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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의노래 Jun 17. 2022

엄지 왕자를 추앙하다.

오늘 당신의 엄지손가락은 영양 클리닉 8만 포인트와 아내의 추앙+1을 획득하셨습니다.


"여보, 나 미용실에서 보이콧당했어. 머리카락이 너무 상해서 파마하면 다 부스러진다고 파마해 줄 수 없대. 어떡하지?"

어느 날 내가 투덜거리자 남편이 말했다.

"그럼, 내가 다니는 미용실에 같이 가 볼래? 실장님이 꼼꼼한 편이니까 잘해 주실 거야."


나는 미용실 유목민이다. 깐깐하고 손해 보기 싫어하는 성정 탓에 한 번 마음에 안 들면 단칼에 등을 돌려 버리니 어디 한 군데에 정착하기가 힘들다. 미용실뿐일까. 혹시나 호구가 되지는 않을지 근거 없는 의심을 하며 사람들에게 떽떽거리기 일쑤다. 그래서 상대방이 트집 잡힐 만한 작은 일 하나만 해도 나는 하나하나 반드시 따지고야 만다.     


반면 남편은 단골 미용실이 있다. 남편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사람이라, 예의 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에게나 호의를 베풀고 쉽게 사람들과 말을 섞는다. 게다가 남편은 엄지 왕자이기도 하다. 특별히 맛있지 않더라도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올 때는 엄지 척, 동네 카페나 문방구에서 나올 때도 엄지 척, 미용실에서마저도 어떤 스타일이 되든 엄지 척을 하며 사장님들의 기를 한껏 세워준다. 그래서 일단 마음이 통하는 곳이 생기면 쉽게 단골의 인연을 맺는 것 같다.


남편의 단골 미용실은 나도 몇 번 따라가 본 적이 있다. 동네의 허름한 숍으로 이대나 홍대에 있는 미용실들처럼 세련된 느낌은 아니다. 하지만, 남편이 단골이니 괜한 호구가 될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나는 선뜻 남편을 따라나섰다.


먼저 커트를 마친 남편은 오늘도 어김없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실장님께 과장된 칭찬을 건넸다.

"와, 실장님 최고! 정말 마음에 드는데요. 실장님, 제 와이프 머리도 잘 부탁드립니다."

실장님은 살짝 부끄러워하면서도 남편의 칭찬이 기분 좋은 듯 큰 소리로 웃어 답한 후 내게 말을 걸었다.

"하하하하! 뭘 만날 칭찬만 해 주세요? 괜히 부끄럽게."

"사모님, 안녕하세요. 오늘 파마하신다고요? 머리 한번 보고 말씀드릴게요."

그때 남편이 한마디 거들었다.

"여보, 우리 실장님한테 원하는 스타일 뭐든지 말씀드려. 그대로 다 해 주실 거야."


‘아! 민망해.’

나는 남편에 맞춰 립서비스를 할 생각이 없는데 이 상황이 매우 불편하다. 그래도 일단 파마는 해야 하니 희망 사항을 주절주절 설명했다. 내 머리를 살펴본 실장님은 조심스럽게 파마는 해 볼 수 있다고 했다.

"사모님, 머리카락이 많이 상하긴 했는데, 좋은 약 써서 파마하면 컬이 나오기는 할 것 같아요. 그럼 한번 해 볼게요."


파마를 시작한 지 어느새 네 시간이 지났다. 약품을 두 번이나 바르고 열기계 아래에 두 번이나 앉아있었는데도 아직 파마는 끝나지 않았다.

"실장님, 저 파마한 지 네 시간 됐는데 언제쯤 끝나요? 이대로 놔둬도 괜찮은 거예요?"

나의 목소리는 짜증스러웠고,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다는 합리적 의심에 힘을 얻어 한껏 날카로워져 있었다.

"아, 사모님, 조금만 더 하면 되는데... 힘드시죠? 머리카락이 너무 상해서 바로 파마를 할 수 없었거든요. 영양 주고 파마하는 거라 시간이 좀 걸려요. 빨리 해 드릴게요."

영양이 추가됐다면 비용도 추가되는 건데 문득 실장님이 비용에 대해 한 번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실장님, 영양이 추가됐다고요? 제가 부탁드린 것도 아닌데 시술 전에 미리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실장님이 당황하며 말했다.

"사모님, 제가 깜빡했나 봐요. 죄송해요. 여기 계신 손님 머리 빨리 잘라드리고 사모님 봐 드릴게요."


파마는 무려 여섯 시간 만에 끝났다. 살면서 이렇게 오랫동안 파마해 보기는 처음이다. 마치 스팀기가 달린 온열 의자에라도 앉아있었던 것처럼 내 엉덩이는 뜨끈뜨끈 축축해져 있었다. 이대로는 참을 수 없다.

"실장님, 어떻게 파마 한번 하는데 여섯 시간이 걸려요? 나중에 머리카락 다 부스러지는 거 아니에요? 다른 미용실에서는 파마 못 한다고 했는데 괜히 무리한 건 아니죠?"

내가 빠른 속도로 따지듯 묻자 실장님은 당황해하며 말했다.

"아, 아니에요. 머리카락 손상 최대한 줄이려고 약도 좋은 거 쓰고 영양도 듬뿍 줬거든요. 너무 오래 걸려서 죄송해요."

드라이를 마치고 실장님이 물었다.

“컬 어떠세요? 생각보다 잘 나온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


파마는 전체적으로 내가 원하던 스타일로 나왔다. 웨이브가 생각보다 살짝 가늘게 나오기는 했지만 드라이로 말리면 블링블링 예쁘게 구불거리는 정도의 굵기로 꽤나 마음에 들었다. 나는 짜증 났던 마음이 누그러들었지만 그래도 따질 건 따져야지 싶었다.

"파마는 괜찮은 것 같아요. 그래도 영양 넣을 때는 저한테 먼저 말씀하셨어야죠."


그 순간 미용실 근처 카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남편이 나타났다. 전화 통화를 하면서 나의 신경질이 극에 달하고 있음을 눈치챈 남편은 상황을 수습할 요량으로 나와 실장님을 보자마자 칭찬을 퍼부었다.

"와! 여보, 너무 예쁜데! 실장님, 진짜 어려 보이고 예쁜데요? 역시 실장님! 브라보!"

당황하던 실장님은 남편이 와서 폭풍 칭찬과 엄지 척 세례를 날리자 그제야 편안해진 듯 웃어 보이며 말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사장님 생각해서 잘해 드리려고 영양도 넣어드리고 했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사모님이 힘드셨을 거예요."

"사모님, 영양은 제가 사장님 생각해서 서비스로 넣어드린 거예요. 원래 그러면 안 되는 거라 나중에 말씀드리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하필이면 오늘 손님이 너무 많아서 빨리 끝날 분들 먼저 해 드리고 꼼꼼하게 사모님 머리 봐 드린다는 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버렸어요. 정말 죄송해요."     

  

그때 남편이 끼어들었다.

"실장님, 죄송은요 무슨. 예쁘게 잘해 주려고 그런 건데요. 바쁜 중에 신경 많이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래서 제가 항상 실장님께만 머리 하러 오는 거예요."

그러고는 다시 한번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박수까지 치는 남편을 보면서 나는 내심 못 마땅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거울 너머로 얼굴이 발그레 상기된 채 어쩔 줄 몰라하며 만면 가득 웃고 있는 실장님이 보였다.


예전에 남편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당신 모르지? 엄지손가락 들어 보이면 사장님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우리 미용실 실장님도 매번 얼굴이 빨개지면서 진짜 좋아하더라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기분 좋게 하고 나오면 다음에 갈 때도 기분 좋고 서로 좋잖아."


허리와 고개를 숙이고 손님들의 머리를 만지는 일은 아무리 익숙해졌다고 해도 매번 고된 작업일 것이다. 미용사라는 직업뿐만 아니라 식당 사장님도, 카페 사장님도 모두 자기의 위치에서 고된 일들을 성실하게 해내고 있다. 그럴 때 불쑥 들어온 남편의 엄지손가락, 특히 내게 잘해 주고도 불만을 듣게 된 실장님에게 남편의 엄지 척이란, 순도 높은 행복을 선물한 것이자 손님이 외면한 그녀의 노고와 진정성을 인정해 주는 ‘상’과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순간 온몸의 열기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사정도 모르고 다짜고짜 화낸 것도 민망했지만, 누군가의 노력과 배려보다 나의 불편함과 지불한 돈에 대한 대가만이 우선이었던 삶의 태도가 문득 부끄러웠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그들의 노고를 인정해주는 남편의 마음 씀씀이 앞에서 다시 한번 초라해지는 것을 느꼈다.   


모든 시술을 마친 나는 남편과 함께 엄지손가락을 살포시 들어 올리며 감사 인사를 하고 미용실을 나섰다.

“여보, 나 머리스타일 괜찮게 나온 것 같아. 마음에 들어. 앞으로는 당신이랑 같이 여기 와야겠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나도 남편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은 관대하고 친절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밖에 나오니 저녁 바람이 꽤나 쌀쌀했다. 찬바람을 막아 주려 내 어깨에 올려진 남편의 손을 보았다. 두툼하고 투박한 남편의 손에서 품격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 순간 강력한 중력이 끌어내리기라도 하듯 내 심장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아뿔싸, 남편에게 반해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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