 법에 의한 정언 명령이다. 법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성 중 하나는 윤리를 강제한다는 점이다. 즉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판단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공권력이 시민을 보호하지 못할 때 법이 가진 권위는 실추되고 사람들은 법이 정한 선악의 기준을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 이때 나타나는 것이 개인의 도덕률인데 문제는 사람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이 도덕률이 서로 충돌한다는 것이디. 서로 간에 충돌하는 선악의 개념을 공권력이 중재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더 강한 힘을 가진 개인이 선악의 기준을 결정하게 된다.
힘을 가진 개인이 선악의 기준을 결정하는 사회는 홉스의 표현에 따른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늑대”인 사회다. 이 사회에서 악이란 도덕규범에 의해 명시된 잘못이 아니라 나의 생존을 위협하는 모든 것이 된다. 생존을 위해서는 악을 물리쳐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악에게 저지르는 모든 일은 그 자체로 생존을 위한 정당성을 지닌다. 다시 말해 악에게 악을 저지르는 일은 정당하다는 관념은 공적 기관의 권위가 실추되고 개인의 도덕률이 선악을 결정하는 사회 속에서 발생하는 산물이다. 폭력배가 칼을 들고 날뛰어도 제재가 불가능한 범죄도시에서 이런 관념이 윤리적 중추를 이루고 있는 일은 지극히 당연하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 <범죄도시 4>는 어느새 천만 관객을 목전에 두고 있다. 때리는 방식이나 전반적인 분위기는 바뀌었지만 마석도가 범죄자를 사적 무력으로 응징하는 방식은 여전하다. 이 시리즈가 한국 영화 사상 유래 없는 흥행가도를 달리는 이유 중 하나는 이 사회가 더 이상 중재하고 감독하는 공권력을 믿을 수 없는 곳이라는 불신의 반영일지도 모른다. 이 불신을 한 마디로 얘기하면 사회가 더 이상 나의 생존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데서 오는 불안이다. 이 불안은 단순히 복지를 증대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가 사용한 말을 빌린다면 그것은 건전한 방향성을 회복했을 때만 사라진다.
지금 사회의 방향성이라는 건 한 개나 두 개로 정의될 수 없는 것이겠지만 그 중에 배금주의가 포함되어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아마 그래서 많은 관객들이 장첸이 무력하게 당하는 모습에서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배금주의의 화신을 때린다고 해서 배금주의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장첸을 때리는 마석도의 모습은 강한 개인을 상징하고 배금주의 사회에서 강한 개인은 역설적으로 돈이 많은 사람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니체가 괴물과 싸울 때는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했던 이유가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니 해야 할 일은 얼마나 강력하게 배금주의의 화신을 때리는가가 아니라 악이 했던 방식과 동일하게 악을 대하지 않는 것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홍상수 감독도 영화 <생활의 발견>에서 이렇게 말하지 않았나. “우리, 사람은 못되도 괴물은 되지 맙시다.” 같은 맥락에서 한 발언은 아니지만 문장만으로는 여전히 유효한 지적이다.
2024년 5월 5일부터 2024년 5월 11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